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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5)화 (295/449)
  • 제295화

    오휘미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외지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던 그녀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느라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눈치가 빨랐고, 그만큼 사람과 세상 이치에도 밝았다.

    수녀 선발 역시 오휘미가 스스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처지로는 아버지가 벼락출세를 하지 않는 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재주가 천하를 쥔 황제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보다 단순하고 근심 없는 생활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춰둔 야망이 있는 법이다.

    과거 초혜전에서의 열셋째를 기억하는 소녀들은 하나같이 장서열이 아닌, 구염락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가냘프고 초라했던 열셋째를 생각하면 경외심은커녕 연민과 오만한 감정이 앞섰다.

    심지어 이들은 황후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곁에 있었던 것이, 고난을 함께한 것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이들은 초라했던 황제뿐만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이 무정하고 제멋대로인 장서열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황제가 총애하다니. 국사로 바쁜 황제라면 마땅히 피곤을 풀어줄 활발하고 생기 있는 얼굴이 필요할 것이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압박감을 해소해 줄 그런 참한 여인이.

    씨 가문과 후부侯府, 삼부三部의 생각이 바로 이러했다. 그들에게 구염락은 단순히 대운을 만난 황제일 뿐, 귀한 신분의 여인을 접해 본 적이 없는 무지한 자였다. 그런 황제가 여인에 눈을 뜨면 자신들의 딸을 욕심내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권씨 가문과의 일은 단지 특수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각 가문의 여식들 또한 자신과 권여아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악독한 마음을 품지도 않았다. 비록 과거 황제를 하찮게 여긴 적이 있긴 했지만 다 한때였을 뿐, 앞으로 황제를 잘 모신다면 자신들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숲이 크면 온갖 새들이 날아드는 법. 궁중에 여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여인들 중에는 황제를 무서워하거나 그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들 외에도 그의 됨됨이를 싫어하는 여인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배우며 자란 송 각로宋閣老의 여식은 구염락을 아주 싫어했다. 구염락은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각종 세금을 늘린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름 돋는 점은 그가 아주 배은망덕할 뿐더러 예교禮敎(예법과 도덕)조차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국의 제왕이 어떻게 태후를 냉궁에 가두는 짓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인가. 황후 역시 생각이 짧은 건 똑같았다. 황제가 사리분별을 못한다면 황후라도 얼른 나서서 충언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는 황후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송 각로의 여식은 태후가 지금의 황제를 등극시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었다. 태후는 출신과 관계없이 황제를 아들로 삼아 적자의 신분을 주었다. 그야말로 크나큰 은혜였다.

    그러나 등극 후 황제는 은인을 냉궁에 가두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천하의 치욕이었다.

    송 각로의 여식은 자신이 물건처럼 평가를 받고 간택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또한 그녀는 화가 났다. 간택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보통의 여인들처럼 부군에게 무조건 복종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수치스럽게 그에게 몸을 맡길 생각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문난적도 되고 싶지 않았다.

    * * *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경칩驚蟄이 찾아왔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촛불이 일렁이는 궁전 안, 저녁 바람에 날린 비단 휘장이 가볍게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늘어진 술들은 마치 춤을 추듯 가느다란 소녀의 허리를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올해로 열여덟이 된 장서열은 새해의 밝은 달처럼 자신의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를 생각할 때면 구염락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는 흥분이었다.

    그는 장서열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의심한 적이 없는 사실이었다. 우둔한 자들이 그녀를 얻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울 때에도 그녀는 눈 덮인 높은 산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빛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들어 장서열은 더욱 매혹적인 곡선을 보여 주었다. 짙어진 여성의 부드러움 속 버들 같은 허리와 눈처럼 새하얀 피부는 감히 가까이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녀가 이토록 탐스러워질 거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 구염락은 분명하게 굴곡이 생긴 곡선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하마터면 추태를 부릴 뻔했다. 남자가 나이 든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나의 서열이는 더욱 나를…….’

    목욕을 마친 장서열이 수건으로 직접 긴 머리카락을 닦으며 나왔다. 완정의 시중을 거절한 그녀는 천천히 내실로 걸어가다 귀비탑에 반쯤 기댄 구염락을 보았다. 그의 멍한 시선을 향해 장서열이 머리카락에 남은 물을 튕겼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멍해요?”

    장서열은 별 뜻 없이 안쪽으로 걸어가며 평소처럼 물었다.

    “오늘은 바쁘지 않으신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염락이 순식간에 그녀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내실로 향했다.

    나른한 봄빛과 요염한 기운이 얽혔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신음 소리와 함께 한 차례 격전이 이어졌다.

    몸을 일으키고 앉은 장서열이 옆에 누운 게으른 남자를 밀어냈다.

    “얼른 가서 씻어요. 침구가 다 젖었어요.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요!”

    평소에는 그리도 근엄한 사람이 어찌 방에만 오면 이리 풀어진단 말인가. 특히 구염락은 요즘 더욱 그녀를 아찔하게 했다. 넘치는 기운의 원천인 듯 단단하고 힘센 팔은 손쉽게 장서열을 어깨 위로 들어올리곤 했다. 창밖으로 내던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힘이었다.

    장서열은 밖으로 드러난 그의 가슴을 보았다. 그을린 피부 위에는 일 년 내내 무예를 연마한 단단한 근육이 있었다. 지금 당장 전장으로 출전한다 해도 끄떡없을 터였다.

    “왜 가만히 있죠? 본궁이 잡아끌어야 하는 건가요?”

    침대 아래로 내려온 장서열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 마마에게 머리를 말리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침대 휘장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타는 촛불이 어렴풋한 휘장 안을 비췄다. 그녀는 흐릿하지만 여전히 누워 있는 게 분명한 구염락을 보았다.

    “폐하… 폐하?”

    구염락이 반응하지 않자 장서열은 돌연 화를 냈다.

    “귀가 먹은 거예요?”

    구염락은 그제야 즉시 몸을 돌려 일어났다. 빠른 속도로 옷을 걸친 그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장서열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점점 더 아이가 되는지 조금만 틈을 주면 웃을 수밖에 없는 장난을 치곤 했다.

    화장대 앞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 장서열은 팔걸이에 기댄 채 자연스레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느긋한 얼굴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오늘과 내일이 쉬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구염락이 게으름을 피운 것도 당연했다.

    욕실로 들어간 구염락은 조금 전처럼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장서열이 마치 초혜전 시절로 돌아간 듯 점점 더 자신을 거칠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소리 내어 웃은 구염락은 나른해진 몸을 물속에 담갔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물에 모든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 장서열이 짓던 감미로운 표정이 떠오르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욕조의 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코로 익숙한 향기가 밀려들자 구염락은 번쩍 눈을 떴다. 어깨 위로 기어오르려 하는 아들을 들어올린 그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놀라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마마께서 태자 전하를 들여보내라 한 것일 뿐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폐… 폐하…….”

    유모는 혹시라도 화가 난 황제가 태자를 던질까 봐 두려웠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태자가 황제의 옥체에 손을 댄 건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

    구염락은 차가운 얼굴로 아들을 훑어보았다. 약간 누그러진 얼굴이었으나 이내 그는 구염황을 유모의 손에 던지듯 돌려보냈다.

    유모는 대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황급히 황자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황제의 위엄을 견디느라 벌벌 떨면서도 꿋꿋이 황자의 옆을 지켰다.

    구염황은 불편한 듯 몸부림을 쳤다. 작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그가 작은 손으로 유모를 힘껏 밀어냈다. 옹알대는 소리는 마치 아바마마께 다시 한번 더 높이 날게 해 달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유모는 두려움을 참으며 있는 힘을 다해 어린 태자를 달랬다. 긴장한 그녀의 몸이 땀으로 젖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자니 황후마마의 책망이 두려웠고, 가만히 있자니 전하가 계속 폐하께 가까이 가려 할까 봐 두려웠다.

    유모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전하가 어떻게 폐하를 무서워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명절이 다가올 무렵, 각지에서 보고한 식량 비축 상황과 호부의 보고가 일치하지 않자 화가 난 황제는 백여 명의 관원을 극형에 처했다.

    관원들은 처참한 얼굴로 죽어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보였던지, 관원들에게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조차도 그 광경에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황제는 그렇게 관원들로 하여금 착취한 백성들의 고혈을 조금씩 다 뱉어 내게 한 뒤, 엄동설한에 그들을 바닥에 꿇어앉혔다. 그들은 그렇게 산 채로 얼어 죽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은 황제일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구염황은 그렇게 무서운 부황의 말을 듣지 않고 물에 들어가려 했다.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유모를 밀어내며 우렁찬 소리로 울었다.

    구염락이 유모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린 황자를 품에 안은 유모는 감히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녀는 감히 한 발자국도 더 다가가지 못 했다.

    구염락은 아들의 둥글둥글한 엉덩이를 가리키며 훈계를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이냐. 감히 어디서 우는 것이냐? 너는 대주국의 태자다.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한번 보거라! 조용히 하지 못해?”

    부황의 목소리에 어린 아이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울음을 그친 아이가 웃어 보였다. 그는 짧은 손을 내밀어 안아 달라 청하는 동시에 작은 손과 발을 힘껏 버둥거리며 아버지에게 뛰어들려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위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결국 유모의 품에서 아들을 안아 든 구염락은 옥으로 만든 욕조 가장자리에 아들을 내려놓은 후 구구절절 훈계를 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영양가 없는 말을 한 차례 늘어놓는 사이, 어린 태자는 손발로 물을 치며 놀았다. 작은 입을 벌려 웃은 아이는 아버지의 몸을 밟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욕조인 양 엎드려 노는 아이의 귀에 아바마마의 훈계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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