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바람에서 어렴풋이 계화향이 밀려왔다.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는 걸 안 권서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아에게 왜 그러셨습니까? 고작 여인 하나인데… 태의도 불러 주지 않다니요. 한 번이라도 여아의 처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휙휙 지나가는 바람소리 사이로 권서함의 말이 그녀의 귀에 꽂혔다. 장서열은 막 앞지르려던 몸을 잠시 멈추고 그와 나란히 달리며 말했다.
“권비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군요. 권비는 그저 손을 쓸 시간을 놓쳤을 뿐입니다. 그때 본궁이 한 발만 늦었어도 권비는 황제를 미혹시켰다는 이유로 내게 죄를 물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본궁의 처지는 어찌 되었을까요? 권 대인은 대체 무슨 까닭으로 본궁을 원망하는 겁니까?”
장서열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권여아가 꾸민 일은 그저 간신히 묻힌 것뿐이었다.
당시 구염락은 입궁한 두 후궁을 무려 한 달 동안이나 냉대했다. 새 후궁들이 총애를 받지 못하자 그 화살은 자연스레 황제의 총비에게로 향했다. 그날, 구염락은 명목상 현비가 벌인 소란을 해결하기 위해 정심전靜心殿에서 점심을 먹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그렇다고 권여아가 꾸민 계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시 그녀가 장서열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와 원사怨詞(원망하는 글)가 버젓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쓰이지 않았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장서열은 황아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권여아와 끝까지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권비는 황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 반격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권 대인께서도 ‘황제를 미혹시켰다’는 죄명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지 않겠지요. 물론 본궁은 그런 소문에 개의치 않습니다. 허나 살아남기 위해 그런 꼬리표를 남길 수는 없지요!”
바람에 장서열의 옷자락에서 날린 명주 끈 한 가닥이 권서함의 손목 위로 떨어졌다. 전혀 후회하는 기색이 없는 냉랭한 얼굴에 권서함은 차마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그녀를 공격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가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정말로 폐하를 미혹시킨 적이 없으십니까.”
조정에서는 이미 보름 후에 있을 황후 책봉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비는 명실공히 으뜸으로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을 뿐더러 심지어 그녀 외에는 누구도 황제의 여인이 되지 못했다. 권서함은 정말로 그녀가 황제를 미혹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장서열이 비꼬듯 웃었다. 그녀는 시덥잖은 소문에도, 이기려고 기를 쓰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권비의 오라비가 트집을 잡고 늘어지는 일에 신경을 쓸 리 만무했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본궁은 한낱 후궁일 뿐입니다. 폐하께서 누구를 총애하시든 본궁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지요. 설령 본궁이 폐하께 그만한 영향력이 있다 해도 제가 그리 지각없이 행동할 여인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그저 권 한림께서 그렇게 보고 싶은 것입니다. 현비는 그리 대역무도한 사람이라고!”
권서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아가… 송구합니다. 제가 내명부의 일에 관여하려 했군요…….”
권서함은 서둘러 사과를 건넨 후 빠른 속도로 장서열과 나란히 말을 달렸다. 내명부에는 내명부만의 법도가 있다. 후궁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한 사람만 탓할 수는 없었다.
더 말을 잇지 못하던 권서함은 문득 자신의 손목 위에 나부끼는 명주 끈을 바라보았다. 말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려는 장서열을 보던 그의 머릿속에 순간 어두운 상상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속도가 빨라지면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권서함이 무심결에 손안의 명주실을 꽉 쥐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 끈이 장서열의 몸을 온전히 한 바퀴 두르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장서열의 몸이 갑작스레 뒤로 젖혀졌다. 손에 쥐고 있던 고삐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뒤로 붕 떠올랐다.
“아!”
권서함은 멍해졌다.
‘아니야, 나는 그저……!’
“현비마마!”
구염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장면은 일순간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간 질주하던 말의 고삐를 늦춘 그가 미친 사람처럼 장서열에게 달려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서열아!”
그대로 뒤로 넘어간 장서열의 몸이 권서함을 향해 돌진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은 그는 말에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 오는 그녀를 끌어안고 눈 깜짝할 사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오던 찰나, 권서함은 오늘처럼 과거 말에서 떨어지던 그녀를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마음을 파고들던 어두운 생각이 일시에 사라졌다. 권서함은 장서열을 꼭 안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보호했다.
“죄송합니다……!”
“윽!”
권서함의 등이 땅에 떨어졌다. 관성에 의해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뒤로 굴렀다.
뒤따르던 현천기는 황급히 말고삐를 바짝 조이며 말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힘을 받은 탓에 말이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고, 이는 정확히 장서열의 얼굴 위를 향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말굽에 찍힐 게 분명했다.
장서열이 막 피하려 할 때였다. 그보다 한 발 앞선 권서함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그가 빠르게 장서열을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그는 말굽이 닿지 않을 만한 거리로 이동해 위에서 그녀를 보호했다.
“권 대인!”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장서열이 움직이자 권서함은 더욱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놀란 그녀는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괜찮아요? 많이 안 좋아요?”
장서열은 손등 위로 식은땀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권서함의 관자놀이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듯이 달려온 구염락이 장서열을 누르고 있는 권서함을 빠르게 밀어냈다. 그가 놀란 얼굴로 장서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곳은? 태의! 당장 태의를 불러라! 만에 하나 현비가 잘못되면 너희 모두의 가문을 멸할 것이다!”
장서열이 신음소리를 내는 권서함 쪽을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어서 권 대인에게 가 보세요. 그가 다쳤습니다.”
다행히 장서열은 찰과상만 입었을 뿐 불편한 곳이 없었다. 그녀는 맨몸으로 자신을 받아낸 권서함을 떠올리며 혹 그가 근육이나 뼈를 다치지 않았을지 염려했다.
권서함 쪽으로 다가가려는 그녀를 구염락이 다급히 붙잡았다. 조금 전 목격한 권서함의 단호한 표정과 장서열의 안위가 그를 불안하게 했다. 다행히 그녀는 괜찮은 듯했다.
“움직이지 마. 다쳤으면 어쩌려고. 내가 가 볼게.”
조금 전 구염락이 밀치는 바람에 권서함은 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장서열은 구염락의 뒤를 따라 권서함에게 다가갔다.
“좀 어떤…….”
입을 연 장서열이 기이하게 구부러진 권서함의 팔뚝에 손을 대려는 찰나, 갑자기 차디찬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서열은 꿋꿋한 시선으로 권서함을 주시했다. 그는 괴로움과 미안함,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막 권서함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구염락은 그 모습에 즉시 그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위험에 빠진 부인을 구한 공이 있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구염락은 장서열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서 태의를 부르세요!”
이어 장서열은 자신을 응시하는 권서함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심해요. 말하지 않을게요.”
권서함의 눈에 감격과 함께 옅은 씁쓸함이 비쳤다. 그는 장서열의 손을 놓고 고통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눈빛은 어둡고 차가웠다. 태의가 오자 장서열은 편히 살펴보도록 구염락을 잡아끌었다.
황제의 낯빛에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건 현천기뿐이었다.
‘대체 권서함이 장서열에게 뭐라고 한 거지? 왜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권서함이 장서열을 구했는데 폐하는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설마…….’
당자와 헌원가가 말을 버리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권 대인은 괜찮나요? 현비마마는요?”
곧이어 달려온 헌원상도 거친 숨을 내쉬며 누이의 뒤에 섰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황제를 잡아끌던 현비를 보았다. 현비의 눈빛은 평온했지만 바닥에 누워 있는 권서함을 볼 때는 약간 초조해 보였다.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말에서 떨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입 밖에 낸다면, 과거 태후의 소행에 오늘 권서함의 행동까지 더해져 권씨 가문은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정말로 권서함이 고의로 나를 해치려 한 걸까?’
장서열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할 때 권서함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고의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권서함은 권비의 구명을 위해 손수 나선 것일까. 장서열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가 또 한 번 자신을 구한 것은 사실이니 굳이 이번 일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아무도 권씨 가문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권서함은 거의 혼절해 있었다. 장서열은 평소 온화하고 우아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의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간 보아 온 됨됨이로 보아도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비를 많이 아낀다고 하던데…….’
장서열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구하던 순간 망설임이 없던 그 행동을 믿기로 했다.
뒤에 예닐곱 명의 의원을 거느린 관몽득이 투실투실한 몸을 이끌고 달려왔다. 그는 오금이 저리는 걸 느끼며 비처럼 흐르는 땀을 닦았다.
‘어찌 또 권 대인에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이번엔 또 어떻게 수습하라고!’
“어서 가서 거들지 않고 뭣들 하고 서 있는 게야! 혹시라도 권 대인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다들 가만 두지 않겠다!”
현천기는 권서함에게 다가서는 당자 일행을 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이유를 귀띔해 주었다. 먼저 황제의 기분이 확실히 좋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다음으로는 권서함의 상처를 보느라 바쁜 태의들이 질문에 답해 줄 시간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았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는 황제의 안색을 주시하며 현천기는 처음으로 기마에 능숙하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불똥이 튈 일은 없을 것이다.
권서함에게 시선을 돌린 현천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체 간이 얼마나 크길래 현비를 건드렸단 말인가. 그것도 바로 황제의 눈앞에서! 그는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