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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3)화 (293/449)

제293화

장서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장서양이 고개를 숙였다. 모든 존엄을 내던진 그가 비천하게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형님… 부디 제가 형님을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장서전은 가소로울 뿐이었다.

“네 눈에는 내가 그리 착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지금 당장 너를 때려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것이거늘, 감히 나를 따르겠다고?”

“…….”

“하하! 네가 나를 오랜만에 만나기는 했나 보구나. 그새 내 성격을 잊은 게냐? 아니면 너를 불쌍히 여길 거라 생각할 정도로 나를 높이 평가한 게냐?”

장서양이 사내라면 즉시 몸을 돌려 다시는 이곳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대의명분을 따지는 사내가 아닌,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낱 쥐에 불과했다.

“형님께서는 저의… 형님이시잖습니까…….”

“나는 너 같은 아우를 둔 적이 없다!”

장서전의 마음은 얼음장 같았다. 고개를 든 장서양은 과거 제멋대로 날뛰긴 했으나 심성만큼은 착했던 형님을 바라보았다. 풀죽은 얼굴로 잡고 있던 손을 놓는 그의 모습은 비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가 허황된 기대를 했군요…….”

말을 마친 장서양은 힘겹게 일어났다. 그는 눈에 젖어 질퍽거리는 홑옷을 들고 한걸음씩 눈밭을 밟으며 떠났다.

장서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서전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시선을 거두었다. 담담했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사람을 보내 저자를 잘 감시하도록 해라. 행여라도 가족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한다면…….”

“네, 알겠습니다.”

장서전은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걸어갔다. 장서양은 이미 예전의 패기를 모두 잃었고, 작은 위험조차 무릅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은 건 아마도 그가 진심으로 뉘우쳤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서전은 감히 도박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장서양이 또 다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사악한 마음을 먹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만약 그가 세자와 정혼했던 누이동생의 과거를 떠벌리고 다니거나 거짓으로 가문에 누가 되는 헛소문을 날조하여 퍼뜨린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 것인가.

장서전은 지금 이 순간의 장서양을 믿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장서양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장서전은 앞으로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 * *

“마마, 밖에 눈이 많이 옵니다.”

외투를 털어 낸 완정이 얼른 옷을 정리한 후 화로 앞에 다가가 몸을 녹였다. 그녀는 저만치서 태자의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나갈 때는 싸락눈이었는데, 지금은 함박눈이 되었습니다.”

완정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에 입김을 불고 다시 불을 쬐었다.

“마마, 분부하신대로 저수궁储秀宮에 의복과 물품을 추가하였습니다. 막 입궁하여 폭설을 맞이한 수녀들을 불쌍히 여긴 황후마마께서 특별히 마음을 쓰신 거라고 저물사储物司에 말해 두었습니다. 석탄의 양도 더 늘렸고요.”

“…….”

“황후마마의 은혜에 탄복한 수녀들이 저수궁 마마의 인솔에 따라 조로전 방향으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어질고 총명하신 황후마마께서 새로 입궁한 여인들을 잘 돌보아 주신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몸을 녹인 완정은 황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황후를 도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 황자를 부축해 주었다.

장서열은 사람이 바뀌자 칭얼대는 아들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들의 작은 코를 가볍게 건드렸다.

“황자답지 못하기는.”

말을 마친 장서열은 황아가 흘린 침을 닦아 주었다.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다들 차차 황궁 생활에 익숙해지겠지. 저 마마嬷嬷가 다른 이야기는 안 하더냐?”

완정이 연탑 위로 기어오르는 태자 전하를 받쳐 주며 답했다.

“없었습니다. 황후마마, 안심하십시오. 저 마마는 이미 여러 차례 수녀秀女 선발을 총괄한 사람이니 마음 푹 놓으시고 몸을 보양하세요.”

장서열은 어느새 탑의 베개 위까지 올라간 아들의 다리를 흔들어 내렸다. 그녀가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황아를 쳐다보았다.

담황색 옷을 입은 아이는 상황을 파악한 후 즉시 바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는 흥분한 듯 다시 두 발로 베개를 밟고는, 이제 막 잇몸을 뚫고 나온 세 개의 치아를 드러내며 어머니를 보고 침을 흘렸다.

장서열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황아는 벌써 7개월이었다. 서서히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기 시작한 아이의 얼굴은 부쩍 구염락을 닮아 있었다.

아이는 식욕은 좋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우렁찼고, 아직 허약한 다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누군가 쉬지 않고 걷는 자신의 느릿느릿한 다리를 부축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구염황은 조금만 많이 먹어도 토하곤 했다. 이전에 비해 좋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많이 먹이면 탈이 나는 통에 장서전의 딸과 비교하면 약간 마르고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저 마마 덕분에 안심이로구나. 아무래도 본궁은 저 마마가 없으면 안 되겠다.”

어린 황자를 탑의 등받이에 앉혀 놓은 완정이 공손한 자세로 몸을 숙였다.

“황후마마의 은혜가 크십니다. 저 마마도 분명 황송할 것입니다.

장서열은 완정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너희들도 요즘 고생이 많구나.”

어린 황자의 장남감을 가지고 오던 농교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황후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완정은 하나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수궁에 다녀올 때마다 얼마나 좋은 것들을 잔뜩 받아오는지 아주 부러워 죽겠습니다.”

완정은 뾰로통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온 농교를 툭 쳤다.

“쓸데없는 소리.”

완정이 황후에게 해명했다.

“재차 고사했으나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마.”

사실 완정은 수녀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무엇도 받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조그마한 노리개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행여나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라도 주겠다고 나선다면 큰일이었다. 만에 하나 총애를 받게 된 수녀가 후에 준 것을 돌려 달라고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각 가문의 소녀들은 어떻게 해서든 완정의 손에 뇌물을 쑤셔 넣었고, 정 받지 않는 경우 황후마마께 꼭 이야기를 잘해 달라고 간청했다.

농교는 허리에 차는 북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젠 귀찮은 모양입니다. 노비의 기억에 지난 번 수녀 선발 때 완정은 저수궁의 수녀들이 소매에 물건을 집어넣을 때마다 한동안 얼굴이 빨개졌었는데 지금은…….”

농교가 장난스레 완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완정은 인정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농교 언니가 놀리는 것입니다, 마마.”

구염황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몹시 억울하다는 듯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놀란 농교와 완정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후마마. 용서해 주시옵소서.”

장서열은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들을 보고 웃으며 안아주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농교가 아드님에게 신경 쓰지 않아 마음이 아프신가요?”

황아는 이미 완정이 탑 위에 내려놓았을 때부터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완정과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부터 심지어 농교까지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자 그는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짐짓 신경 쓰지 않는 척 지켜보고 있던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무슨 큰일이라고. 이러면 아바마마께서 놀리십니다.”

구염황은 비록 어렸지만 억울하다고 징징거리거나 아직 마음이 안 풀렸으니 더 달래달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르자 눈물이 맺힌 눈으로 즉시 웃어 보인 그가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자신의 입 안으로 찔러 넣었다. 아이는 부끄럽고 주눅이 든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농교와 완정을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어쩔 도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자신도 이렇게 맹해 보였을까 궁금해하며 구염락과 너무도 흡사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문득 전생에서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 속 딸아이는 항상 말수가 적었던 것 외에 어릴 때의 모습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딸아이도 이렇게 맹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던가.

장서열은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태의가 삼 개월이 더 지나면 기력을 회복할 거라고 했어. 그렇다면…….’

* * *

여러 단계에 걸친 수녀 선발이 끝나자 열다섯 명의 여인들이 남았다. 다들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에 재능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오늘은 황후를 알현하는 날이었다. 선발된 수녀들은 황후에게 무릎을 꿇은 뒤 다시 출궁하여 부모와 작별 인사를 하게 된다. 이들은 한 달 후 하사 받은 품계에 따라 입궁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린 황자와 황후가 머무는 조로전은 언제나처럼 우아했다. 대전 가득한 부드러운 기운에 다소 긴장했던 미녀들은 한숨을 돌렸다.

상석에 앉은 장서열은 모든 이들의 표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수녀들이 긴장을 했는지 아닌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열여섯 살 꽃다운 나이. 심지어는 그보다 더 어린 소녀들을 보며 장서열은 돌연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러는 그녀도 이제 갓 열여덟이 지났을 뿐이지만 앳된 소녀들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누구도 세월을 비껴갈 수 없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그녀 역시 꼭 소녀들만 한 나이 때 구염락과 혼인하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들이 바뀌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장서열은 이 소녀들은 또 어떤 심경일지가 궁금했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열다섯 명의 소녀들이 큰절을 올리며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사뿐사뿐한 움직임에 낭랑한 목소리는 마치 맑은 물이 찰랑이는 듯 경쾌했다.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눈빛에서는 절로 생기가 느껴졌다.

“일어나라.”

장서열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한 가족이니 폐하를 잘 모시도록 하자’와 같이 입에 발린 말이나 ‘동생’ 같은 호칭은 더더욱 사용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냉정할 정도로 담담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앞으로 공평무사하게 후궁들을 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행동부터 단정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경 받는 황후의 모습이었다.

“모두들 수고했다. 자리에 앉거라.”

“황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된 수녀들은 모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정하면서도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각에 황자가 있기에 향을 더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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