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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4)화 (294/449)
  • 제294화

    미녀들로 둘러싸인 조로전은 산뜻하고 우아했다. 한 치의 티끌도 없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곳이었다.

    수녀들은 삼 개월간 철저한 교육 끝에 선발되었다. 남은 것은 스스로 성장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과정은 저 마마와 진 공공이 맡았고, 장서열은 오늘 처음으로 수녀들을 보았다. 장서열은 수녀 선발은 언제였는지, 어떤 여인들이 간택되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거라.”

    장서열은 익숙한 얼굴이 있는지 찾아보려 했다.

    “네, 황후마마.”

    수녀들은 황후가 살펴볼 수 있도록 볼을 최대한 높이 들어올린 채 시선을 반대편에 놓인 의자 다리에 두었다. 화려한 꽃이 핀 치마들이 아름다운 꽃처럼 펼쳐졌다. 거기에 더해진 수녀들의 외모는 얼핏 보면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더욱 운치가 있었다.

    무심하게 후궁들을 훑어보던 장서열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고정되었다. 장서열은 슬몃 웃었다.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자 꼭 식사를 시켜야만 주전부리를 시킬 수 있냐고 요릿집을 원망했던 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짙어졌다.

    장서열은 불필요한 친절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수녀들은 정해진 운명을 따라야 했다. 총애를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두 그들의 운에 달려 있었다.

    “수녀들이 모두 수려하니 앞으로는 지나친 욕심을 삼가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라. 본궁 역시 특별히 할 말은 없으니 모두들 이만 물러가거라.”

    “황후마마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수녀들은 순종하는 표정으로 물러갔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저 마마가 즉시 뒷정리를 도왔다. 저 마마는 소녀들이 작은 일에 화들짝 놀라는 앳된 티를 보이지 않고 단정하고 초연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황후마마께서 만족하시면 되었어.’

    조로전을 나선 수녀 일행은 줄줄이 이어진 담장과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들은 경비가 삼엄한 정심전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경옥전을 지나, 또 한참을 돌아 겨우 저수궁에 당도했다.

    수녀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황제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작정하고 머리를 쓰지 않는 한 우연히 황제를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행히 수녀들은 감히 계략을 꾸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무려 여러 차례 전장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온 영덕대제였다. 황제는 살기등등하게 적과 맞선 뜨거운 피로 나라를 다스렸다. 간신배를 처단하고 청렴한 관리 체계를 구축했으며, 전에 없이 황권을 강화한 위대한 제왕이었다.

    수녀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천하를 손에 쥔 어린 황제 앞에서 쩔쩔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찌 감히 그 앞에서 잔꾀를 쓸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소녀들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 이들은 황제를 흠모하는 동시에 경외했다. 그렇게 대단한 남자를 과연 잘 섬길 수 있을지, 황제가 자신을 좋아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수궁에 가까워질수록 소녀들의 긴장도 점차 풀어졌다.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더 대담한 소녀가 이제는 친해진 벗들과 함께 조금 전 황후를 알현하고 나온 흥분을 나누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정말 아름답고 목소리도 청아하셨어. 너희들도 봤어? 우리가 든 그 찻잔은 관요官窯(국영 도요지)에서 만든 유리채琉璃彩였어. 촉감과 빛깔이 전부 귀해서 차가 담긴 모양조차 예뻤어.”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서 탄복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에 몽소우夢疎雨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아야, 너는 차도 마신 거야? 나는 만져 보지도 못 했어. 찻잔이 무슨 색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 정말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너는 정말 대담하다. 황후마마의 용모도 기억하는구나.”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몽소우는 소녀 특유의 느낌이 어린 단정한 미인으로 흠천감欽天監 이인자를 아버지로 둔 수녀였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마침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는 소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제운아齊雲兒는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얼굴에 깃든 약간의 홍조는 몽소우에 비해 더 활발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감히 황후마마를 쳐다볼 수 있었겠어. 간신히 찻잔까지 보았지.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아름답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

    마마는 규방에 계실 때부터 이미 ‘제일미녀’라고 불렸고, 청산에서 춤을 추셨을 때는 수많은 문인들이 마마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대. 그때는 마마께서 아직 입궁하시기 전이었지만 누구도 그 명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황후마마께서 정말 아름답다는 걸 확신했지.”

    “쉿! 지금 너만 말하고 있는 거 알아? 저 마마가 들으면 어쩌려고. 벌로 책을 베껴 쓰라고 할 수도 있어.”

    제운아는 즉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안 그러실걸. 내가 왜 지금 떠들고 있는 것 같아? 그건 우리가 궁에서 나왔기 때문이지! 저 마마는 분명 벌은 내리지 않고 한두 마디 훈계만 할 거야.”

    제운아는 마치 고통에서 벗어난 듯 어깨를 폈다. 그녀는 형부刑部 시랑侍郞의 작은 딸이었다.평소 제 대인은 몽소유의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기에 두 집안의 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어울려 자랐다. 이들은 서로 비밀도 공유할 수 있는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사실 제 대인은 두 아이들의 이름이 불만이었다. 작은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친구인 몽 대인에게 작명을 부탁했다. 그 결과 ‘운’ 자를 받아 넣었으나, 후에 몽 대인이 그의 딸 이름에 ‘우’ 자를 넣자 제 대인은 왠지 속았다는 생각에 분했다.

    ‘구름이 움직여야 비가 내리는 법이지. 아침에 구름이 끼면 저녁엔 비가 내리는 법, 이건 내 딸더러 평생 그의 딸이나 따라다니라는 뜻이 아닌가!’

    한편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는 엄숙하신 분이라 분명 저 마마보다 더 가까이하기 어려울 거야.”

    희고 보드라운 피부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소녀는 마치 많은 숙제를 원망하는 아이처럼 이제야 겨우 말을 한다는 듯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쏟아냈다.

    “황후마마는 내명부의 수장이시니까 근엄하신 것도 당연해.”

    대꾸한 소녀는 차분하고 평온했다. 침착하면서도 대범한 행동은 마치 뼛속까지 그런 사람인 듯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실 굳이 대답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불평을 한 소청청蘇靑靑과 오랫동안 같은 방을 쓴 데다 하필 소청청이 자신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기에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청청은 그녀가 못 들은 줄 알고 자꾸만 큰 목소리를 냈다.

    불안한 마음에 소청청은 억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엄숙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했다. 하필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가 모두 그런 유형의 사람들일 줄이야.

    소청청은 앞으로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울적해졌다. 들었던 것 중 가장 처량하고 비참한 소문처럼 혹시라도 자신이 궁에서 매일 우울해하다가 그대로 늙어 죽는 건 아닐지 두려웠다.

    소청청은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언제나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같은 방 자매에게 장난을 쳤다.

    ‘별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걱정하기는.’

    서풍화瑞楓華가 소청청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풍화는 평소 이런 우스운 행동을 상대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매번 기대하듯 바라보는 소청청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아무리 냉정한 그녀라도 입꼬리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청청은 드디어 걱정 없이 웃는 얼굴을 드러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풍화 언니, 사실 언니는 웃으면 정말 예뻐요. 마치… 마치…….”

    적절한 표현을 찾던 소녀가 갑자기 환해진 얼굴을 들었다.

    “땅콩을 한 움큼 입에 넣은 것처럼 아주 행복한…….”

    스스로의 표현에 도취된 소청청은 마치 땅콩을 실컷 먹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서풍화는 아무래도 소청청을 멀리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청청이 어떻게 간택이 되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소청청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혼이 나는 순간에도 장난을 쳤다. 서풍화의 눈에 소청청은 아직 가정교육이 더 필요한 아이일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남게 된 걸까… 설마 너무 예뻐서?’

    삼삼오오 모인 소녀들이 저마다 재잘거렸다. 저 마마는 처음으로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상전 앞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건 죽을죄였지만 상전이 없는 곳에서 어쩌다 바보짓을 하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저 마마는 오늘 소녀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은 것을 감안하여 관대하게 몇 마디만 당부했다. 진정한 검증은 입궁한 뒤 비로소 시작될 것이기에 집에 돌아갔다고 해서 그간 배운 것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이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저 마마는 수녀들에게 어서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황궁 밖, 각 가문에서 수녀들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 마마는 왠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저 마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썼던 수녀와 작별 인사를 할 차례가 되자 처음으로 과묵한 입을 열었다.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입궁 후 황후마마를 잘 섬기셔야 합니다. 아가씨의 장점이 가려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비록 미인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제법 매력적인 얼굴을 한 오휘미吳徽微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리둥절한 눈동자에 잠시 의아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마마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마마, 몸조심하세요.”

    말을 마친 오휘미는 겸손하게 몸을 낮추고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순간 저 마마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입이 방정이로구나!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다니!’

    어찌 마음이 약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연히 사리분별을 못하고 감히 귀인들에게 입을 함부로 놀려 버렸다.

    저 마마는 생각 끝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휘미 아가씨도 깊이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리한 사람이니 말을 아끼겠지…….’

    * * *

    외지 출신인 오휘미는 부친 역시 연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지금은 고모 댁에 머물고 있었다.

    오휘미는 가마에 앉아 저 마마의 말을 곱씹었다. 저 마마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엄청난 노력을 들여 저 마마의 마음을 얻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저 궁에서 편하게 지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수확까지 얻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저 마마의 말은, 황후야말로 미움을 사서는 안 될 사람이란 뜻인가? 그렇다면 왜 굳이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거지? 오히려 피하는 게 최선일 텐데…….’

    오휘미는 이해가 되지 않아 자꾸만 저 마마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저 마마는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깨닫지 못한 깊은 뜻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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