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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6)화 (296/449)
  • 제296화

    최선을 다해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준 구염락은 더는 아들을 안아 주지 않고 혼자 놀게 내버려 두었다.

    “황후는?”

    유모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린 황자를 지켜보며 대답했다.

    “예, 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머리를 말리고 계십니다.”

    눈으로 어린 황자를 쫓고 있던 유모는 아이가 살짝 미끄러질 것 같은 순간이 오자 바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구염락은 장포長袍로 단단한 근육을 감싸고는 자리를 떠났다.

    유모는 자기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제야 어린 태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유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며 말했다.

    “태자 전하, 전하께서는 벌써 일 년 하고도 한 달만큼 나이를 먹으셨습니다. 앞으로는 황제 폐하를 귀찮게 해서는 안 돼요. 아시겠지요?”

    귀찮게 하려면 차라리 황후마마를 귀찮게 하는 편이 나았다.

    * * *

    구염락의 걸음에 맞춰 장포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늘어뜨려진 채였다.

    장서열은 어렴풋이 흔들리는 그의 자태가 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염락의 얼굴이 가까이 오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구염락은 전체적으로 아주 좋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몸과 어우러졌을 때는 지나치게 위엄이 짙어졌다. 특히 옷섶을 반쯤 열어 놓을 때면 마치 사자가 누워 있는 모습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종려털 융단을 밟으며 걸어왔다. 맞은편 연탑에 반쯤 기댄 그가 긴 머리를 늘어뜨리자 혜령이 즉시 다가와 머리를 닦아 주었다.

    비스듬히 몸을 기댄 구염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 탑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띤 홍조를 지운 그녀는 마치 아직 출가하지 않은 소녀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푸른 바다에 연꽃이 피었다면 저런 모습일까. 그녀는 마치 지지 않는 노을처럼 조금 전 진정되었던 구염락의 흥분을 다시 일렁이게 했다. 구염락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묵묵히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파고드는 열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보름에 한 번, 그녀는 딱 그만큼만 허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열여덟 살이 되어 그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순간이 오면, 그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순간 위험을 감지한 구염락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담담했던 수컷의 기운이 온몸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는 눈앞의 황후를 다시 한번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엄숙한 얼굴을 본 장서열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구염락은 최근 들어 온화한 표정을 짓지 못 했다. 이는 그가 긴장을 풀지 못 한다기보다 점점 조정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황제가 된다는 건 그가 단순히 여인들의 남자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상했다. 때때로 구염락이 짓는 표정은 장서열의 기억 속, 사람을 두렵게 하던 그 냉담한 표정과는 또 달랐다. 이는 그녀의 몸에 얼굴을 비비며 서열 누님을 외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원래 이래야 했다는 듯 정중하면서도 결단력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독서 중인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옆에 놓인 수건을 슬쩍 던진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내일 입궁하는 건가?”

    “왜요, 못 기다리시겠나요? 후궁이야 폐하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 언제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지요!”

    가볍게 수건을 치운 장서열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주 있던 일인 듯 손끝 하나까지 매우 자연스러웠다.

    왼손을 머리 뒤에 받친 구염락이 느긋한 얼굴로 가볍게 늘어진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에선 침대 휘장을 타고 내리는 자사紫紗(자줏빛 얇은 비단)처럼 차르르 윤기가 흘렀다.

    “입궁해서 네 마음에 들면 남겨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냉궁에 가둬. 그것도 싫으면 혜령에게 넘기든지. 나쁘지 않으면 일 년 뒤에 품계 정도는 올려 줘도 괜찮겠군.”

    그 말에 장서열은 비로소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는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자신의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을 태세인 그는 확실히 상냥하거나 친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근엄하든 어리석은 척을 하든 분명 그에게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곧 입궁할 여인들을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장서열이 화를 내며 말했다.

    “명심하시지요. 설령 폐하께서 누구와 헤어지기 아쉽더라도 절대로 이를 본궁이 알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보호하기도 전 본궁이 먼저 호수에 던져 죽여 버릴 테니까요. 폐하는 저와 아이만 생각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감히 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면 본궁이 무슨 짓을 할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

    “됐습니다! 오늘은 그냥 조석궁에 가서 주무시지요. 더는 폐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구염락은 못 들은 척 눈에 거슬리는 머리카락을 뽑으며 따스한 온기를 만끽했다. 바깥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방 안에 가득한 과일 향은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황아에게 신경을 좀 써야겠어. 이렇게 컸는데 아직도 눈치를 살필 줄 모르다니.”

    장서열이 착하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똑 닮아 그런 걸 뭘 더 어떻게 신경을 쓰라는 거예요?”

    “그래? 헌데 짐은 어째서 당신을 닮은 것 같지? 안색을 살필 줄도 모르고, 바보짓까지 서슴지 않고.”

    “구염락!”

    “부인께서는 무슨 일로 남편을 부르시는지요?”

    구염락이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 순간 귀엽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그는 그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대지에 봄빛이 어렸다.

    기지개를 켜듯 땅 위로 솟아나는 풀과 함께 황궁은 새로운 풍경을 맞이했다. 미인들은 이슬처럼 신선한 공기를 몰고 오며 궁전 안을 가득 채웠다.

    마른 우물에는 물결이 일지 않는 법이었으나, 비로소 외롭고 쓸쓸한 내명부에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따뜻한 봄기운이 구석구석 전해졌다. 이제 며칠 후면 방치되었던 전각들도 다시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경옥전 안, 관목 옆에 선 만정은 매화가 그려진 담장에서 처소 바깥을 지나는 무리를 보고 있었다. 마치 만정이 막 입궁했을 때처럼 쉽게 놀라고 호기심이 충만한 그들은 숲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처럼 생기발랄했다. 소녀 특유의 천진한 모습을 보자 만정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귀인마마, 황자 전하를 보러 가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간이 늦었습니다.”

    왕 마마는 서둘러 만정의 등을 떠밀었다. 만약 만정이 오늘 황후에게 뜻한 바를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래서 만정이 경옥전을 떠난다면 드디어 이곳의 문은 닫히게 된다.

    만정은 다시 한번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쓸쓸한 눈빛을 거두었다. 그녀는 왕 마마를 따라 다른 문을 통해 처소를 나갔다.

    왕 마마는 줄곧 침착했다. 그녀는 만정의 뒤를 따르며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말이라 해도 궁녀 넷을 앞세우며 침묵을 지켰다. 묵묵히 뒤를 따르는 그녀는 마치 공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만정은 대화가 필요했다. 그녀는 네 명의 궁녀에게 두 걸음 물러서라 명한 뒤 왕 마마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왕 마마가 말없이 만 귀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주인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안타깝게도 만정은 왕 마마가 아첨을 하면서까지 능력을 발휘할 만한 주인이 아니었다. 만정은 왕 마마의 속마음은 알지 못한 채, 그저 왕 마마가 천성적으로 엄숙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느 날 만정은 의흔依痕에게 물어 보았다. 대체 선황제의 귀비는 어떻게 왕 마마의 성격을 견딘 거냐고. 이날로 의흔은 주인에 대한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 의흔은 주인의 머리로는 황제의 총애를 다툴 기회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설령 총애를 다툰다 해도 가장 먼저 머리가 날아가리라는 걸 알았다.

    만정은 슬픈 얼굴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비록 만정은 그녀를 싫어했지만 중요한 순간이면 마치 어머니가 옆에 있는 듯한 안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 새로 들어온 후궁들은 나보다 나을까?”

    왕 마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아직도 그녀가 포기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귀인께서는 복이 많으시고, 가장 운이 좋은 분이시지요.”

    아마도 향후 삼십 년 이내에 누구도 뛰어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운이었다.

    만정은 씁쓸한 듯 웃었다.

    “그런가…….”

    명백한 사실 아닌가. 같이 입궁했던 권비와 비교하면 만 귀인은 하늘, 권비는 땅이었다.

    하인으로서 굳이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귀인을 따르는 게 마땅했으나 조금 더 눈치 있게 굴고자 해도 황후는 언제나 사람을 보내 귀인을 제지했다. 황제가 만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만정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만정이 쓸쓸한 눈빛으로 물었다.

    “새 후궁들은 총애를 받을 수 있을까?”

    총애는커녕 죽지 않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황후는 한창 꽃다운 나이로 노련하게 황제의 애를 태웠다. 그녀는 불평, 애교, 질투, 분노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여인이라면 무엇이든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황제에게 각인시켜 줄 만큼 언제든 소란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향후 삼십 년 이내에는 누구도 황후를 뛰어넘기 힘들다는 게 왕 마마의 결론이었다. 그때가 되면 호색가가 아닌 이상 황제도 기력이 쇠할 것이고, 설령 아니라고 해도 삼십 년간 입지를 다진 황후는 나이 어린 총비가 아이를 낳도록 두고 볼 리 만무했다.

    게다가 황제와 황후가 쌓은 수십 년의 세월을 과연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황후의 깃발을 따르면 최소한 절반의 승리는 거둘 수 있다. 나머지 절반은 그 당사자가 시대의 흐름을 아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귀인께서는 어찌 그것이 궁금하십니까?”

    만정을 바라보는 왕 마마의 눈빛은 부드럽고 자애로웠다. 만정은 잠시 격려를 받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총애를 받는다면… 자연스레 황후마마처럼 될 테니까.”

    왕 마마는 한 번 더 받아 주었다.

    “귀인께서는 새 후궁들이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당연히 불가능하지! 서열 언니는 독보적이야. 언니가 초혜전 시절부터 얼마나 특별했는데…….”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만정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리석고,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래, 서열 언니는 독보적이었지. 항상 서열 언니만 좇고 있던 폐하의 눈을 왜 외면하려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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