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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8)화 (298/449)

제298화

“이제 그만 상소문을 보셔야겠군요.”

그녀의 말에도 구염락은 마치 다리가 땅에 붙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을 거둔 그가 팔짱을 끼고 장서열을 보며 말했다.

“안 가. 나는 지금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장서열도 즉각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죠? 조금 전 단칼에 아내의 청을 거절한 건 당신이에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분이라 아래는 바라보지 못하시는군요!”

구염락이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냉정해 보이는 가늘고 긴 눈가에 알아차리기 힘든 웃음기가 드러났다.

“화난 거야?”

“감히요.”

간단히 대답한 장서열이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짐이 묻겠어. 혹시 조금 전 대화에서 질투라도 난 거야?”

장서열이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그는 용과 금색 꽃이 그려진 검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묶인 긴 머리와 금테로 장식된 허리띠, 머리에 씌워진 옥관은 마치 도도한 공작처럼 눈부신 꼬리를 활짝 펼친 채 온몸으로 색기와 패기를 발산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노골적으로 우쭐거린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의 잘난 척은 요 며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마치 기회를 줄 테니 환심을 사 보라는 듯한 얼굴이기도, 성은에 감격해 눈물이라도 흘려 보라는 얼굴이기도 했다.

“질투 좀 하면 어때서요? 당신이 본궁의 화를 풀어줄 수도 있잖아요!”

장서열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약간의 불쾌함을 드러냈다. 즉시 의기양양해진 구염락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그는 이렇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온몸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구염락이 막 입을 열려 하자 장서열이 다급히 가로막았다.

“됐어요! 달래 주지 말아요. 당신한테는 어차피 너무 쉬운 일이잖아요. 페하, 어서 가서 일이나 하시지요. 우리 모자가 산 입에 거미줄을 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 저는 황아를 보러 가겠습니다!”

구염락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있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는 모습은 일부러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우아하고 멋스러웠다.

‘만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상관없지. 어쨌든 서열이는 역지사지로 생각해 볼 마음은 없는 거군. 나는 서풍엽을 참고 견뎠어.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전장에서 죽였을 거고!’

오만하게 몸을 돌린 구염락은 상소문을 향해 걸어갔다. 황권은 그가 얻은 모든 것의 디딤돌이었지만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러한 소모전을 장서열과 아들보다 중요히 여기는 건 명백히 득보다 실이었다.

냉정한 표정으로 탁자 앞에 앉은 구염락이 상소문 뭉치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것들이 옹졸한 마음을 품는다면…….’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궁 안의 시위들에게 잘해 준 것을 탓하지 말라.

* * *

다음날, 장서열은 모든 하인들을 물리고 오랫동안 만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정은 멍하니 장서열을 바라보며 입가에 약간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저와 안 어울리죠. 성사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 게 아니야.”

장서열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 알아듣게 얘기를 했는데 고작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하다니. 권서함이 너를 거절한 게 아니라 폐하께서 물리셨어.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조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너도, 본궁도 모르고.”

“…….”

“과거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 돼. 너도 이제 어리지 않으니 스스로 잘 판단을 해야지. 시끄러운 조정에서 멀리 떠나 부귀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이 사는 건 큰 복이야. 봄에 꽃구경을 하고 가을에 달을 보는 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만정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그녀는 감히 더 이상 원망하지 못했다.

“저… 저는… 폐하와 황후마마께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

만정은 모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새해가 지난 후로 시름시름 앓던 만 귀인은 초봄의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 *

황제가 맞이한 첫 번째 수녀들은 그렇게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 사람은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두문불출하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총애를 받은 여인은 오로지 장서열뿐이었다. 궁에서는 그녀만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결국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모두들 탄식을 내뱉기도, 자신들이 맺은 연줄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권씨 가문과 같은 최고 귀족 가문이 무너지며 황후는 장씨 가문의 차지가 되었고, 덕분에 외척 장서전의 위상도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올라갔다.

한편, 갑자기 텅 빈 경옥전으로 인해 궁인들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소문에 의하면 경옥전은 어찌 된 일인지 편전 또한 아름다움이 넘쳐나고, 일 년 내내 봄 같은 풍경이 다른 궁을 한참 뛰어넘는다고도 했다.

소녀들의 마음은 단순했다. 이들은 최고의 미인을 감추어 두었던 궁이 소문처럼 그토록 아름다운지 궁금했다. 깊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의 사랑이 감도는 곳.

장서열은 만정의 혼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혼례 당일, 구염락은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손봐 줘야 할 교활한 무리들로 인해 황후와 동행할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혼자 나가는 것을 절대 윤허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만에 하나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을 마주치게 될 가능성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마주쳐서는 안 될 자가 흑심을 품고 있을 가능성 때문에, 마지막으로는 누군가 막무가내로 황후를 납치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두말없이 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왔다. 화가 나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녀는 길을 가로막은 의자를 발로 차서 엎어버렸다.

“황후마마, 고정하십시오!”

조로전은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하인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전부 순종하는 표정으로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조로전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그녀는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왕 마마가 몸을 일으켜 황후를 달래며 말했다.

“황후마마, 오늘은 날씨가 참으로 좋습니다. 바람은 포근하고 햇볕은 따스하지요. 태의가 태자 전하의 몸이 회복되었다고 하니, 나가서 적당히 햇빛을 쬐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태자 전하와 함께 기분 전환을 좀 하시지요.”

순간 왕 마마를 노려보던 화 마마는 왕 마마의 옷자락에 달린 암홍색 품계에 이내 놀란 듯 시선을 거두었다.

왕 마마는 못 본 척했다. 비록 화 마마가 일등으로 지위가 올라가긴 했으나 그녀처럼 행동하는 건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보름 전, 태자가 적당히 외출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찬바람을 맞고 뒷감당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 황후에게 외출하고픈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황후의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한데 어린 황자 외에 과연 누가 이 화를 가라앉힐 수 있단 말인가.

* * *

명정은 넓은 소매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검푸른 태감복을 입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어화원 구석구석을 헤쳐 나가며 그가 뒤를 따르는 어린 태감에게 분부했다.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된다.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야 할 것이야. 뱀이나 쥐, 벌레, 하다못해 개미 한 마리라도 황후마마와 태자 전하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네, 명 공공.”

장서열은 쉽게 화를 냈지만 또 쉽게 이를 가라앉혔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는 그녀가 원했던 이런 관심조차 없지 않았던가. 지금 구염락은 자신에게 예상치 못한 변고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장서열은 이런 지극한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 또한 그러했다. 구염락을 사랑했을 당시, 그녀 또한 그를 아예 곁에 묶어 두고 싶어 했었다. 만약 오늘 일이 그때 벌어졌다면 분명 지금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장서열은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태자와 함께 만발한 화초들 사이를 느긋이 걸었다. 태자에게 화초의 종류와 색깔을 알려 주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름다운 노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왕 마마는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힌 어린 황후의 뒷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밖에 없었다. 설령 천 번을 본다 해도 그때마다 탄복할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확실히 그녀는 보통의 황후와는 달랐다. 아무리 현명하고 이해심이 많은 여인도 같은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대부분 앙금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황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껏 맺힌 것이 없는 사람처럼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두었다.

후궁에게 가차 없이 구는 옹졸한 황제를 이렇게 시원시원한 마음으로 대하니, 부부가 함께 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황후가 줄곧 자신의 체면을 강조했다면 결국 황제가 타협하긴 했겠지만, 이렇게 마음 편히 지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왕 마마는 미심쩍었다.

‘황후마마는 진정 화가 나지 않으신 건가? 너무 개의치 않으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폐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걸까…….’

어린 구염황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신기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작은 팔로 어마마마를 꼭 감싼 채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장서열은 인내심을 갖고 아들에게 처소 외에 다른 곳도 존재한다는 것을 천천히 알려 주었다. 이것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치러야 할 관문이었다. 폴짝폴짝 뛰는 황아를 생각하면 잠시 답답한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잠시 후, 천성적으로 타고난 아이의 모험 정신이 살아났다. 어마마마를 따라 활짝 핀 꽃송이를 어루만지던 아이는 신이 난 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염락에 의해 분노했던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록 전생에서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발밑에 놓고 밟았지만 지금 그녀는 한발 앞서 사랑한 그의 마음을 짓밟는 데 별로 흥미가 없었다.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 하하!”

무성한 초목 사이로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완정에게 아이를 지켜보라는 눈짓을 보낸 그녀가 멈춰 서서 뻐근한 팔을 주물렀다. 습관적으로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던 그녀는 순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멀지 않은 궁문 밖, 내원으로 통하는 통로에 누군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를 본 장서열의 몸은 굳어 버렸다.

감색 고위 금포錦袍를 입고, 허리에 대태감를 상징하는 채주彩綢(빛깔 있는 비단)를 두른 채 긴 머리를 위로 올린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한 얼굴이었다.

장서열은 순간적으로 아연실색했다가 의아해졌다. 평온했던 마음에 거친 파도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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