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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03)화 (303/449)

제303화

명정은 물자를 배급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냉궁에서 명정과 폐후의 관계는 누구보다도 가까웠지만 또 지나치지도 않았다. 명정은 폐후를 누이동생처럼 아껴 주었다. 명정은 그녀에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매일 두 차례 밥을 보내 주었다. 병이 나면 연줄을 동원해 약을 지어 주었다.

폐후는 병이 도지지만 않으면 이웃집 소녀처럼 고분고분했다. 단순한 눈빛과 하늘이 돌봐 주는 얼굴은 독보적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심한 괴롭힘에 의해 정서적으로 불안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가장 독특하면서도 단순하게 살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웃을 만나면 인사도 할 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발전이었다. 명정은 가끔씩 그녀를 데리고 이원을 걸으며 정상적인 사람과 접촉하도록 해 주었다.

삼원은 면적이 넓었다. 명정은 그녀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깨끗이 정리했다. 이제 그녀는 삼원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 잠이 들지 못할 때면 명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확실히 편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단을 맞으면 즉시 행동을 고치는 그녀의 모습에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명정은 그녀를 아껴 주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명정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겨울의 밤은 어두컴컴했다.

이미 깨 버린 이상 금방 다시 잠이 들지는 못할 것이다. 명정은 대태감이 입는 겉옷을 걸치고 몸을 일으켰다. 올 겨울에 추가로 더 구입할 물품이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촛불이 막 켜졌을 무렵, 갑자기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정 형님! 큰일 났습니다! 삼원에서 누군가가 호수에 뛰어들었어요! 그 근처에서 21번도 목격됐답니다!”

명정은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한 채 삼원으로 즉시 뛰쳐나갔다. 명정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폐후는 흰둥이를 껴안고 움츠린 채 찬바람이 부는 인파 속에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들려 나간 여인처럼 해 보고 싶다는 듯.

일을 모두 처리한 명정은 이년이 가지고 온 겉옷을 꼭 쥔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폐후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처소로 갔다.

“서열, 그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야. 당신은 절대 시도해서는 안 돼. 알겠지?”

폐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흐릿한 시체를 본 그녀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가늘게 떨렸다.

“서열…….”

“그래, 네 이름이야.”

명정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는 서열이야. 열 자는… 기쁘다는 뜻이지.”

폐후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두려울 만치 창백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마음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날 밤 명정은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는 얇은 이불을 한 겹 더 가져왔고, 불도 더욱 세게 뗐다.

폐후는 명정의 품에 웅크린 채 달게 잤다. 명정의 팔에 펼쳐진 부드러운 머리칼은 최고급 옷감보다도 더 매끄러웠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느낌은 의지가 강한 명정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마치 삼 년 동안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여전히 호사를 누리는 이 나라의 황후였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고결한 품격은 정신을 차린 명정을 비굴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명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벌어진 일은 그에게 폐후의 존재를 새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명정은 날이 밝기 전 떠났다. 어젯밤 일의 사후 처리를 해야 했다. 그는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알아야 할 사람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전에 수천 수백 번을 그러했던 것처럼 냉궁에서 벌어진 일은 세상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사람이 들려 나갔고 땅에 묻혔다. 이 일을 따져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정은 삼원에서 머무는 시간을 점점 늘렸다. 그가 초봄에 한 일이라고는 폐후에게 상식을 가르치고, 냉궁의 배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선택권을 늘려 주고 있었다.

명정은 그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자유롭고 즐겁게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이원 사람과 즐겁게 놀던 폐후는 말싸움이 벌어지자 갑자기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봄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 포위를 뚫고 호수로 뛰어 들었다. 옆에는 마치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처럼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여인들이 있었다.

명정은 일주일간 제대로 쉬지도 못 한 채 밤낮으로 그녀를 돌봤다. 깨어난 폐후는 잠시 웃더니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옆에 있는 자를 할퀴고, 손을 들어 때렸다.

얼굴에 깊은 혈흔이 생긴 명정은 피곤에 지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하지. 화는 이따 내고, 우선 약부터 먹자.”

명정은 물에 빠진 폐후를 위해 처벌을 무릅쓰고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의 정신이 본래 온전치 못하다 해도 잠재의식은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자극을 준 것 같소. 병세는 차도 없이 점점 위중해질 거요. 명정, 기대하기 어렵겠소이다. 폐위된 후궁이야 많이 봐 왔잖소. 최선을 다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의사는 떠났다.

명정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가녀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과 하얗고 깨끗한 피부. 눈가에 남은 옅은 주름 외에는 나이를 가늠할 만한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병세는 점점 위중해지기만 하는 걸까.

누군가 폐후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치를 가르쳤다면 분명 그녀는 좋은 아가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간을 들이기는커녕 기어코 이런 잔혹한 곳에 보내다니!

명정은 그녀에게 공손해지기로 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그녀를 자극할 만한 사람들과는 최대한 접촉하지 않게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 멍해졌다. 마치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명정을 보며 억울한 눈물을 흘렸다. 명정은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했다. 품에 안긴 여인은 마치 당지를 먹은 아이처럼 웃다 울기를 반복하며 거만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봐, 너는 여전히 내게 굴복하잖아.’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에 명정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첫 입맞춤은 그녀의 주도 아래 이어졌다. 그날 그녀는 어딘가 이상했다. 나중에서야 명정은 그녀의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를 대신해 향 한 대를 태워 주었다.

가볍게 나삼羅衫(비단 상의)을 풀어헤치던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빙산설녀도氷山雪女圖(얼음산의 설녀를 그린 그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취할 만한 모습이었다. 연정을 느낄 때 얌전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명정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녀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명정은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까? 정말로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지금의 폐후는 조용할 뿐만 아니라 조곤조곤 말을 할 줄도, 시시비비를 분별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정상적인 폐후는 점점 더 핏기를 잃은 채 말라가고 있었다.

폐후가 죽은 그 해에도 나라는 평온했다.

영덕제 40년, 허약해진 그녀는 명정의 품에 누워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힘줄이 보일 정도로 앙상해진 작은 손은 명정을 꽉 잡고 있었다. 그의 눈에 이 손은 여전히 얼굴을 긁힐 때면 화난 얼굴을 가리던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십 년 후, 명정은 법도에 따라 노령으로 퇴직했다. 그는 장서열이 가장 좋아하던 옷을 들고 가 청산의 흰 구름 사이에 날려 보냈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이루고,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명정은 그녀의 옆에 묻혔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걱정을 안고 사는 삶보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특히 저승에서 그녀가 잘 지내는지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은덕이 아닐 수 없었다.

가벼운 바람이 나부끼는 저승을 걷던 명정은 큰 소리로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서 까닭 없이 한시름을 놓았다. 심지어는 약간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흥분한 긴 무리가 이따금씩 비명을 지르며 앞을 향해 걸었다.

명정의 차례가 되자 그를 살펴보던 소년이 갑자기 경악하며 번쩍 눈을 떴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그가 뭇 귀신들을 떨게 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태감이라고? 젠장, 제기랄! 어떻게 이런 일이!”

때아닌 고함에 가까운 곳에 있던 백귀들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정은 의연하게 서서, 자신을 마차에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소년을 어쩔 수 없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크게 놀란 소년은 옆에 있던 다른 소년에게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러자 그 소년의 안색 또한 변했다. 두 소년은 돌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명정을 밀실로 안내한 후, 부드럽게 차를 따라 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이 과정에서 명정은 자신이 지난 생에 태감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지난 열 번의 생을 통해 왕이 아니면 영웅으로 태어날 운명이었다. 두 소년은 이 사실에 적잖이 황공해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두 사람은 명정을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명정은 자신이 냉정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명정의 요구 사항은 단순했다.

장서열이 내내 걱정하던 가족들과 다시 한 번 즐거운 삶을 살게 되는 것. 그녀에게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앗아간 딸 상아와의 시간을 보충해 주는 것.

하지만 이 모든 건 그녀를 원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두 소년은 시원하게 승낙했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구태여 따지고 드는 사람만 없다면 명정의 요구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윤회가 시작되었다.

한시름 놓은 소년이 갑자기 물었다.

“그 악녀의 남편이 누구였지?”

그녀의 생은 이대로 끝나는 것이 현명했다. 명정은 착한 걸까, 미친 걸까. 그의 모든 복록福祿, 심지어는 자손 백 대가 누릴 영광을 몽땅 이 악녀의 환생과 맞바꾸다니.

게다가 ‘그 둘’이 평생 연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하, 정말 어리석군!”

다른 소년은 상관없다는 듯 문서를 뒤적이다 이를 옆으로 건넸다.

“네가 좀 찾아 봐.”

문서를 확인한 순간, 창백해진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불길하다, 불길해… 하지만 그 거만한 사람이 어찌 다시 이 여자에게 반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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