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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86)화 (286/449)

제286화

권서함은 온몸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권서함을 보며 태의와 의원들 모두가 무거운 기색을 내비쳤다.

관몽득은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절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말에도, 마장에도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비마마가 낙마를 하다니!

태의와 의원들은 모두 권서함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는 송 태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를 본 구염락이 버럭 노하며 소리쳤다.

“다들 눈이 먼 것이냐? 현비 역시 놀라질 않았느냐!”

놀란 송 태의는 옆 의원에게 몇 마디를 분부한 후 서둘러 황제에게 기어갔다. 그가 장서열 옆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마마, 소신이 진맥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시지요.”

큰일이 난 쪽은 분명 권서함이었다. 장서열은 괜찮았지만 구염락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더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요량으로 송 태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서열의 시선에 구염락은 분노한 눈길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대체 왜 같이 떨어진 거지? 말하지 않겠다는 건 또 뭐고?’

장서열과 권서함은 분명 아무 관계가 아니었지만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고 있다기엔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았다.

커다란 압박 속에서 진맥을 마친 송 태의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마마께서는 놀라셨지만 다행히 무탈하십니다.”

‘놀랐다……?’

구염락은 가소로웠다. 다치지 않은 걸 저렇게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리라. 아무래도 권서함은 사랑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빈틈없이 그녀를 지켜 내다니 상이라도 내려야 할 판이 아닌가.

송 태의는 황제의 표정이 풀어지길 기다렸지만 오히려 공기가 더 무거워지자 당황했다.

‘설마 마마께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시는 건 아닐 텐데…….’

장서열은 송 태의에게 이만 권서함을 살펴보라고 지시하며 의원들이 몰려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곁에 있는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은 그가 권서함을 향해 일말의 걱정도 표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불현듯 조금 전 권서함이 집요하게 자신의 손을 쥐었던 것이 이해되었다.

구염락 같은 제왕 앞에서는 고귀한 신분도 쓸모가 없었다. 장서열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토록 불쾌해 하는 이유는 자신이 설명하길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다소 억지스러운 그의 고집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아무렇지 않아 했다면 그녀 쪽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 그 말이 언짢으세요?”

장서열은 차분했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도, 그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자 할 뿐이었다.

구염락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가울 정도로 차분한 그녀를 보며 그는 자신이 허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두 남녀는 사실상 그간 마주칠 일도 없었다.

장서열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권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초혜전 시절 신첩은 권 한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요. 폐하께서 완강하시니 저에게 간청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권 한림은 오라비로서 누이동생을 위해 방법을 찾고 싶어 하였으나 신첩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떠나려 하자 권 한림이 저를 다급하게 쫓아왔고, 그때 제 옷에 달린 끈이 권 한림의 안장에 걸려 사고가 난 것입니다.”

“…….”

“권 한림은 누이동생을 위해 인정에 호소한 사실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제가 낙마했다면 폐하께서 권비를 더욱 싫어하게 될 테니 비밀에 붙여 주길 바랐고요.”

구염락은 마음 속 불안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지 않았는가.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해가 풀린 구염락이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동작을 취했을 때였다. 장서열이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신첩은 피곤하여 먼저 돌아가 쉬고자 합니다. 폐하께서는 신첩을 대신하여 또 한 번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고 권 한림에게 전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장서열은 가까운 곳에 있던 혜령을 불렀다.

“기분 상했구나. 고의는 아니었어. 다만… 권서함이 너를 안고 있는 모습에 순간 화가 났을 뿐이야.”

그렇다고 그렇게 몰아붙이다니. 구염락은 마치 그녀와 권서함이 부적절한 관계라도 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제멋대로인 줄 알아?’

장서열은 구염락이 서풍엽을 의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연인에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서로 체면을 깎아먹지 않는 한 구염락의 여자로서, 아이의 어미로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권서함을 두고 화를 낸 건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서풍엽과 정혼한 몸으로 권서함까지 만난 것이 된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생각이 많으셨군요. 신첩, 오랜만에 외출한 데다 갑자기 운동을 한 탓인지 머리가 좀 어지럽습니다. 먼저 물러가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덤덤한 얼굴로 차분히 말하는 그녀를 보며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바래다줄게.”

“그것도 좋지요.”

어차피 거절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구염락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선을 지켜야 할 남자.

지금은 자신이 불쾌하다는 걸 알린 것만으로 충분했다. 기어코 구염락에게 잘못을 시인하게 하여 관계를 틀어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봐야 두 사람 모두 체면이 구기는 것 외에 무슨 장점이 있겠는가.

“우선 권 한림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어찌 되었든 그가 신첩을 구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구염락은 두말없이 송 태의를 향해 걸어갔다. 송 태의의 답은 예상대로였다. 권서함은 여러 곳이 부러진 상태였다.

장서열은 인파를 뚫고 겹겹의 판자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권서함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다 순식간에 멀어졌다. 장서열 역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현천기는 전율했다. 장서열은 진실로 행복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소문처럼 그렇게 제멋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황제는 난다 긴다 하는 우락부락한 무장들조차 감히 어쩌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토록 가냘픈 장서열은 달랐다.

실제로 장서열은 자신의 삶이 나쁘거나 가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저 우연한 사고가 있었을 뿐, 평소 궁에서 아이를 돌보고 남편의 시중을 드느라 바쁜 그녀에게 이런 희한한 일이 벌어질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만한 일은 비빈들 간 총애 다툼뿐이었다. 그때가 되면 구염락은 성질은커녕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앞둔 장서열에게 결코 삶이 비관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구염락과의 관계만 놓고 봤을 때, 과연 이 세상에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장서열은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궁에 있는 비빈들 중 가장 마음이 편한 것도 그녀였다. 따라서 그녀는 굳이 구염락과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구태여 감정을 뒤엉키게 할 필요도, 평온을 깰 필요도 없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기쁘게 하기 위해 송 태의에게 며칠간 권씨 가문에 머물며 권서함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분부했다. 또한 현비의 목숨을 구한 공을 치하하여 곤장 오십 대를 면해 주었고, 상처가 다 나은 뒤 조정에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권서함은 있는 힘을 다해 고통을 견뎠다. 그는 계속해 씁쓸한 웃음을 참았다.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쩌자고 그녀를 잡아당겼단 말인가. 귀신에 홀렸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장서열은 더 지체하지 않고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황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코웃음을 쳤다.

“흥! 현비가 그리 대단한가? 총애를 믿고 교만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군. 권 대인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폐하를 모시고 그냥 쌩하니 가? 양심도 없지!”

황제 내외가 떠나는 모습을 평온한 얼굴로 지켜보던 관몽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투실투실한 몸에서 폭발적인 힘이 솟구쳤다.

관몽득에게 차인 자가 저 멀리 바위 위로 날아갔다.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자를 노려본 뒤 곧 몸을 돌려 떠났다.

권서함은 송 태의와 의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뒤를 따르는 당자 일행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 * *

권 노야는 대노했다. 벌써 두 번째가 아닌가. 장서열은 그야말로 화근덩어리였다.

“어리석은 녀석! 어찌하여 피할 줄도 모르는 게야! 도대체 장서열은……!”

권 노야는 차마 ‘화근’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들의 시선을 느낀 권 노야는 즉시 노기를 거두고 학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권 노야는 아무 말이나 막 뱉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장서열과 같은 황실 사람과 자꾸 엮이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조카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까지 그 요망한 계집 때문에 이리 다쳐서 돌아오다니. 제아무리 교양 있는 권 노야라 한들 참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분노한 아버지를 보며 권서함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자신과 동행한 당자와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네 사람은 황급히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권 노야의 발언을 떠벌릴 사람들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행이 떠나는 걸 확인한 권서함은 수척해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문이 또 한 번 위기를 맞았으니 아버지가 느끼는 압박감은 결코 자신보다 덜하지 않을 터였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현비마마를 오해하셨습니다. 오늘 일은 제가 멋대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기마를 겨루던 중 현비마마가 저를 앞서자 요 며칠 상심하신 아버지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녀를 낙마시키려 했습니다.”

권 노야는 믿지 않았다.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권 노야는 여전히 아들을 노려보는 눈을 풀지 않았다.

“그럼 그 계집이 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 내 아들이 일을 벌이면서 실수라도 했단 말이냐?”

권서함은 부끄러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떨어져 죽어야 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랬다면 그 순간 떠오른 추잡한 생각들도 마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평생 성인군자인 양 잘난 척을 해 놓고 그런 생각을 품다니…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다니! 이것이야말로 학자를 욕보이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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