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이듬해 열두 살을 코앞에 둔 헌원상은 후원에 첩실 한 명을 두고 있었다. 황후에게 죄를 지어 쫓겨난 여인은 명목상 황제에게 상으로 받은 첩이었다.
헌원상은 황제가 어찌하여 그런 중요한 여인을 자신에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황제를 모신 금용은 특히 황제와 각별한 사이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이를 질투한 황후가 그녀를 출궁시켜 그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헌원상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후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분명 못된 누군가가 먼저 황후마마를 건드렸으리라. 게다가 그가 봐도 금용의 성품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여자를 내게 보내다니……. 무언가 거래라도 있었던 것일까?’
헌원상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매우 평온했다.
‘만에 하나 금용이 여기서 죽는다면… 황후마마께서 기뻐하실까?’
아마 금용은 죽지 않는다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어머니께서 알게 된다면…….’
하지만 헌원상은 즉시 무서운 생각을 떨쳐냈다. 모친과 누님은 외실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지극히 잘해 주었다. 그는 감히 배은망덕한 짓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멈춘 헌원상은 책을 짊어진 채 주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주소유는 화려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다른 명문가의 적녀들이 으레 그렇듯 귀엽고 천진난만했다. 그러나 다소 다른 점이 있다면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는 점이었다.
주 태부太傅(옛날 삼공三公의 하나)의 여식인 주소유는 지위가 높았다. 그녀는 사서오경을 배우고 치국모략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금琴과 바둑, 서예와 그림 어느 것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연경에서 명성을 떨친 그녀는 비록 절세미녀는 아니었지만 미인이라 할 만했다. 모든 걸 다 갖춘 그녀가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주소유는 바르게 자라났다. 주씨 가문의 엄격한 교육 속에 그녀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생을 함께 할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 나를 괴롭히지도, 내가 괴롭히지도 않을 첩실들. 그녀는 남편이 뛰어난 인재가 되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래에 부군과 아이들이 자신이 봉호를 받도록 노력해 주길 바랐다.
주소유는 결코 여자아이가 수줍은 척 아름다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리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반항이란 바로 남편의 뒤에서, 규방에서 조용히 살아갈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딸아이의 생각을 알게 된 주 부인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있어 지난 사십여 년 동안 본분을 어긴 적도, 삿된 생각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반항적인 딸이 태어났단 말인가.
놀란 주 부인은 달포 동안 남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딸의 이야기를 들은 주 태부는 하하 웃었다. 그는 눈처럼 하얀 수염을 치켜들고 딸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패기가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다행히 주소유는 분수를 알았기에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오랜 시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이 여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슴 가득한 열정을 온갖 재주를 통해 녹여 냈다. 그녀는 남편을 정복하여 한 가문을 장악함으로써 진정한 가문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거창한 꿈을 조각내는 초라한 현실이 나타났다. 소녀 주소유는 또래 소녀들보다 더 약한 헌원상을 만났다.
헌원상이 처음 저택에 방문하던 날, 주소유는 그를 보며 겁 많은 원숭이, 병약한 강아지, 우리 안에서 늘상 괴롭힘을 당하는 작은 토끼 등을 떠올렸다. 그는 주소유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로 그 모습이 주소유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그녀는 집과 학당에서 불쌍한 또래 친구를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못해도 괜찮았다. 자신이 가르치면 되니까. 동기들에게 놀림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서서 복수하면 되니까.
주소유는 상대가 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학식으로 눌러 주었다. 또한 헌원상에게 글씨를 쓰는 법까지 일일이 가르쳤다. 그래도 못하면 다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이렇게 귀엽고 불쌍한 아이는 더 많은 물을 주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불쌍한 또래 친구는 이제 입만 열면 명문장을 구사하는 소년이 되었다. 조금 길다 싶은 시문을 아예 외우지도 못하던 아이는 이제 종류를 불문하고 경전을 인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주소유는 영광스러웠다. 겁 많고 소심하던 아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차분하게 말을 하는 소년이 차지했다.
헌원상은 동시童試에서 1등, 경시京試에서 2등을 기록하며 지난 십 년간 이름을 날리던 풍운아를 제치고 연경의 새로운 신랑감으로 급부상했다.
그제야 주소유는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헌원상과의 정혼 의사를 묻던 날, 그녀는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너무하세요. 그렇게 부끄러운 질문을 하시다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아나 담을 마주하고 섰다. 주소유는 꽃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헌원상, 나가 죽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후 주소유는 할 일이 없을 때면 황제가 헌원상에게 하사한 그 양심 없는 첩실이 죽기만을 기도했다.
사랑은 종종 상상하던 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 * *
학당에 들어선 헌원상은 주소유의 몸종 주아가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헌원상은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 여기. 아가씨가 먹고 싶어 하던 당인糖人(설탕을 녹여 모형에 부어 만든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과자)이야.”
이는 어젯밤 학당을 떠날 때 주아가 특별히 당부했던 것이었다.
물건을 받아 든 주아는 장래의 고야姑爺(처가에서 사위를 부르는 말)가 무슨 분부를 내릴지, 혹 아가씨의 호감을 사기 위해 가져온 다른 물건은 없는지 기다렸다.
나이가 찬 아가씨는 이제 마음대로 집 밖에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여전히 정교하고 화려한 물건을 좋아했고, 사부 곡본詞賦曲本(한시를 모은 악보)도 매우 좋아했다.
혹시라도 아가씨가 다른 선물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면 사부詞賦에 감상을 써서 주면 된다. 이를 받은 아가씨가 또 새로운 감상을 적어 다시 헌원 공자에게 돌려준다면 함께 성장하고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대체 이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우리 아가씨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주아는 손에 들린 민숭민숭한 당인糖人을 쳐다보았다. 마치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눈빛이었다. 소유 아가씨가 출신도 따지지 않고 그와 정혼을 결심한 건 헌원씨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어찌 아가씨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모른단 말인가!
‘목석 같으니라고! 아가씨를 화병이 나 죽게 만들 셈인가?’
주아는 진심으로 아가씨가 우울한 마음에 병이라도 들까 걱정이 됐다. 심지어 헌원 공자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몸으로 첩을 들인 사람이었다. 소유 아가씨의 억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주아는 마치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 한참이나 당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볍게 몸을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주아는 명문가 시녀답게 공손한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헌원상은 한시름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고른 세 가지 종류의 당인을 과연 주소유가 좋아할지 궁금했다. 주씨 가문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건 자신의 복이었다. 그는 반드시 그녀에게 잘해 주리라 다짐했다.
손에 든 책을 정리한 헌원상은 잠시 뒤 사환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육도문六道門 안쪽 규방 안, 주소유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헌원상이 고른 ‘경극의 대가’와 ‘사부의 시조’, ‘문단의 제왕’을 만난 후 주소유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퍼졌다.
“마음은 있다고 할 수 있구나.”
그녀의 웃음은 점점 커졌다. 주소유는 며칠 동안 쓸쓸했던 감정을 밀어내고, 급히 당인이 상하지 않도록 얼리라고 지시했다.
* * *
“뭐라고?”
연병장에서 내려온 장서전은 오가는 부하들을 피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장서전이 대기 중인 사병을 쳐다보았다. 제2군 군복을 입은 사병이 공손하게 서서 말했다.
“천통령千統領께 보고 드립니다. 장서목이 원칙을 위배하여 제2군에서 퇴출되었습니다. 혹시라도 통령統領께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까 염려되어 사령께서 서둘러 통령께 알려드리라 전하셨습니다.”
사령은 장서목이 장서전의 이복형제임을 의식한 것이리라.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장서전은 이제 장서목의 얼굴조차 희미할 지경이었다.
물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2군은 제1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리가 해이했다. 도대체 그런 느슨한 분위기에서도 그가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사병은 차렷 자세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천통령께 보고 드립니다. 장서목은 기방에 출입하여 기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순간 멍해졌던 장서전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알았다. 2군의 사령에게는 규율에 따라 악습을 징벌하라고 전하라.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한 장씨 가문의 일은 조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네, 알겠습니다.”
사병이 떠나자 장서전은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옥호접玉蝴蝶은 참으로 머리가 비상한 여인이었다. 장서양은 옥호접의 돈줄을 끊었고, 그녀는 장서양의 희망을 끊어 놓았다.
장서전은 옥호접의 외모가 여느 기녀 같지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항간에는 그녀의 성실함을 칭찬하는 말들이 많았는데, 특히 기녀들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
장서양은 조 부인에게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대문 앞에서 집사에게 쫓겨난 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쉽게 자리가 나는 군정軍政에 희망을 걸고, 온 힘을 다해 동생 장서목을 제2군 예비군에 들여보냈다.
장서전은 과거 장서목은 무武에, 장서양은 문文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일을 떠올렸다. 무를 익히는 데 드는 비용이 적지 않았던 탓에 장서양은 하루 빨리 돈을 벌어 아우가 무관으로 자리를 잡는 데 보탬이 되고자 했다.
확실히 장서양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그런대로 돈을 벌었고, 글을 대필했을 때 버는 수입에 눈을 뜬 뒤로는 아예 생업을 접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니며 화방花舫(놀잇배)에서 답안을 팔았다. 그에게 시구에 절묘한 대련對聯을 붙이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장서양은 옥호접의 화방을 망쳐 놓았고, 끝내 옥호접의 노여움을 샀다. 장서전은 옥호접이 그녀의 앞날을 망친 장서양에게 복수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