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명정이 왔다!”
바로 조용해진 여인들은 순식간에 양쪽으로 갈라져 작은 새처럼 아름답게 웃었다. 조금 전처럼 방자하게 굴거나 입을 놀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열에게 깔려 연이어 얻어맞은 둘째 부인조차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과자를 빼앗은 장서열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게걸스럽게 과자를 먹었다. 힘껏 입 안으로 밀어 넣는 손짓은 아무리 헛구역질이 나와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런 장면은 그리 신기하지 않았으나 주인공이 미인인 경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명정의 뒤를 따르던 대년과 이년 두 공공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은근한 탐욕이 섞인 눈길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스치고 지나갔다.
냉궁에 공급되는 물품이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냉궁은 자급자족이 가능했지만 이조차도 누군가 토지를 개간하고, 물을 주고, 수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정은 씨앗을 제공했고, 일손은 이렇게나 많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냉궁에 갇힌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당연히 농사도 지을 줄 몰랐다.
다행히도 배고픔은 그녀들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냉궁에서 오 년 이상 산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소량의 양식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수십 년 이상 산 사람들은 농촌 아낙네와 다를 바 없다는 게 기적이었다. 심지어 농사일에 능숙해진 이들에게는 소량이지만 여분의 식량도 있었다.
비록 그 여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몸과 행동이 불편하긴 했지만 누구도 음식을 빼앗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음식보다 기술이 더 요긴했기 때문이다.
둘째 부인이 살고 있는 큰 원院은, 냉궁에서 얼마 되지 않는 정상적인 여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셋째 부인이 휘어잡고 있는 장서열의 거처와는 천양지차였다.
명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폐후는 분명 삼원三院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원二院까지 왔단 말인가.
‘누가 감히 제멋대로 그녀를 옮긴 거지?’
둘째 부인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애써 조신한 척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차마 명정에게 다가가지 못한 그녀는 대년大年 공공의 몸에 기대어 흐리멍덩하니 미련 섞인 눈으로 명정의 환심을 사려 했다.
“명정, 이 여자가 개구멍에서 기어 나왔어요. 제법 반반하게 생겼기에 같이 놀아 주려 했던 것뿐이니, 제발 화내지 마시어요.”
과자를 다 먹은 장서열은 전전긍긍하며 건장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아직도 시퍼런 멍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린 틈을 타 담 모퉁이를 지나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둘째 부인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세요. 알아서 돌아가네요!”
명정은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번에는 주의하시오!”
장서열은 이후에도 몇 차례나 개구멍으로 드나들다 발견됐다. 삼원은 그야말로 사람을 잡는 곳이었다. 황량한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 이들은 죽일 듯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어느 날 개구멍이 막혔다. 장서열은 다시 놀라서 벌벌 떨며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큰 정원은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명정은 냉궁의 큰 원 여섯 개를 관리했다. 원들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삼원은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풀이 자라고 꾀꼬리도 나는 널따란 원에는 정신 나간 사람들 예닐곱 명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었고 시시때때로 자살을 꾀했다.
새로 온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건 이제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이곳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다른 곳으로 옮겨 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밤낮없이 생존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장서열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자고 싶고, 먹고 싶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우물은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셋째 부인의 뜰 안에 있어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누군가 풀숲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익사시킬 수도 있었다.
실성한 사람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한 장서열은 더 이상 감히 문을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쉽사리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잠이 들면 누군가 창문 밖에서 뛰어들어 그녀를 지옥으로 끌고 갈 것 같아 무서웠다.
일 년 후,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장서열은 정신이 다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다. 넋이 나간 그녀는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과 제법 그럴싸한 상상에 시달렸다.
장서열은 빠르게 미모를 잃고 시들어 갔다. 하지만 태생부터 그녀보다 못한 사람들 속에 섞여있던 탓에 여전히 돋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물을 뜨러 나가야 하는 날, 장서열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더 이상 물과 음식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대로 말라 죽을 것 같았다.
그날따라 우물로 가는 길은 유난히 조용했다. 갑자기 뛰쳐나오는 적수가 없자 장서열은 오늘은 운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흥분한 장서열은 표주박을 들고 셋째 부인의 뜰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흥분됐다. 이미 맷집이 생겼기에 더는 다른 여인들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맞아서 다치면 죽을 위험은 여전했다. 심지어 그녀와 싸우다 져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곳이 더 삭막해진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장서열은 살금살금 문을 밀고 들어갔다. 몸에 걸친 옷은 흙보다도 더 흙처럼 보였다. 슬그머니 우물 쪽으로 다가간 그녀가 조심스럽게 표주박 안에 물을 담고 떠나려던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간헐적인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든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멍해졌던 장서열이 천천히 창 쪽으로 다가갔다.
셋째 부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위에서 대년 공공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셋째 부인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대년 공공은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 주었다.
셋째 부인의 신음은 점점 커졌다. 대년의 흐리멍덩한 눈과 손이 무슨 짓을 하든, 셋째 부인의 눈에는 그저 대년의 손에 들린 음식뿐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 장서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방에 돌아온 장서열은 낡은 침대에 앉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대년 공공의 손에 들린 음식과 셋째 부인이 쉽게 음식을 얻는 방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쩐지 셋째 부인은 통통하니 마른 적이 없었고, 다른 여인들에게 자기 것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수척하게 늙어버린 얼굴을 매만졌다. 셋째 부인보다 어린 자신이 어찌 그녀보다 더 늙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마땅히 밥과 고기를 먹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장서열의 눈빛이 기이해졌다. 이곳의 미치광이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장서열이 명정을 만난 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대년에게 달려갔지만, 하필 이번 달 점검은 명정이었다.
장서열은 다른 사람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그녀는 자신이 셋째 부인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옷을 빨아서 입을 줄도 알았고, 정원 안의 작은 꽃을 꺾어 머리를 장식할 줄도 알았다.
비록 이전처럼 고상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꾸미기만 하면 여전히 잘 익은 과일처럼 아름답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폐후의 뜰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명정은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여인 하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가볍게 비켜선 명정에 의해 장서열은 바닥으로 넘어졌다.
명정 뒤에 선 소태감들이 간사하게 웃었다. 희롱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늙은이, 명정 형님은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냉궁 밖 진짜 주인들의 시녀들이 이런 짓을 해도 우리 명정 형님은 다 거절하셨어요. 하물며 당신처럼 늙어 빠진 여인을… 형님들이 아무리 놀아주고 싶어도 당신…은…….”
말을 하던 말단 태감은 고개를 들어 올린 깨끗한 얼굴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혀가 꼬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애타는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되게 아름답다!’
장서열을 본 명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명정은 태감들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들이 벌이는 지저분한 행동들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폐후의 얼굴이라면 이들에게 잡아 먹혀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급히 모든 사람을 헤치고 나간 이년二年이 폐후를 부축했다. 그는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듯 넓은 그녀의 소매 안으로 재빨리 손을 넣고는 더듬거렸다. 과연 부드럽고 신선한 느낌이 남달랐다. 얼굴이든 피부든, 모두가 흠모할 만했다.
이년의 얼굴에 도취된 표정이 드러났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히 이년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이년은 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실컷 괴롭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듯한 예쁜 눈이 욕망에 물들면 얼마나 더 매혹적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이년은 절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 없었다. 다만 눈앞의 미인이 눈을 반짝이자 둘째 부인을 주려고 숨겨 두었던 당지糖漬(설탕 절임)를 꺼내어 건넬 뿐이었다.
“드시게.”
먹을 것을 본 장서열은 바로 웃었다.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깨끗하고 순결한 웃음에 이년은 가슴이 떨렸다.
순간 멍해진 이년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명정의 부하였고, 냉궁의 삼인자였다. 이제껏 셀 수 없는 여인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자칭 미인도, 다른 사람들이 미녀라고 떠받들던 이들도 적지 않게 경험해 보았지만 이렇게 그를 무장 해제시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여인이야말로 진정한 미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옥 같은 피부가 아닌가.
‘여기 사는 총비가 누구였더라?’
이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후궁이 그렇게 수차례나 바뀌었는데 누가 그들을 다 기억하겠는가.
신경 쓸 것 없다! 이년은 미인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 대년이 없으니 이 미인은 그의 차지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년은 다른 사람의 눈을 찔러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혼자만 누리고 싶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외모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니,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렇게……!
이년은 바보같이 웃었다. 멍청한 눈빛은 연정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