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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89)화 (289/449)
  • 제289화

    “네…….”

    실눈을 뜬 장서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조금 전 태감과 비교해 구염락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왕이 몸소 허리를 굽히는 정성을 발휘했으니 당연히 황제가 한 수 위였다.

    그녀가 인정해 주자 구염락의 준수하고 짙은 눈썹이 환하게 펴졌다.

    “짐이 어려서부터 연마한 재주가 부족할 리 없지. 누워 봐. 오늘은 짐이 부인을 극진히 모시는 날이야.”

    그가 누르는 약한 압력에 장서열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해졌다. 구염락은 그녀를 바라보며 흥미롭게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오늘 책봉식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어. 너는 여전히 너였고… 아니, 사실 지금의 너처럼 온화하지는 않았어.”

    “꿈속에서 제가 사나웠다는 얘기로군요.”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감히 그럴 리가.”

    투박해진 힘이 목을 안마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짐은 줄곧 차가운 얼굴이었어. 하는 짓도 매우 부적절했고… 네가 피곤한 걸 알면서도 난 한쪽에 선 채 줄곧 딱딱한 얼굴로 손조차 잡아 주지 않았지.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 봤어. 꿈과 현실은 반대라는 게 그걸 두고 하는 말 같아.”

    문득 그녀의 몸이 약간 경직되는 걸 느낀 구염락이 걱정스럽게 머리를 숙였다.

    “왜 그래, 아파?”

    “아니요…….”

    순간 장서열은 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확실히 일어난 적이 있는 일이었다.

    구염락은 결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녀야말로 그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질투가 심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견해가 다른 사람은 배척하는 사람.

    전생에서 처음 입궁했을 때가 떠올랐다. 장서열은 고귀한 자신의 출신에 기대어 구염락에게도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쫓아다니길 바랐지만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서열은 구염락과 가까운 여자들을 증오했다. 뺨을 때리는 건 예사였고, 기분이 나쁘면 다음날까지 꿇어앉아 있게 했다. 구실을 만들어 실컷 두들겨 패는 건 일도 아니었다.

    순간 장서열은 진땀이 나는 걸 느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구염락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그런 악처를 사랑하겠는가.

    과거 황후 책봉식에서 구염락은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녀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염락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또 다른 생각을 하는군.”

    장서열은 웃어 보였다. 지금 이 기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감히 그럴 리가요. 하지만 본궁은 이제 황후이니 다른 생각에 빠질 수도 있지요. 시중을 드는 어린 태감이 감히 본궁을 방해하려 들다니요? 아무래도 끌어내어 곤장을 쳐야겠습니다.”

    순간 구염락이 장서열의 몸을 돌려 자신의 아래 두었다. 눈 속에 억누를 수 없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소인, 따를 수 없사오니 마마께서 먼저 소인의 말을 따라 주셔야겠습니다. 소인이 마마를 만족시켜 드리지요.”

    “아……!”

    채 밀어 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구염락의 품에 안겨 있었다. 숨 쉴 틈 없이 입맞춤을 퍼부으며 구염락은 금기된 흥분을 느꼈다.

    제왕은 침대에서 거리낌이 없었다. 과거 구염락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저 까다로웠을 뿐.

    “이러다 누가 보겠어요.”

    장서열은 간신히 한숨을 돌리며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주변을 쳐다보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구염락은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한 얼굴을 들었다.

    “마마, 안심하시지요. 소인밖에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더욱 그녀에게 몰두했다. 장서열은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방 안 가득한 열기에 가을밤의 서늘함이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백옥 같은 달빛이 땅에 쏟아졌다. 창밖에서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는 한적하고 그윽했다.

    * * *

    다음날 아침, 밝은 햇살 아래 조로전의 침대 휘장이 걷혔다. 황후의 발이 옥답玉踏 위에 놓이자 천세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마마의 천세와 평안을 기원하옵니다. 복과 장수를 누리소서!”

    모든 태감과 궁녀들이 무릎을 꿇었다. 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들부터 바깥의 이등시녀와 정원에서 잡일을 하는 하인들까지 전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여 명이 넘는 하인들이 황후가 발을 딛는 순간 동시에 입을 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순간 멍해졌던 장서열은 곧장 정신을 차렸다. 왼손으로 귀밑머리를 받친 그녀가 농교의 팔에 오른손을 걸치며 일어섰다. 몸치장을 시작한 그녀에게 다시금 잊고 있던 법도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황후전의 위엄이람.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는 거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후로 책봉된 첫날, 처음 이 놀라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밤새 황제를 기다린 분노에 못 이겨 농교의 뺨을 때렸다. 세수할 때는 장신구들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새로 제작된 봉잠조차 바닥에 떨어져 꼬리가 부러졌다.

    그러고도 분을 참지 못한 그녀는 끝내 문안인사를 온 권여아에게 모욕을 주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장서열은 다시 한번 구염락이 자신을 박대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황후라면 냉궁은 물론이거니와 사약을 내리는 것도 지나치지 않았다.

    “마마, 어째서 웃으십니까?”

    농교가 주인을 위해 머리를 만져 주며 물어 보았다.

    “갑자기 재미있는 일이 떠올라서. 황아는? 일어났으면 유모에게 데리고 오라고 해라.”

    완정이 세수를 돕는 시녀들과 함께 들어오며 말했다.

    “황후마마,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부 감사監司(관직명)가 알리길, 잠시 후 권비마마와 만 귀인마마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저수궁儲秀宮에서도 비축 사항을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서열은 하품을 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었다.

    “그래.”

    만정이 가장 먼저 뛰어 들어왔다. 초록색 솜옷과 같은 색의 유군襦裙을 차려입은 그녀는 마치 가지를 드리운 버드나무처럼 앳된 얼굴에 제법 여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축 드리옵니다.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고개를 든 만정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눈부신 여인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봉잠 하나가 더해진 모습이었지만 절로 뿜어져 나오는 고귀한 느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만정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스스로를 한탄했다.

    ‘어찌 서열 언니와 같은 시대를 타고난 걸까.’

    자리에서 일어난 만정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또 장서열과 비교한 스스로가 달갑지 않았다.

    “소란스럽기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아기 같이 구는 거야? 자, 이번에는 또 본궁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었니? 이따가 사람을 시켜서 상으로 내릴 테니 말해 보렴.”

    만정의 눈 속에 숨길 수 없는 민망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닙니다! 저는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놀리지 마십시오.”

    물론 장서열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얼마 전 입궁한 만 부인이 만정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 마마조차 그들 모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알지 못했다. 만 부인이 떠난 후 만정은 오랜 시간 울었고, 그 뒤로 더 활발해졌다.

    장서열은 만정이 언제 궁을 떠나겠다 말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만정이 떠날 때에도 지금처럼 활달한 모습이기를 바랐다. 물론 만정에게 구염락을 보내 줄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정은 다른 비빈들을 상대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구태여 만정을 궁에 남겨 둘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만정이 남기를 원한다면 궁에서 마음을 단련시키는 셈 치고 오가며 한 번씩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재가再嫁할 필요 없이 마냥 어린아이 같도록.

    장서열이 애정이 담긴 눈길로 만정을 바라보았다. 볼이 빨개진 만정은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만정은 괜히 허튼 생각을 하게 만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장서열이 또 한 번 만정을 놀리려던 순간, 권여아가 들어왔다. 전에 없이 수척해진 모습은 바싹 시들어 있었다. 마치 마른 뼈에 얇은 비단을 걸친 듯한 그녀의 눈빛에는 증오도, 기쁨도 보이지 않았다.

    “소인,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천세 만복을 누리소서.”

    바르게 자리한 장서열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일어나라고 일렀다.

    “권비가 마음을 썼군.”

    권여아는 ‘신첩’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다투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일까.

    “권비가 몸이 불편하여 본궁은 걱정이 되는구나. 앞으로는 반드시 몸을 잘 보양하도록 하라. 본궁은 평안하니 매일 문안을 오지 않아도 된다.”

    권여아는 엉거주춤 선 채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한 시선이었다.

    사실 권여아는 장서열과 싸울 용기조차 없었다. 지난 일 년간 냉궁에서 보낸 날들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냉정했고, 그녀는 상심했다. 찰나의 따뜻함에 눈이 멀어 뱀처럼 차가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장서열은 참으로 팔자가 좋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 남자는 심지어 제왕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 자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장서열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장서열이 어려서부터 공을 들인 사람은 황제가 되었고, 장서열은 황후가 되었다. 이제 그녀가 과거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뻔했다는 말은 감히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인정할 수 없었지만 권여아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 역시 한때 거만함을 내려놓고 온 마음을 다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그가 일찍부터 마음의 문을 닫았던 걸까.’

    그러나 어떤 노력을 해도 구염락에게는 권여아가 보이지 않았다.

    비록 패배했으나 권여아는 그가 세운 황후에게 결코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았다. 그저 가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의 모든 영광을 빼앗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

    권여아는 황제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겉으로만 공손한 척했다는 걸 알았다. 그날, 고모는 그를 냉궁에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고모는 끝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연민을 건드렸고, 그렇게 결국 한 가닥 희망마저 날려 버렸다.

    ‘문안하러 오지 말라니 안 오면 되겠군.’

    이제부터 이 황궁은 장서열의 것이었다. 적수가 없는 날들은 오히려 지루하고 외로울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보는 삶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지 권여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권여아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거울처럼 맑은 지면이 옥기둥에 얹힌 지붕을 보여 주었다. 문득 후궁이 되어 입궁하던 날 처음 본 정심전이 떠올랐다. 이 모습은 처음 그날과 얼마나 비슷했던가. 그러나 지금 정심전은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문안인사를 마친 세 여인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한 달 후, 궁은 다시 시끌벅적해질 예정이었다. 황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누구든 입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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