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만정은 슬픔과 감사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왕 마마에 대한 원망을 지운 채 살짝 허리를 구부리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마마의 은혜가 커서 내가 갚을 길이 없군요. 일 년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왕 마마는 감히 거만하게 굴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답례를 했다.
“노비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노비는 그저 황후마마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줄곧 만 귀인마마가 평안하기만을 바라셨습니다. 노비에게는 공이 없습니다.”
씁쓸하게 웃는 만정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열 언니는 자신에게 밝은 등불이 되어 주었다. 돌이켜 보면 서열 언니의 충고는 언제나 옳았다.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정은 여전히 단념하지 못했다. 끝내 떠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지금껏 장서열에게 어머니의 당부를 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정은 오늘 장서열에게 모든 걸 말할 생각이었다. 궁을 나가겠다고, 그동안 아이처럼 제멋대로 구는 자신을 너그러이 봐 주어 감사하다고.
왕 마마는 조용히 한숨을 돌렸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게지. 새로운 후궁들을 보고 불안이 커지니 도망가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이고.’
* * *
화 마마는 황후에게 새로 입궁한 후궁들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가끔 한두 마디 질문을 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진 공공이 사람을 보내 뭐라 하더냐.”
화 마마가 대답했다.
“네, 황후마마. 그가 말하길, 폐하께서 후궁의 일은 모두 마마의 뜻대로 처리하라 전하셨다고 합니다.”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완정의 방문 소식을 들었다.
“마마, 만 귀인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미소를 지은 장서열이 화 마마에게 번거로운 보고를 물리라 일렀다. 이어 어수룩한 소녀티를 벗고 한층 더 어여뻐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들어온 만정은 새 후궁들이 너무 시끄러워 짜증이 난다고 투덜거렸다. 장서열이 웃는 얼굴로 간식거리를 내오라 일렀다.
“그리 귀찮으면 너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게 하자.”
“그럴 필요 없어요. 저도 더 이상 여기 머물지 않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만정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허튼소리가 아님을 눈치챈 장서열이 짐짓 만정을 놀리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몇 가지를 묻던 장서열은 곧 하인들을 물리고 만정에게 따로 생각해 둔 사내가 있는지를 물었다. 없다면 자신이 만정의 부모를 대신해 결정해 줄 수 있었다.
만정은 계속해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어… 어머니께서는 권 공자가 아직 혼인 전이라고…….”
차를 마시던 장서열이 놀란 얼굴로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확실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왠지 적절한 질문이 아닌 것 같아 급히 말을 삼켰다.
‘권서함이라면…….’
깔끔했던 장서열의 미간에 겹겹의 주름이 생겼다. 만 부인의 야심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지난 번 청산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기꺼이 승낙할 수만은 없었다. 권서함은…….
“본궁이 알아보도록 하마.”
만정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정말! 정말로?’
“우선 알아보겠다는 거야.”
장서열은 쉽게 승낙했다가 혹시라도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만 부인의 원망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순간 예의 없이 행동했다는 걸 알아차린 만정이 부끄러운 듯 서둘러 작별 인사를 남긴 후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장서열은 공연한 무력감에 쓴웃음을 흘렸다.
‘만씨 가문에서 감히 먼저 입을 열다니.’
하지만 황실에서 만씨 가문에 빚을 진 건 사실이므로 장서열은 만 부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게다가 권서함의 인품을 생각했을 때, 그쪽에서 만정과의 혼사에 응한다면 만정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폐하께서 돌아오면 얘기해 봐야지.’
* * *
입궁 첫날, 소청청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녀보다 하루 일찍 궁에 들어온 서풍화를 찾아갔다. 우아하게 장식된 방에 들어간 그녀는 청록색 치마를 흔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풍화 언니, 너무 심심해요. 저수궁에 있을 때보다 더 무료한 것 같아요.”
그 무렵 서풍화는 함께 입궁한 자매들 중 아직도 황제의 시침을 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입궁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마지막 수녀들까지 입궁했지만 언제 부름을 받을지, 또 어떤 규율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 * *
그날 저녁, 장서열은 구염락을 배불리 먹인 뒤 마치 시시콜콜한 일상을 늘어놓듯 만씨 가문의 요구사항을 알렸다.
장서열이 머리에 장식된 비녀를 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 부인에게 자식이라고는 만정 하나뿐인데 딸이 좋은 집에 시집가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권 한림은 심지가 곧고 충성스러우니, 만약 혼사가 성사된다면 만정에게 잘해 줄 거예요. 신첩은 한 번 권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염락은 내의 차림으로 내실의 탑에 기대어 있었다. 순간 느긋하던 표정을 지운 입가에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묻어났다.
“만씨 가문도 참 대단하군. 재혼하는 딸에게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남편을 얻어 주려 하다니. 차라리 딸에게 죽음으로 뜻을 지키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나?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텐데.”
“폐하!”
비웃는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잔인함이 어려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만정은 짐이 확실히 혼인시킬 거야. 그런 탐욕스런 자들은 당신이 마음 써 줄 가치조차 없어.”
‘만씨 가문이 제법 머리를 쓰는군. 권씨 가문과 손을 잡아야 내가 뿌리 깊은 귀족 분들께 손을 대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야 문제가 생겨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꿈도 크군!’
장서열은 거울을 통해 탑塌 위에 앉은 자신만만한 황제를 한 번 노려본 뒤 뾰로통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냥 귀찮은 거죠? 이건 만씨 가문의 명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혼사 이야기일 뿐이에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관여하지 마.”
결심한 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성격인 구염락은 특히 국사에 관해서는 다른 이의 질문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의 지위 세습을 타파하는 건 정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한 황제의 마지만 관문이었다.
만씨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씨 가문이 어느 가문을 끌어들여도 마찬가지라면 구태여 황제가 만정의 재가를 허락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권서함이 바보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장서열이 만정을 친동생처럼 여긴다고 생각한 그가 예상 외로 만씨 가문을 백방으로 보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확고한 시선에서 사안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구염락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여인이 모를 거라 생각하는 사안은 더더욱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허면 폐하께서는 만정의 짝으로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장서열의 말투는 덤덤했다. 구염락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장서열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가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영광을 얻으면 모두가 영광을 얻고, 한 사람이 망하면 모두가 망하는 법. 장서열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구염락이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시골의 촌부, 혹은 지방의 세도가. 최악의 경우 가난한 집안의 학자까지. 만정도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니 셋 중 하나를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고개를 숙인 장서열이 손에 든 봉잠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차라리 당신을 원망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사약을 내리는 편이 낫겠군요.”
사실 구염락은 그 즉시 ‘그럼 한 번 고생으로 영원히 편해지겠군.’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아내의 안색을 살핀 후에는 황급히 손에 든 책을 옆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구염락이 눈치를 보며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서열아, 그런 뜻이 아니야. 만정이 두 번 혼인을 하는 건 사실이잖아. 그런데 권씨 가문에 시집을 간다고 해서 마냥 좋기만 하겠어? 지금까지 만정을 위해 노력해 왔잖아. 나는 만정이 부유한 남자와 혼인해서 평안한 일생을 보내도록 해 주려는 거야.”
“…….”
“우리가 아무리 잘 덮어 준다고 해도, 만정이 권 부인이 되면 언젠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해. 그때가 되면 사람들의 눈총을 피할 수 없겠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미소를 지은 구염락이 힘이 센 손가락으로 장서열의 매끄러운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자기도도 모르게 섬세하고 부드러운 쇄골 쪽으로 손이 미끄러지자 일순간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장서열은 조용히 생각하다 멋대로 움직이는 구염락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거울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구염락에게 말했다.
“말씀은 제대로 하셔야죠. 어떻게 당신이 그런 말을 해요? 지금 만정이 재가해야 하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만정이 이런 결말을 원했겠어요?”
아래를 향해 움직이려던 구염락의 손가락은 손목을 잡은 힘이 더 강해지자 결국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구염황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지 못할 때보다 더 억울해했다.
구염락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만정의 자업자득이지. 품성이 바르지 못해 입궁 전부터 남자를 짝사랑한 데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시집까지 왔잖아. 당연한 결과야.”
장서열은 순간 놀란 표정으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만정에 대해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 왔던 거예요?”
구염락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틀린 말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한 말을 참았다는 태도였다.
당연하다는 반응을 넘어 매우 인내한 것이라는 얼굴을 보자 장서열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당신은 제왕이고 만정은 무려 삼훈三勛의 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정으로 당신을 사모한 게 대체 무슨 잘못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만정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녀로 선발되어 정식으로 궁에 들어왔어요.”
장서열의 말에도 구염락은 여전히 개의치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지? 그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물론 마음이 없다면 지금껏 궁에 남아 있지 않았겠지. 하지만 남기로 했다면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마땅히 견뎌야 하는 거 아닌가? 제왕이 원한다면 신하는 죽어야 해.’
장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여인을 사모한다는 이유로 타협하는 사람도, 더욱이 미색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언젠가 후궁을 총애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그 여인이 예뻐서, 혹은 그녀에게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가 즐겁기 때문이리라.
구염락은 줄곧 흔들림 없이 순수하고도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구염락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