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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05)화 (305/449)

제305화

왕 마마는 황후마마에게 가장 큰 신임을 얻고 있는 농교를 바라보았다. 평안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좋지! 완정 아가씨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고한 뒤, 과연 일등 궁녀가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였는지 반드시 폐하께 여쭤 보시게. 혹시 농교 아가씨는 궁에 사는 여인이라면 마땅히 짝으로 태감 하나씩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

“내 말이 틀렸느냐? 오늘 어화원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더냐. 이 몸이 이제 노쇠하여 지식이 미천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진정 다른 의미로는 보이지 않던데, 다른 하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두 사람은 대체 아랫것들에게 뭘 가르치고 싶은 게야? 적적한 건 참지 말라? 아니면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사내에게 추파를 던져라?”

왕 마마는 두 궁녀가 황후에게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이제껏 수천 수백 번을 훈계했던 사람답게 거리낌 없이 혼을 냈다.

농교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왕 마마를 노려보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왕 마마는 두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자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거라. 아무리 황후마마의 측근이라도 두 사람은 노비일 뿐이다. 신분을 잊은 채 황실의 체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아니 될 것이야. 그리도 예전의 후원이 그립다면, 미안하지만 황후마마께 은혜를 구하여 하루라도 빨리 조 부인을 모시러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친 왕 마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농교와 완정은 어두운 얼굴로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 *

해가 저물었다. 구염락은 새로 올라온 승전보를 접었다. 황금빛 용이 그려진 흑포黑胞가 듬직하고 훤칠한 체격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그가 옆에 선 혜령에게 물었다.

“황후의 기분은 좀 나아졌느냐?”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혜령이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후마마께서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으시다고 하옵니다. 화 마마가 사람을 보냈사온데, 마마께서 오후 내내 웃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구염락은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행여라도 장서열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두려웠다.

확실히 지나쳤다. 장서열을 나가지 못하게 한 건 결국 만정의 혼례에 참석시키기가 싫은 탓이었다. 그가 제 발이 저린 것도 당연했다.

구염락은 꾸물대며 한 번 읽은 상소문을 공연히 또 읽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조용히 주인을 기다렸다.

황제를 모시는 태감이라면 누구든 그가 황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황후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누구도 감히 폐하께 조로전에 드시라 권하지 못했다. 특히나 황제가 바빠 보일 때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상서방上書房은 고요했다. 어느덧 달빛이 환한 시간이 되었다. 구염락은 벌써 대여섯 번씩 읽은 상소문을 덮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조로전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일깨우는 자가 없다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가마를 대령하라.”

한편, 장서열은 아직 침소에 들지 못한 채였다. 눈을 감으면 오후에 본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아들을 위해 호랑이를 수놓았다.

구염락은 우물쭈물하며 조로전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초록색 홑옷을 입은 장서열이 등불 아래 수를 놓는 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뒷모습은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무언가 맺혀 있던 구염락의 마음이 덜컹하며 내려앉았다. 조금 전 상서방에서 느낀 초조함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지어 이제는 살짝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구염락이 등 뒤에서 장서열을 안았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은 조금 바빴어.”

마치 문을 열지 못해 화난 일이 없던 것처럼 장서열이 그의 손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왕 마마에게 분부하겠습니다.”

위쪽에서 애교 섞인 부드러운 구염락의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 없어. 그냥 널 안고 있을래. …미안해.”

“괜찮아요. 위험할까 봐 걱정되어 그러셨다는 거 압니다. 저는 그리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계속 이러고 있지 말고 옆방으로 가서 황아라도 좀 보고 오세요. 시장하지 않으시면 씻고 주무시고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구염락은 양손을 모으며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장서열은 그의 사랑을 느끼며 조용히 그를 내버려두었다. 창문 너머 달빛을 받은 두 그림자는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밤 숙직인 왕 마마는 차를 들고 돌아오다 순간적으로 막막한 감정을 느꼈다.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황후마마가 이렇게 폐하를 용서하는 건 너무 일렀다. 아무리 마마가 온화하고 도리를 아는 성격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무를 필요는 없었다.

‘최소한 황후마마께서도…….’

하지만 왕 마마 역시 황후가 어찌하는 게 옳았던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분명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됐다.

물론 왕 마마는 화목한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왕 마마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은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물러갔다.

비록 장서열이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구염락도 그리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타당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이틀간 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며칠 연속 적지 않은 물건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외출하자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외출은 거절했다. 이때 구염락이 답답해하지 않도록 좋은 말로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난 게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서열은 요 며칠 진심으로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구염락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장서열에게 별일이 없으면 나가서 좀 걸으라고 권했다. 산책하며 주변을 돌아보거나 누군가 옆에 있으면 허튼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장서열은 웃었다.

“제가 허튼 생각을 하는 걸 보셨나요? 설마 누군가 마음에 드신 건가요? 본궁을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꿈 깨세요!”

장서열이 두고 보겠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자 구염락은 기쁘게 웃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장서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야.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인이지. 질투쟁이.”

장서열은 달콤하게 웃었다. 자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더해진 웃음이었다.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진 장서열은 삶이란 이렇듯 의외의 사태가 없이 흘러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평온한 마음 이상의 것들은 어쩌다 우연히 얻을 수는 있겠지만, 바란다고 해서 꼭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만난다고 해도, 그 침묵을 깰 용기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도 아니다.

장서열은 언젠가 구염락이 다른 여인을 총애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의 평온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라면 또 구태여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머니는 별일 없이 건강하며, 오라버니는 기세등등했다. 이런 때에 그녀가 애써 누군가의 존재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 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목숨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장서열은 감정적으로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순간 누구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다.

장서열은 그 생각대로 행동했다. 생활은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고, 어화원에서의 일은 잊혀졌다. 사랑스러운 아들과 장난을 치며 놀던 그녀는 어느 날 회임한 지 한 달 반이 되었다는 진맥을 받았다.

조로전에는 기쁨이 넘쳤다. 장서열은 복이 넘쳐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더더욱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종종 상황은 미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회임 후 장서열은 이전처럼 태자를 돌보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구염락은 부인이 피곤하지 않도록 몇 차례나 되는 선발 과정을 거쳐 태자의 수발을 들 새 대태감을 찾았다.

그리고 명정이 선발되었다.

명정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나쁜 습관도 없었다. 그는 진중하고 정직한 일처리에 탁월했다. 비록 맹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어떤 일이든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진 공공이 적극 추천한 명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능력을 인정받은 명정은 태자 옆에서 수발을 드는 일등 대태감이 되었다.

명정이 장서열 앞에 섰다.

장서열은 명정처럼 고개를 숙인 채 오래도록 손에 든 찻잔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는 한참이 지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태자를 잘 부탁한다.”

명정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명정은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조금 전 황후마마는 조금 이상했다. 아무래도 황후마마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허락을 얻었다.

장서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무릎을 꿇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마, 또 구역질이 나셔요? 어선방에서 새로 보내온 양매楊梅입니다. 노비가 좀 전에 몰래 맛을 보았사온데, 아주 달았습니다.”

농교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함께 미소를 지은 장서열이 양매 하나를 입 안에 넣은 후,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기분을 가라앉혔다.

매일 이상한 사람을 봐야 하다니.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는 게 분명했다.

* * *

명정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구염황에게는 더욱 그랬다. 구염황은 이제 16개월로, 한창 사람에게 달라붙고 움직이기 좋아하는 나이였다.

구염황은 깨어 있을 때는 어머니의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서 힘껏 엎치락뒤치락 했고, 옆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때는 주변을 쉴 새 없이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던 장서열은 고개를 들 때마다 태자를 주시하는 명정을 보곤 했다. 그는 움직이는 구염황을 격려하면서 여기저기 오르내리는 그를 위험하다 탓하지도, 너무 높다 타이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명정은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태자의 뒤를 쫓아다니며 태자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만 도움을 주었다.

장서열은 이따금씩 신중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명정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혹시라도 황후가 자신의 방식을 책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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