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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04)화 (304/449)
  • 제304화

    다시 한 번 명정을 보게 된 장서열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초점 없는 시선이 그가 지키고 있는 문 틈새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곳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거가 있었다.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분명 있었던 일이기에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서의 평안함에 기대어 장서열은 뼛속 깊이 사무친 수많은 기억들을 차츰 잊어 갔다. 하지만 한때 평화를 느꼈던 과거는 잊혀지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지나치게 평온한 기억은 가장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든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곁을 지킨 그 그림자 덕분에 장서열은 이번 생에서도 또 다시 뜨거운 사랑을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의 기억은 그녀를 여자에서 여인으로 발전하게 해 준 시간이었다. 그녀가 출중한 남자들 앞에서도 언제나 태연할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스스로를 향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악하다면 추악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명정의 옆에 있고자 했다. 그는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되살아나는 증오를 잊고, 아버지의 나쁜 꼬드김도 잊고, 모든 한을 잊은 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살아 있었다.

    모순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한 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살아 있다니? 정말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마마?”

    그 부름에 정신을 차린 장서열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여전히 평온하고 자애로운 웃음은 도저히 어린 여인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마땅히 거만해야 옳았다. 그녀는 황후이자 태자의 생모였고,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최고의 제왕이었다. 어떤 존재도 그녀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천하의 복을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되는 여인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장서열이 옆에 있는 왕 마마에게 물었다.

    “저자는 승급한 지 얼마나 됐지?”

    장서열의 말투는 평온했다. 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세차게 뛰는 심장을 잠재웠다.

    황후의 시선을 따라간 왕 마마는 황후께서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는 전부를 전했다.

    “예, 마마. 명 공공은 어화원 총관으로 정식 부임한 지 이제 보름이 되었습니다.”

    완정은 미소를 지으며 황후에게 몸을 굽혀 말했다.

    “마마, 저 명 공공이 바로 노비가 지난번 어화원에서 본 그자이옵니다. 삼색 모란을 심었던 그 공공이요. 또한 황후 책봉식 후 마마의 근육을 풀어드리라고 진 공공이 보내 온 자도 마찬가지로 명 공공이옵니다. 특히나 태감들 중에서도 손재주가 출중하여 그때도 이미 이등 공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완정은 멀지 않은 곳에 감색 금포錦袍를 입은 명정을 보며 영광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지금 보니 또 한 품계가 올라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빨리 승급할 줄은 몰랐는데 말도 안 해 주다니…….”

    완정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즉시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완정은 민망한 듯 머리를 움츠리며 정색하고 말했다.

    “황후마마, 명 공공의 실력이면 승급도 과분하지 않습니다.”

    완정의 눈 속에 왠지 모를 감동이 스쳐 지나갔다. 수줍게 빛나는 모습은 과거 조용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마치 금을 입힌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농교가 장서열에게 다가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황후마마, 아무래도 누군가 지금 봄을 맞이하려나 봅니다.”

    완정은 뾰로통한 얼굴로 짐짓 화를 내며 다리를 동동 굴렀다.

    “농교 언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유,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내가 어디 틀린 말했어?”

    농교는 누군가 몰래 손수건에 수를 놓아 전각 밖으로 보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요처機要處에 새로운 태감이라면 당연히 명 공공뿐이었다.

    그러나 농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 또한 완정의 은밀한 속마음을 폭로할 생각은 없었다.

    완정은 농교의 장난기 가득한 눈을 통해 그녀가 뭔가 눈치챘다는 걸 알아채고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완정은 결코 농교를 속일 수 없었다. 하지만 완정이 보낸 손수건은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깨끗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황후마마와 그녀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완정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도 명정을 다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왕 마마는 놀란 얼굴로 여전히 농담을 지껄이는 두 일등 시녀를 쳐다보았다. 문득 시선을 돌린 순간, 왕 마마는 화 마마가 거의 불을 뿜을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 마마는 순간 진심으로 화 마마에게 묻고 싶었다. 이게 대마마가 할 일인가? 소란을 피우는 두 궁녀를 그냥 놔두는 건 고사하고, 심지어 공공연하게 사사로운 정을 품고 있다고 떠드는 행태를 바로잡지도 않다니! 화 마마는 본분을 다해야 마땅했다.

    장서열은 웃지 않았다. 물론 명정은 언제나 뛰어났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그녀 역시 한때는 그중 하나였다.

    완정은 보는 눈이 있었다. 지난 생에 소리자에게로 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왕 마마는 황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장서열은 손을 내저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피곤하구나. 태자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자.”

    말을 마친 장서열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황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완정이 먼저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이를 무시하고 농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거만한 등을 꼿꼿이 편 채 조로전을 향해 걸었다.

    과거에 그는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타인의 얼굴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괴롭힐 수도 있다면서.

    그리고 또 말했다. 비록 사람은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살지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아무리 순탄치 않은 삶이라도 결코 자아를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고.

    당시 장서열은 자아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그런 말을 하는 명정이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듣지 않으면 먹을 수도 없었으니까.

    장서열은 명정을 싫어했다. 비천한 태감이 사사건건 설교하는 내용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보이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실의에 빠졌다. 그는 매번 그녀를 물에서 건져 올리고, 언제나 그녀를 돌봐 주었다. 아무리 악랄하게 굴어도 항상 옆에서 지켜 주었다. 세월에 찌든 고단한 얼굴은 감히 영덕제의 옷자락조차 따라가지 못했으나 어느덧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장서열은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주저 없이 걸었다.

    * * *

    한숨을 돌린 명정은 오후 내내 긴장했던 형제들을 다독여 주었다.

    과거에 명정의 사형이었던 호창이 뛰어왔다. 그는 최근 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명 공공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호창은 황후 덕분에 어부지리로 지위가 오른 자로, 혹시라도 기회를 선점했다는 이유로 명정에게 보복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다.

    명정이 형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갑시다. 내 능력을 보여 줄 테니 그간 발전이 있었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호창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명정의 붙임성에 보이지 않게 한숨을 돌렸다. 그가 알 수 없는 감동에 즉시 흥분하여 말했다.

    “누가 감히 명 공공에게 발전이 없다고 하는가! 자네는 지금 귀한 육색 모란을 연구하고 있는데!”

    자신과는 달랐다. 그의 삼색 모란은 큰 꽃잎 하나 피어나지 못했으니.

    * * *

    한편, 조로전의 하인들은 황후마마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정원을 산책한 후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지다니! 이러다 창밖에서 새로운 후궁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라도 들린다면 큰일이었다.

    엉터리 방법을 내놓은 왕 마마에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마치 후에 폐하께서 왕 마마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두고 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왕 마마는 마치 그들의 눈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저 백치 같은 완정만을 쳐다보았다. 완정은 왕 마마의 시선에 손발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왕 마마는 왜 계속 나를 노려보는 거지?’

    결국 참지 못한 왕 마마는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완정을 밖으로 불러낸 뒤 구석에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네가 모시는 주인이 이 나라의 황후마마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냐? 천하의 지존이신 폐하께서 마마를 총애하시니 너까지 총애를 받는다고 착각한 게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어린 나이에 그리 대담하게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냐! 이제껏 궁에서 충분히 법도를 배웠을 터, 이제 마마께서 평안하시니 사고라도 치고 싶은 게냐?”

    순간 멍해진 완정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말을 더듬었다.

    “소… 소인은 그게 아니라… 저는…….”

    “그리고, 조금 전 그건 무슨 눈빛이냐? 내 너에게 부탁하여 황후마마께 아쉬운 소리라도 할 줄 알았느냐? 한낱 하인들이 머리가 나빠서 상황 파악을 못하는 건 그러려니 하겠으나 너까지 머리가 나빠서 어찌하겠느냐!”

    완정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왕 마마는 억울해하는 완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래, 마음이 가는 건 어찌할 수 없지. 허나 못 참겠으면 내색이라도 하지 말 것이지 실컷 떠벌려 놓고 이제 와서 지적을 당하는 건 무서운 것이냐? 비록 이 늙은 노비가 황후마마를 모신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내 분명 너희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 황후마마의 일등 시녀로서 태감을 쫓아다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농교는 차를 다 우려내고도 완정이 돌아오지 않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계속 울적해하는 황후를 잠시 바라본 뒤, 어린 궁녀에게 차를 건네고 완정을 찾으러 나왔다.

    문을 나선 뒤 회랑을 몇 바퀴 돈 농교는 왕 마마가 험상궂은 얼굴로 완정에게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완정은 숨이 넘어갈 듯이 울고 있었다. 순간 농교는 못된 사람에게서 착한 사람을 구해 내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왕 마마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만만한 완정에게 위세라도 부리려는 거야? 어림없는 소리!’

    얼른 달려간 농교가 등 뒤로 완정을 보호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분명 마마님께서 잘못하지 않으셨습니까! 괜히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오시면 전부 이실직고할 테니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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