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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01)화 (301/449)

제301화

명정은 순간 멍해졌다.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처럼 그녀가 이 나라의 명실상부한 ‘제일미녀’인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리든 맞든 냉궁의 여인들은 대부분 이런 수단에 기대어 살아남았다. 그로서도 막을 이유가 없었다.

명정은 냉정하게 불씨가 없는지 점검하라고 지휘했다. 이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폐후에게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 이르며 얼른 돌아와서 당지를 더 주겠다고 절실하게 약속했다.

장서열은 이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진귀한 당지를 핥아 먹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한 달콤한 맛에 실처럼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 문 앞에는 뒷짐을 지고 선 명정과 기쁘게 당지를 즐기는 장서열만이 남았다. 일순간 명정은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걸 느꼈다. 명정이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장서열이 손에 든 당지를 빨아먹고 있었다. 희고 고운 얼굴을 든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옥패가 찰랑이듯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지 있어요? 더 맛있는 것으로요. 당신은 저들보다 지위가 높으니 분명 더 맛있는 게 있을 텐데 왜 내게 당지를 안 주는 거예요? 내가 안 예쁜가요?”

명정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이원의 여인들처럼 맑은 눈에 먹을 것에 굶주린 사람.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명정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아둔한 것이다.

폐위된 황후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명정의 옷자락이 또 한 차례 잡아당겨졌다. 그녀는 따뜻한 봄날 같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아이처럼 생동감 있는 여인이 냉궁에서 폭력적인 미친 여인들과 무려 이 년이나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과거에 누린 부귀영화를 짐작케 할 만큼 빼어난 외모였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저버릴 만큼 악랄한 성격이 그녀에게 이런 비참한 최후를 안겨 주었을 것이다.

“명정… 나 배부르게 먹고 싶은데…….”

흐트러졌던 명정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 마주쳤다. 맑고 순수한 눈 속에는 과거 거만하고 우쭐대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굳이 속셈을 숨길 생각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해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상황에 놓였는지 모르는 듯했다. 이런 우매함은 셋째 부인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명정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썹을 어루만졌다. 물처럼 평온한 시선에 냉담한 목소리였지만 결코 화는 내지 않았다.

“어리석은 척하는 거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밝게 빛나는 눈이 너무나 깨끗했기에 명정은 잠시 거둬들이려던 손을 멈춰야 했다.

그 순간 다시 자리로 돌아온 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들은 은밀한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던 명정 형님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손을 얹은 모습을 보자 다들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들은 즉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미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큰 형님을 자신들처럼 바꿔 놓기만 해 준다면 앞으로 그들은 더욱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년은 손에 넣은 미인을 포기하기 아쉬웠다. 하지만 큰 형님께서 손을 거둘 의사가 없어 보이자 이를 악물 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어디든 묵인된 규칙이 있다. 냉궁에서는 명정을 따라야 했다. 모두들 그가 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궁에서 여러 방면으로 나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설령 그를 갈아치우고 싶어도 현재 냉궁 태감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수년간 명정의 옆에서 지낸 대년과 이년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큰 형님이 여인에게 반하다니! 그건 나이 많은 여인에게는 특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장서열은 점차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비록 매끼 배불리 먹는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 한 끼는 꼭 먹을 수 있었다.

장서열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사라졌던 광채가 조금씩 되살아났고 볼은 통통하고 반질반질해져 안색까지 화사해졌다.

흑심을 품은 자는 적적해 하는 장서열에게 값비싼 강아지를 선물했다. 순백색의 강아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길고 하얀 털은 마치 털뭉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동물은 냉궁에서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았다.

냉궁 사람들은 귀여운 존재에 원한을 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장서열은 사람의 속마음을 그대로 읽는 듯한 강아지의 맑은 눈을 혐오했다. 그 눈은 마치 어리석고 더러운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적적한 장서열의 취미가 늘었다. 그건 바로 흰둥이를 괴롭히는 거였다. 그녀는 이전에 생각 없는 궁녀와 후궁들을 훈계할 때처럼 침대 휘장에서 뜯어낸 대나무를 들고 가만히 있는 강아지를 위협했다. 강아지가 감히 자신을 향해 짖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특히 장서열이 어렵게 모아 둔 음식을 흰둥이가 먹는 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장서열의 괴롭힘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그만큼 흰둥이는 빠르게 말라갔다. 점점 화사해지는 장서열에 비해 언제나 전전긍긍하게 된 강아지는 겁을 먹고 감히 그녀의 앞에 쉽게 나타나지 못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잠시라도 강아지가 보이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을 졸이며 유일한 친구를 찾기 위해 마당 전체를 뒤졌다. 찾으면 어김없이 강아지를 혼냈다.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장서열이 화를 내자 풀숲으로 들어간 흰둥이는 무슨 짓을 해도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서열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안 나온다 이거지?”

장서열의 눈에서 즉시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노기등등하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새로 얻은 화절자火折子(불을 붙이는 도구)를 든 채 가을이 되어 시들기 시작한 들풀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발칙한 것! 마지막 기회를 주마.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본궁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네 가족들까지 모조리 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장서열의 말투는 강경했다. 누구도 그녀가 빈말을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풀숲 여기저기를 헤친 자국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나와! 어서 나오라고!”

동시에 장서열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순식간에 처량한 눈빛을 한 그녀가 잡초가 무성한 후원을 바라보며 간청하듯 큰 소리로 유일한 친구를 불렀다.

“흰둥아, 흰둥아… 다시는 널 괴롭히지 않을게. 나오면 안 될까? 내가 고기 숨겨놓은 거 알지? 고기 먹게 해 줄 테니 어서 나와… 앞으로는 잘해 줄게!”

한동안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가을바람이 쓸고 지나간 풀숲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돌연 분노를 터뜨린 장서열이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죽어도 날 탓하지 마!”

장서열이 막 화절자를 던지려 할 때였다. 순간 굳은살이 박인 두툼한 손이 나타나 화절자의 불꽃을 끄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방에 들여보내려 했다.

장서열은 감히 자신의 말을 거역한 강아지를 죽이고 싶었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놔!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그동안 먹여 주고 재워 준 게 누군데 감히 주인을 피해 숨어? 감히? 본궁이 너를 못 찾는지 어디 두고 보자!”

명정은 한숨을 쉬었다. 험악하고 거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위가 다 상했다. 심사가 뒤틀려 있는 데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 만든 죄악이었다.

두려울 건 없었다. 폐후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당지糖漬 사건 이후 명정은 삼원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상관없었다. 그는 아첨을 늘어놓는 하인들의 말 속에서 드물게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분명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먹을 것과 강아지, 그리고 매달 한 번씩 배급되는 무명옷도 있었다.

명정은 비꼬는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전히 빼어난 외모였다. 다만 두 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역겨웠을 뿐.

적막한 풀숲에서 갑자기 쥐처럼 마른 무언가가 튀어나와 두 사람의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순간 장서열의 고요한 눈 속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반색하는 얼굴과 달리 손은 도망가는 흰둥이에게 화절자를 던지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거기 서지 못해? 흰둥……!”

지켜보던 명정이 결국 강아지를 쫓아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기쁨과 분노가 뒤얽힌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만해! 유일하게 곁에 남은 짐승이잖아! 기어코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장서열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명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명정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난…….”

일순간 위축되는 그녀를 보자 명정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눈빛은 마치 백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겁먹은 그녀를 보며 명정은 우선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이를 기꺼이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냉궁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죄를 지은 이들이었다. 어느 누가 동정할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명정 자신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위축된 눈빛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흰둥이가 놀아 주길 바라는 거야?”

경계하는 눈빛으로 명정을 바라보던 장서열이 돌연 자식을 감싸듯 완강한 눈빛을 내비쳤다.

“무슨 말이에요? 흰둥이는 내 거예요. 내 거라고요!”

명정은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눈앞의 여인은 백치가 분명했다.

“자기 것인 줄 알면서 저 모양이 될 때까지 학대를 해? 강아지가 사라지면 이제 이 마당에서 당신의 곁에 있어 줄 존재가 사라지는 거야.”

장서열은 이상하리만치 명정을 경계하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

명정은 돌연 고개를 떨어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여인에게 이치를 설명하다니.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명정은 할 말은 해야 했다.

“상관이 없지. 하지만 나는 적어도 세상만사를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건 알아. 흰둥이가 당신 옆에 있어 주길 원해? 그럼 괴롭혀서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흰둥이가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게 해야 하는 거야.”

“흥! 반드시 본궁을 두려워하게 만들 테니 어디 그때도 또 도망가는지 아닌지 보자고요!”

“물론 도망갈 수 없겠지. 결국 흰둥이는 죽을 테니까! 대체 강아지가 죽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거야? 저건 짐승이야. 짐승은 당신이 고귀한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고. 알아듣겠어?”

장서열은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 했어요. 누구든 말을 안 들으면 때리라고, 때리면 다시는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매로 길들여야 사람들을 이용하고 부릴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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