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88)화 (288/449)

제288화

고개를 돌린 구염락은 자신과 함께 성단 위에 무릎을 꿇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마음 한편을 차지하던 불안이 그대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간단히 무릎을 꿇는 절과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절을 차례로 세 번씩 올렸다.

구염락은 다시 장서열의 손을 잡고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의 눈과 마음은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나의 서열. 온유하고 어진 서열. 언제나 여린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서열.

아내는 그와 영욕을 함께 할 목숨 같은 존재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시선을 느낀 장서열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두 번의 생애 동안 피할 수 없던 운명의 남자.

그녀의 운명이 너무 약했던 것인지, 혹은 그의 운명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돌고 돌아도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모든 게 변하지 않은 가운데 서로의 마음만 뒤바뀐 셈이었다. 애초부터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시 찾아온 선물과도 같았다.

장서열은 문득 자신의 적들을 떠올렸다. 남몰래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건 참으로 뻔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만약 자신이 그 불행한 이들 중 하나였다면 어땠을까. 그녀라면 아마도 당장이라도 관에서 튀어나와 원수의 목을 졸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구염락은 기쁜 눈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역시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답지?”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눈망울은 뜨거운 눈빛보다 더욱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아니요. 그저 폐하께서 옆에 계시니 마음이 놓일 뿐입니다.”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 그 말 한마디에 구염락은 지금까지 들인 모든 노력을 보상 받았다.

구염락이 홀린 듯 장서열의 손을 잡았다. 그가 벅찬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서열아.”

장서열도 구염락의 손을 맞잡았다. 전생에서는 어떻게 해도 얻을 수 없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순한 양이 된 건 다 자신이 한 발 먼저 환심을 산 덕분이라는걸.

이제 모든 건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녀가 계속해 사근사근하게 군다면, 또한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악처가 되지만 않는다면, 구염락은 계속해 자신을 아껴 줄 것이다.

예포禮炮가 울렸다. 아홉 발씩 아홉 번, 총 여든한 발을 발사하는 이 의식은 가장 존귀한 정실의 지위를 의미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구염락이 또 다른 여인과 책봉식을 거행한다 해도 결코 이 숫자는 넘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랫동안 평온한 날들을 보낸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엉망진창인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편, 서풍엽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경고의 음성을 들었다.

‘철저히 단념해야 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일국의 황후, 그리고 미래의 태자까지… 서열이가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녀가 괜찮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저린 걸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서풍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설마 아직도 그가 서열이를 쫓아내길 바라고 있는 걸까?

그러나 서풍엽은 알고 있었다. 구염락은 여태껏 인내하고 또 인내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힘들게 그녀를 얻은 만큼 그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짓 따위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서열은 가장 존귀한 지위에 올랐다. 이제 그녀의 미래에 서풍엽은 없었다.

서풍엽은 신하의 예를 다하여 무릎을 꿇었으나 차마 ‘황후’라는 두 글자는 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주변에 구염락이 심어둔 심복이 있을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여러 번 이를 시도하던 서풍엽은 결국 쓴웃음을 흘렸다.

‘됐다. 기껏해야 나를 연경에서 쫓아내는 것밖에 더 하겠는가.’

한편, 황후의 오라비가 된 장서전 역시 인파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곧게 세운 채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모습은 침착해 보였지만, 실은 누이동생에게 책봉식이 힘들지 않은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의 누이동생은 평소 벌을 받을 때에도 갖가지 방법으로 응석을 부리곤 했다. 오늘 같은 행사라면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 할 게 분명했다.

어린 누이동생이 이렇게 크다니. 장서전은 누이동생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아내와 딸의 평안과 어머니의 건강, 마지막으로 황후가 된 동생의 의지처가 될 수 있도록.

안타까운 것은 그에게 장서열 외 다른 형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부단히 노력하여 부인의 슬하에 적자들을 더 낳고, 가족 수를 늘리고자 했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황후 책봉식은 막을 내렸다. 장서열은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의복을 갈아입을 기운조차 없었다.

황후 책봉식은 오전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오후에는 귀부인들을 만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무거운 예복을 갈아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날인 건 분명했다. 하루 종일 거의 수십 근에 달하는 무게가 그녀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장서열은 거의 숨을 쉬지 못했다.

장서열은 대청 위 연탑軟榻에 올라 죽은 듯이 드러누웠다. 완정의 손을 잡아당긴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곧 강인한 손이 적당한 힘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주었다. 장서열은 숨을 내쉬었다. 편안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그대로 엎드려 있던 장서열이 나른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폐하… 언제 이렇게 좋은 재주를 익히셨어요…….”

완정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황후마마, 피곤해서 정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소명자小明子는 수예방手藝房에서 솜씨가 가장 좋은 공공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마마께서 고생하셨을 거라며 진 공공이 특별히 보내 왔습니다. 마마의 근육을 풀어드리라고요.”

“그랬구나.”

장서열은 부드럽게 말하며 긴장을 풀었다. 구염락이 아니라니 부담 없이 근육을 내버려 둘 기회였다. 누르는 힘이 부족하면 성질도 부릴 수 있었다.

잠시 후, 장서열은 몽롱한 눈을 감았다. 몸에 퍼지는 힘이 종일 쌓인 피로를 풀어 주자 방 안 가득 향기롭고 따뜻한 공기에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일순간 등에 느껴지던 힘이 바뀌었다. 순간 졸음이 싹 달아난 장서열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실력이 퇴보하셨어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황후께서 소인이 더 연습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요. 부인에게 버림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윤허합니다…….”

소명자를 데리고 물러난 완정이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가볍게 닫았다. 완정이 옆에 선 순종적이고 단정한 태감을 보며 불현듯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당신은… 삼색 모란을 심은 그 태감이죠?”

완정의 말투는 보기 드물게 의아함을 넘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당시 모란은 그녀가 발견한 것으로 모처럼 주인께서 좋아하셨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명정은 뜻밖에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자 몸을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송구스럽습니다.”

“어떻게 수예사手藝司로 옮긴 거죠? 원래는 어화원御花園에 있었잖아요. 이런 손재주도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때 그 삼색 모란은 정말 당신이 심은 거예요? 어쩌다 황후마마께서 싫어하게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예뻤어요.”

말을 마친 완정은 아름다운 꽃을 떠올리며 애석해했다. 그러나 황후마마께서 싫어하시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마마께서 이제 모란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요?”

명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말투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으나 고개를 숙인 탓에 이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다.

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어떻게 수예사로 가게 되었냐니까요? 그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명정의 안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선배들은 존경할 만한 솜씨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지요.”

완정은 그가 보통의 태감들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약삭빠른 느낌 없이 답답한 말투를 썼고,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첨에 능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앞의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는 거죠?”

명정은 달리 하고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완정은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했다.

“저는 본래 완세국浣洗局에 있었습니다. 제가 그럭저럭 일을 잘 해내자 대공공께서 제게 다른 재주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셨지요. 덕분에 오늘 운 좋게 황후마마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완정 아가씨, 제게 더 하실 말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완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명정은 몸을 굽혀 인사하고 떠났다.

반대편에서 차를 받쳐 든 농교가 걸어왔다. 그녀는 말수가 적은 완정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구야?”

고개를 내밀며 문 쪽을 두어 번 바라본 농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만 두었다.

“아는 사람이요.”

완정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태감은 보통 황후의 시중을 들 일이 없었다. 오늘은 책봉식 때문에 특별히 진 공공이 관례를 깬 것뿐, 어차피 그는 다시 볼일이 있는 자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완정은 왠지 그럭저럭 일을 잘해서 수예사로 옮겼다는 명정의 대답이 너무 성의 없게 느껴졌다. 각 소속의 대태감들에게 인정을 받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완세국이라면 더더욱 두각을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더는 입을 열지 않으니 그녀로서도 더 캐물을 수 없었다.

* * *

방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들보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진 비단 휘장은 연탑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부부를 외부와 단절시켜 주었다.

구염락의 손이 장서열의 목을 지나 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조금 전 태감이 남긴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태감 따위에게 질투를 하다니.

구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번 뼈저린 교훈을 얻은 후, 그는 태감에게 곤장 스무 대를 명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굳이 장서열의 기분을 불쾌하게 할 필요도, 자신의 매력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세상 모든 사내가 장서열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의심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원해?”

공을 가로챈 구염락은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장서열이 모든 의식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은 구염락은 그 즉시 공무를 제쳐 두고 조로전으로 달려왔다.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 첫날밤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