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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84)화 (284/449)

제284화

헌원가는 말로 다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권서함과 경주를 하다니! 누구에게나 이런 영광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권서함은 언제나 스스로를 문인이라 자처했기에 그의 기마 실력은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직접 확인한 사람은 드물었다.

헌원가가 변변치 못한 남동생을 잡아당기며 간곡하게 일렀다.

“정신 차려야지. 폐하가 아무리 무서운 분이라 한들 너를 잡아먹기야 하시겠니? 그리고 한 가지 네가 알아야 하는 게 있는데…….”

곁눈질로 주변을 힐끗 둘러 본 헌원가가 동생의 귓가에 속삭였다.

“옛날에 폐하는 지금의 너보다 훨씬 더 볼품없었어.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을 봐. 당당한 이 나라의 제왕이잖아. 너도 자신감을 가지렴. 상이 너는 최고야.”

“…….”

“권 대인을 잘 봐. 이따가 그가 어떻게 달리는지 눈여겨보도록 해. 권 대인은 문무를 겸비했으니 배워 두면 좋은 점이 많을 거야. 알았지?”

헌원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착하고 순종적인 동생이었다. 헌원가는 영광으로 여기라는 듯 남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스스로 자랐다는 걸 깨닫게 해야 했으므로 그녀는 이제 부쩍 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았다.

여섯 명은 잠시 자신들이 고른 말과 시간을 보냈다. 이들을 바라보던 관몽득은 문득 조금 전 1등을 한 4번 말을 고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지?’

양마사養馬師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여섯 필의 말이 출발선에 서자 한쪽에 서 있던 관몽득이 갑자기 소심하게 외쳤다.

“마마, 힘내십시오! 꼭 1등을 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관몽득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중에서도 당자의 웃음소리가 가장 컸다.

“청산지주께서 편애를 하는군. 어찌 이 몸에게는 덕담을 해 주지 않는 것이지?”

당자의 말에 관몽득은 공처럼 둥그런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두 번이나 당자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에 한스러워 하며 성의껏 충성심을 표현했다.

“당 대인께서는 이미 기마술이 훌륭하시니 소인이 감히 입방정을 떨 수 없지요!”

“허면 현비마마는 기마술이 훌륭하지 않아 자네의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놀란 관몽득이 털썩 땅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장서열이 당자를 돌아보았다.

“당 대인, 그만 놀리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가 청산지주를 향해 자신감 넘치게 웃어 보였다.

“자네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네. 청산지주께서 억울하지 않도록 본궁이 반드시 본때를 보여 주지!”

현비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잠시, 관몽득은 갑자기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감지하고 다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편으로는 황당한 기분이었다.

‘이 몸이 다 늙어 무슨 불순한 생각을 한다고 저러신단 말인가. 이 정도 대화도 용납이 안 된다면 현비마마와 친분이 있는 남자들은 아예 죽으라는 말이구나!’

즉시 입을 다문 관몽득은 얌전하게 구석으로 이동해 눈물을 훔쳤다. 역시 이 귀족들은 굳이 모셔서 좋을 게 없었다.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나이 많은 어른을 놀라게 만들기나 할 뿐!

‘왜 이렇게 운이 없을꼬!’

한편, 경주로 밖에는 많은 조련사들이 몰려와 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집에서 쉬다가 달려 나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귓속말로 속삭이며 실로 오랜만에 나타난 장씨 가문 아가씨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헌원가의 낙마 사건이 벌어진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청산을 통째로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장씨 아가씨의 기마술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과연 현비의 실력이 얼마나 후퇴했을지, 혹은 과거의 기량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를 두고 추측하기에 바빴다. 물론 황제의 기마술을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벌써 여러 차례 친히 전쟁에 출정했던 그가 어찌 평범한 무리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권서함의 기마술 역시 관전의 묘미 중 하나였다. 유일하게 관심이 시들한 건 당씨 가문의 부부뿐이었다. 이들 부부의 기마술은 익히 알려져 있었기에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회색 옷을 입은 소년은 누구지? 심부름꾼처럼 보이는데, 권 대인의 시종인가?’

‘어찌 되었든 난 폐하께서 이기는 걸 지켜볼 거야!’

징과 북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말 여섯 필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섯 명 모두가 이번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권서함이 앞서 나갔다. 하지만 첫 번째 장애물을 넘을 때 구염락이 그를 추월했고, 장서열 역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장애물 경주는 그녀의 특기로, 이 종목에서만큼은 그녀를 이길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장서열은 자신했다.

몸을 숙인 권서함이 순간적으로 말의 배를 눌렀다. 놀란 말이 사타구니 밑에서 펄쩍 뛰어오르자 그는 장서열과 머리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권서함을 본 장서열은 잠시 멈추는 듯 갑자기 손을 왼쪽으로 당겼다. 그녀는 이 작은 기술 하나로 경주로를 질주하는 순간 권서함을 추월하여 구염락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과 나란히 선 장서열을 보는 순간 구염락은 잠시 멍해졌다. 천하에 그를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장서열은 꼬박 이 년간 말을 만지지 못했고, 과거 초혜전에서도 말을 타고 한 바퀴 도는 정도였을 뿐 크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구염락이 얼떨떨해하는 틈을 타 장서열은 다시 반 마신半馬身가량 그를 추월했다. 다음은 장애물을 연속해 넘는 것으로, 그녀는 특히 이 분야에 정통했다. 말고삐를 한 번 흔든 그녀는 앞발이 정확하게 도약 지점에 떨어지도록 했다. 물 흐르듯 거침없이 앞서 나간 그녀는 순식간에 구염락의 말을 두 마신만큼 떼어놓았다.

권서함이 구염락과 머리를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그들이 영원히 좇고 있는 여인을 향해 맹렬히 질주했다.

이를 바라보는 현천기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했다. 그는 정탐꾼이었기에 평소 기마의 중요성을 느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상한 사람들과 대결을 벌이는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헌원상과 함께 빠져나와 한쪽에서 구경만 했을 것이다.

당자와 헌원가의 실력은 모두 훌륭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마술에 조예가 깊었던 헌원가는 결코 당자보다 실력이 뒤처진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건 이 나라의 영웅들이었기에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약점이 드러났다. 네 번째 장애물을 넘을 때 헌원가는 이미 선두권에 선 이들과 일곱 마신 정도 뒤처져 있었고, 심지어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당자는 현천기를 뒤쫓으며 달렸다. 현천기는 모든 것에 능했으나 어떤 것도 뛰어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마음껏 기마를 단련한 당자에게 현천기는 거의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7번 말은 가장 앞서 달리며 연속 장애물 넘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장서열이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이번 단계가 관건이었다. 마치 신의 가호를 받은 듯 우아한 도약과 함께 그녀는 선두를 지켰다. 정확한 착지에는 일말의 오차도 없었다.

권서함은 정확한 간격을 살피며 구염락을 앞질러 장서열을 쫓았다. 하지만 잠시 후 또 다시 추월당했다.

구경꾼들은 권서함의 실력과 현비의 녹슬지 않은 기량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재밌는 걸 꼽자면 단연 8번과 6번의 경쟁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죽인 구경꾼들은 두 말에 시선을 고정했다. 놀라울 정도로 좁은 빈틈을 파고드는 두 사람의 경쟁은 거의 묘기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실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7번 말은 속도 조절이 아주 정교했다. 장서열은 마치 끊어지지 않는 선, 혹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우아했다. 하지만 적수가 없던 탓에 기량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말의 속도와 주인의 조절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한 바퀴를 돈 뒤 다음 차례가 시작되었을 때 구염락이 권서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튀었다. 위풍당당한 모습 속 장서열을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은 어수선하고 복잡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반 마신의 거리를 벌렸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단숨에 7번과 8번을 향했다. 치열한 경쟁자가 등장하자 7번이 보여 주는 속도와 완벽함이 도드라졌다. 감각을 되찾은 8번 역시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쉼 없이 7번을 바짝 뒤쫓았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패하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변명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았다. 오래도록 말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여인조차 이기지 못하면서 어찌 정복을 논하겠는가!

하지만 구염락은 한편으로 장서열의 근성에 갈채를 보냈다. 거리낌 없이 승리를 위해 달리는 성정이라니. 그는 그녀가 누구의 여인인지 만천하에 알려 주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청산의 하얀 구름 사이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비록 오랫동안 말을 가까이하지는 못 했으나 그간 틈틈이 몸을 단련해 온 장서열은 말 위에서 감각을 찾은 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전과 같은 수준을 회복했다.

장서열은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구염락의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칫 한눈을 판다면, 조금만 삐끗한다면 구염락은 가차 없이 바로 그녀를 앞지를 것이다.

딱히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만에 거칠 것 없는 시원한 느낌이 장서열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그녀는 이 자유로운 느낌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랐기에 더 완벽한 실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권서함은 장서열이 정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려 삼 년을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산에 놀라운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계화 향기가 날리는 산 속은 온통 그녀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권서함은 그녀의 뜻대로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그녀가 어찌 다시 잔잔한 물을 휘저으려 하는가.

권서함은 기를 쓰고 달렸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설령 황제가 1등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가 1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서열이 갑자기 고삐를 풀자 말이 빠른 속도로 뛰어올라 착지점에서 살짝 벗어났다. 동시에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고삐를 당긴 후 과감하게 속도를 줄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은 권서함이 장서열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 순간 구염락은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두 마신가량 추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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