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87)화 (287/449)

제287화

권 노야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망한 현비에게 화가 났다. 분명 그 계집이 고의로 아들을 낙마시킨 것이다.

권서함은 쓴웃음이 나왔다. 어찌 아버지만 모르시는 걸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그조차도 스스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제가…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는 이 말을 고백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위엄 넘치던 권 노야의 몸이 순간 뻣뻣이 굳었다. 그는 아들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권서함은 마음속 깊숙이 감춰둔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제가…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잡아당겨서…….”

“닥치거라!”

고루한 학자인 권 노야는 절대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처럼 엄격한 예법을 숭상하는 아들이 절대로 그런 대역무도한 생각을 품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가문의 원수에게라면 더더욱!

권 노야는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못한 셈 치기로 했다.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 것이다. 너도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리거라!”

권서함은 아버지를 향해 웃어 보이다 문득 상처에 통증을 느끼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모습에 권 노야는 긴장을 풀었다.

서함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제 아들이 제멋대로 행동할 리 없었다. 현비 또한 줄곧 궁 안에 머무르니 더 이상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아들은 기본적으로 비윤리적인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쉬거라. 다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권 노야는 누워 있는 아들을 노려보며 몸을 돌리려다 문득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경고하듯 권서함을 쳐다보았다.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다. 범 각로范閣老의 작은딸이 현명하고 정숙한 데다 네 어머니도 동의하였으니, 곧 날을 정해 혼례를 올리도록 하자.”

“아버지……!”

권 노야는 못 들은 척 화가 난 채로 자리를 떠났다.

권서함은 괴로웠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사촌형 구염단신의 부인이 바로 범 각로의 큰딸 범억아였다. 그런데 그녀의 동생에게 장가를 들라니!

아버지께서 마음대로 혼처를 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게 범씨 가문일 수는 없었다.

권서함은 단조로운 침대 장식을 바라보며 언제나 평온한 장서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번뇌가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권서함은 괴로웠다. 하필 오래도록 사모하던 여인을 만난 뒤 혼인이라니. 그는 기회를 보아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기로 했다. 혼사는 급할 것이 없지 않은가. 우선은 이 상황을 넘기는 게 먼저였다.

한편, 권씨 가문을 나온 현천기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현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권서함에게 너무나 묻고 싶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이 불지만 않았다먼 더 많은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참고 있는 권서함을 보니 아무리 뒤틀린 마음을 가진 그조차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천기도 나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권서함이 충분히 회복되길 기다린 후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기회는 많을 테니까.

* * *

저녁 무렵 가을바람이 불었다. 대지 위, 우뚝 솟은 붉은 기와가 넓게 펼쳐졌다.

궁으로 돌아온 장서열은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셨다. 유모에게서 아이를 받아든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이 어미가 보고 싶었지? 어미는 황아가 너무 보고 싶었단다. 다음에는 우리 아드님도 꼭 데리고 나가야지. 푸른 강산과 향기로운 과수나무를 보면 황아도 즐거워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장서열이 황아의 코를 비비자 아이가 즉시 깔깔대는 소리를 냈다. 동그란 눈을 뜬 아이가 마르고 작은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황아의 작은 코를 눌렀다.

“귀여운 녀석.”

황아는 아직 건강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걱정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이는 또래에 비해 적게 먹고 조금 더디 자랐다.

체력이 약해 문밖을 나가 본 적이 없는 황아를 누구도 감히 데리고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는 사 개월 내내 일정한 온도와 옷의 무늬 하나조차 바뀌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꼬물꼬물 조그만 아이가 미약하게나마 성장하는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장서열을 더욱 기쁘게 해 주었다.

한편에 선 구염락은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를 어를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장서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씁쓸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장서열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곳은 그의 침소였다. 보다 못한 장서열이 어린 황아의 손을 들어 구염락을 향해 인사했다.

“부황께서 저기 계시는구나. 이 어미처럼 너를 많이 사랑하시지. 하지만 부황은 천하를 다스리느라 매우 바쁘시니, 이 다음에 커서 부황을 귀찮게 굴면 아니 된다. 알았지?”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구염락이 안도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아는 장래에 이 아비의 곁에서 국정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분명 경천근민敬天勤民(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하는 좋은 태자가 되겠지.”

고개를 숙인 장서열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아들의 입에 흐른 침방울을 보면서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들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꿈처럼 나긋했다.

“하지만 황제의 아들이라고 나쁜 버릇이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눈썹이 부드럽게 휘는 걸 보며 구염락은 마침내 마음에 얹어진 돌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어딘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긴 했으나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일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물론 그도 아무 이유 없이 넘겨짚은 건 아니었다. 권서함이 장서열을 보호하자 그의 기억 저편에서 한때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낸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을 뿐 결코 심각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는 용서해 주었다.

구염락은 두 팔을 벌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일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장서열이 화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감격스러웠다. 만약 그녀가 모른 척했다면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과연 그의 서열은 달랐다. 그녀야말로 구염락을 가장 자상하게 돌봐 주는 사람이었다.

구염락은 앞으로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녀에게 더욱 잘해 주리라 다짐했다.

“상의국尙衣局에서 황후 책봉식에 입을 예복을 완성했다더군. 지금 보러 가겠어?”

구염락은 여전히 장서열의 품에 안긴 황아를 바라볼 뿐,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어려워하는 모습을 들킬까 두려웠다.

하지만 장서열은 구염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른이 아이보다 귀여울 리 없었다. 그녀가 아이에게 장난을 치며 말했다.

“내일 다시 얘기해요. 방금 황아가 저를 만지려 하는 거 보셨어요? 보세요, 손을 뻗었어요.”

장서열이 웃자 구염락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그제야 오늘 발생한 앙금이 두 사람 사이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권서함이 회복되고 나면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으리라.

기뻐하는 장서열을 보며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내일 권씨 가문에 태의 몇 명을 더 보낼 거야. 너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야. 하사품도 아끼지 않을 거고… 미안해.”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됐어요.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시다니요. 바쁘시죠? 하루 종일 저를 데리고 다니느라 많은 일이 지체되었을 거예요. 가서 일 보세요. 바쁘지 않으면 좀 쉬시고요.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니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아요.”

구염락이 장서열을 더욱 꽉 껴안았다.

“그러면 마음이 아파?”

“그럼요. 아드님도 마음이 아프답니다.”

* * *

눈 깜짝할 사이 보름이 흘렀다. 황후 책봉식 당일은 자시子時(밤 11시~ 새벽 1시)부터 분주했다. 길일이 되자 현비는 융복을 차려입고 햇살 속에서 가마에 올라타 황실의 종묘로 향했다.

두 번째 책봉식이었으나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번 황후 책봉식은 과거에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를 위해 직접 준비한 예식이었다. 구염락은 책봉식이 거행되는 순서부터 예복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장서열보다 더욱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린 그였다.

장서열은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서 그녀가 기울인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장서열은 우뚝 솟은 조사祖祠(제사를 지내거나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위로 든 그녀가 큰절을 했다. 목숨을 걸고 영광을 지킨 선조들의 이름을 바라보자 긴장했던 마음이 평안해졌다.

장서열은 결코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었다. 비록 전생에서 한스러운 일이 적지 않았으나 또 한 번의 생을 살게 된 이상, 과거의 해묵은 감정은 버리고 조용한 일생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장서열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텅 빈 종묘에, 지난 생에 종묘사직에 들지 못했던 아쉬움에, 그리고 그럭저럭 걱정이 없는 이번 생에 무릎을 꿇었다.

“기립! 첨향!”

다시 일어선 장서열은 봉관鳳冠(황후가 머리에 썼던 봉황 모양의 장식이 드리워진 관)과 예복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은 자못 장중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진 공공의 손에서 공손히 향을 받아 향불이 꺼지지 않은 제단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어 빠르게 뒤로 세 걸음 물러난 그녀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천세를 외치는 군신들의 소리를 넘어 고조告祖 예식이 진행되었다.

장서열은 높은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차가운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띤 그는 풍채가 좋고 위풍당당했다. 용포를 입은 그는 그녀가 몸을 맡길 수 있도록 단단한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서열은 군신들을 등진 채 높은 단 위로 한 걸음씩 올랐다. 마침내 그와 나란히 선 그녀가 단단하고 따뜻한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녀는 그제야 힘든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안정적으로 기댈 수 있도록 그녀를 받쳐 주었다. 하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틈을 타 그가 자상하게 위로하며 말했다.

“피곤하지? 조금만 더 참으면 끝날 거야. 돌아가면 짐이 목욕을 시켜 줄게.”

구염락은 장서열의 손을 꼭 쥐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솜뭉치 같았다.

화려한 복식을 차려입은 장서열은 아홉 마리의 봉황이 달린 봉관을 쓰고 있었다. 구염락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는 그가 이제껏 바라 마지않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자신의 황후에게는 역시 이토록 화려한 차림이 어울렸다.

“꿇으십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광대한 토지를 울렸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