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쫓겨나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쫓겨나지 않으면 누가 쫓겨나겠는가.
장씨 일가는 조금도 양심이 없었다. 그들은 한 번도 심하게 대한 적 없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그들의 것이 아닌 일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것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장서양은 말로는 누이동생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결국 유일하게 동생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곳에서 끌고 나와, 그녀를 은자 오만 냥과 맞바꾸었다. 집안의 맏아들로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면서도 모친에게 은자 한 푼을 보태 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어머니를 부양하기는커녕 연로한 어머니를 창피해했다.
아우의 뒷바라지는 장서양에게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그러나 아우는 그가 문인의 존엄을 버려가면서까지 고생하여 번 돈으로 주색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했다.
장서양은 장서목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사실 그 역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아우가 가문을 위해 전쟁터라는 사지에 몰려 돌아오지 못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장서양은 웃었다. 쓸데없이 책만 읽은 스스로를, 자신의 뱃속에 가득한 먹물을 비웃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의 부귀를 누리려 하다니. 결국 그는 서출이자 불효자일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적장자를 비웃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하다니!
‘자업자득이야! 다들 나를 짓밟으라고 해! 다시는 움직일 수도 없게!’
장서양은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는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가소롭게도 과거에 이룩했던 높은 학식에 기대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걸까?
장서양은 무언가를 바랄수록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비참해지는 현실에 절망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구역질나는 인간인지를 확인했다. 과거 그는 적모였던 조 부인과 그녀의 친자식을 망가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가 저지른 짓은 배은망덕의 전형이었다.
한편, 기 씨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땔감을 사러 나간 아들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문밖에 나와 본 그녀는 아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서 있자 순간 화가 치솟았다.
“거기 서서 뭐하고 있는 게야! 땔감은 어디 있고? 이 어미를 얼어 죽게 만들 참이냐!”
말을 마친 기 씨가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얼어서 빨갛게 부르튼 손을 소매에 품으며 계속해 욕을 퍼부었다.
“그놈의 공부, 공부! 잘난 공부만 하다가 아주 바보가 되었구나. 이렇게 쓸모가 없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딸이나 두 명 더 낳을 것을! 한 명당 오만 냥이나 되는데 저렇게 실패만 하는 놈보다 낫지!”
장서양은 수군대는 주변 사람들을 못 본 척하며 멍하니 문을 나섰다.
시간이 지나도 장서목은 옥호접을 잊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후 쾌락에 대한 집착이 최고조에 이른 그는 무기력한 몸으로 수중에 돈이 생기는 족족 향락을 일삼았다.
장서양은 아우를 욕하고 때려도 보았지만 그는 매번 말로만 뉘우치고 고치겠다고 할 뿐, 돌아서면 또 같은 짓을 일삼았다. 맞을 때 장서목이 뱉는 말은 장서양이 보기에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장서목은 그저 괴로운 그 순간만을 넘길 뿐이었다.
장서목은 여전히 가족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들에게 상처 입히는 상황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장서양은 계속해 실망했다.
제2군에서 내쳐진 장서목은 막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힘들게 번 은자는 유흥으로 탕진했다. 장서양은 끝내 울면서 아우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는 이번 생이 이렇게 끝인 거냐고,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장서양은 어떻게 해도 밝고 빛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적장자와 함께 밥 한 그릇 먹을 수 없는 나날을 원망했던 그는 자신의 방에서 부족함 없는 생활을 영위했었다.
당시 장서양은 자신이 장서전보다 지위가 낮다는 사실과, 별 재주도 없는 그를 노비들이 더욱 공경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적어도 노비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
대체 만족하지 못할 게 뭐가 있었단 말인가.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서,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내 적자와 적녀의 지위를 넘보다니!
장서양은 스스로가 비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장서양은 회색빛이 드리운 새벽부터 찬바람이 뼛속을 파고드는 한낮까지 오래도록 걸었다. 거리에는 고통과 그리움, 자조 섞인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비틀거렸다.
첫눈이 내렸다. 문득 고개를 든 장서양은 자신이 아주 오래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때 수많은 꿈을 꾸었던 거리에 서서 위엄 있는 청홍靑紅 대문을 바라보았다.
입구에 선 석조를 마주한 씁쓸한 얼굴에 옅은 웃음이 퍼졌다. 가문의 적자인 장서전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거만하게 머리를 쳐들고, 감히 올라오지 못하는 기 씨의 삼 남매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때는 형님이 웃는 모습이 얼마나 눈꼴시었는지…….
장서양은 그제야 알았다. 그때 형님이 뭘 알았겠는가. 그건 그저 공부로는 줄곧 당할 수 없던 동생을 약 올리기 위한 어린아이의 치기일 뿐이었다.
장서양은 무엇이 자신의 눈을 가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왜 그리 무지했을까. 판단력이 흐려진 그는 현실에 만족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다 결국 오늘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세상은 얼마나 냉혹한가. 그러나 푸른 기와 안에서는 설령 적출이 아니라 해도 충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정문 한편에서 작은 문이 벌컥 열렸다. 사람을 태운 짙은 녹색 마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서양은 처음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원망도, 부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귀퉁이에 향낭을 매단 짙은 마차는 혼인한 부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옆문을 이용한 데다 두세 명의 하인만이 따르는 걸로 보아, 마차에 오른 이는 장서전의 첩이 된 서씨 가문의 셋째 딸이 분명했다.
장서양은 당시 서씨 가문의 아가씨가 자신과의 정혼에 동의한 줄로만 알았다.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나다 한들 고작 서출에게 서씨 가문에서 적녀를 내주었을 리 없지 않은가.
사기 행각을 알게 된 서 대인이 욕을 퍼부은 것도 당연했다. 서출 주제에 감히 그의 금지옥엽을 취하려 하다니!
장서양이 아는 한 정실이 된 주씨 아가씨는 분명 여러 방면에서 서씨 아가씨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정실부인의 압박을 참고 견디며 서씨 아가씨는 자신을 원망했을까?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서양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추적추적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푸른 벽돌을 축축하게 적셨다.
“부인! 서양이가 불효했습니다!”
장서양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거리의 귀퉁이에 꿇어앉아 있었다.
“제가 배은망덕했습니다! 부인께서는 저를 먹여 주시고 입혀 주셨는데, 저와 아버지는 감히 부인의 자식들을 모해하려 들었습니다……. 두 사람을 무지몽매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게 할 속셈이었지요. 저는 매일 형님에게 주먹만 세면 된다고 부추겨 황자를 업신여기도록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시간이었다. 장서양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부인께 쫓겨난 것도 당연합니다!”
그가 자신을 조소하며 말했다.
“저희는 부인께서 넓은 도량으로 품어 주신 관용과 굶어 죽지 않게 도와주신 선의를 저버렸습니다……!”
장서양은 조 부인의 비호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제발 이 불효자를 다시 받아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장서전은 그 뒤에 서 있었다. 몹시 놀라고 분노했던 눈빛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잔잔한 평온을 되찾았다. 한때 그를 자괴감에 빠지게 했던 아우에게 그런 시커먼 속셈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득 장서전의 뇌리에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하던 누이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서열이는 좀처럼 성숙하지 못한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었다.
그가 외가댁으로 보내지던 날, 누이동생은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활짝 웃었다. 그때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참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떠나는 걸 그리 기뻐할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장서전은 정말로 생각이 없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와 매사 똑똑한 척 고개를 숙이던 이복동생이 뒤에서 그런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과거를 떠올린 장서전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외가댁에 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계략대로 줄곧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장씨 가문에서 자랐다면, 그는 여전히 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질 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한량이 되었을 것이다. 하릴없이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다니며 외가에서 주는 권리만 누리고 있었으리라.
사실 장서전에게는 권리랄 것도 없었다. 선황 시절 어머니가 지닌 권력에 기대어 있던 그는 지금은 누이동생이 지닌 권력에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없다면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서전은 아직도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지켜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허점을 보이기 마련이다. 다행히 장서전이 지닌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유순한 아내와 잇속에 밝은 어머니, 그리고 몸이 약한 조카와 우애 깊은 누이동생이 있었다.
장서전은 장서양의 시선을 따라 저만치 떨어져 있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천천히 안정되었다.
“일어나거라.”
깜짝 놀란 장서양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뒤에 선 사람을 알아본 그가 갑자기 땅에 나자빠졌다.
“제… 제가 안 그랬습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형님…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장서전이 장서양을 쳐다보았다. 낡은 옷을 걸친 그는 흐트러진 모습에 침울하고 흐리멍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장씨 가문 도련님은 사라지고,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떠는 초라한 사내만이 남아 있었다.
참으로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장서양의 몰골에 장서전은 순간 흠씬 패 주려던 마음조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
주먹을 더럽힐 가치조차 없는 자였다. 이런 작자를 때렸다고 해서 원수를 갚았다는 느낌이 들 리 만무했다.
“가 봐.”
장서양은 흠칫 놀랐다. 다시 형님을 쳐다보는 위축된 눈빛에는 미약하게나마 뜻 모를 용기가 서려 있었다.
‘나를 고발하지 않는 건가? 그런 사실을 알고도 그냥 나를 놓아주는 거야?’
장서양이 장서전을 쳐다보았다. 비단옷을 입은 장서전의 눈빛은 어렸을 때처럼 맑고 깨끗했다. 눈이 오는 추운 날씨에도 꼿꼿하게 뒷짐을 지고 선 모습은 남자의 기개로 가득했다.
순간 깨달음을 얻은 장서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장서전은 자신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적수조차 되지 않는 자에게 굳이 부질없는 짓을 해서 명성을 띄워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게 바로 형님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