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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83)화 (283/449)
  • 제283화

    구염락 역시 풍경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리가 하도 요란한 통에 잔잔한 바닷바람을 즐길 수가 없었다. 결국 구염락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몇 개나 걸어 놓은 것이냐?”

    헌원가가 즉시 대답했다.

    “예, 폐하. 여섯 개입니다. 운수대통을 위해 걸어 두었습니다.”

    구염락은 동정 어린 눈길로 당자를 쳐다보았으나 당자는 너무나 듣기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건 부인의 마음이 담긴 소리였고, 그녀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당자는 그중 가장 큰 풍경을 뱃머리의 난간 위에 걸어 두었다. 오래오래 평안하자는 뜻에서였다.

    풍경은 바닷바람과 함께 천연의 음악을 연주했다. 웬만한 악기보다도 맑고 아름다운 소리는 장서열의 마음에도 꼭 들었다.

    “소리가 아주 특별하구나. 궁에도 하나 보내 줄래? 조석궁에 걸어 두면 폐하께서 피곤하실 때 기분 전환이 될 거야.”

    현천기의 시선이 즉시 황제에게로 향했다. 미간을 찌푸린 황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마지못해 동의를 했다.

    관몽득은 일찍부터 투실투실한 몸을 이끌고 청산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곧 도착할 거물을 맞이하기 위해 삼대천을 깨끗이 정리했고, 혹시라도 지난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모든 길들을 살펴 황제의 안전을 확보했다.

    권서함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황제가 나타났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손을 피해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그런 그녀를 구염락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쾌청한 구름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현천기는 남몰래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의 저런 얼굴은 너무나 생소했다.

    마치 기분을 맞춰주려는 듯 장서열이 다시 구염락의 팔짱을 끼며 웃어 보였다.

    “이렇게 뛰어본 지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것이니 옹졸하게 구시면 안 됩니다. 폐하와 멀어질 수 없어서 이렇게 바로 따라 왔잖아요.”

    장서열은 잠시 구염락의 어깨에 기댔다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단정한 자세로 그의 팔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조금 전 구염락이 어째서 짜증을 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살가운 태도를 보인다면 종잡을 수 없는 그의 기분도 달라질 것이다.

    고개를 들자 광활한 삼대천에 말들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조련사의 지시를 받은 준마들이 장애물을 넘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이를 본 당자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무장으로 어렸을 때부터 명마들을 좋아했다. 심지어 말을 보는 눈빛과 헌원가를 보는 눈빛에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청산지주께서 여기 이렇게 좋은 말을 숨기고 계셨군요! 폐하께서 오셨다고 이제껏 본 적 없는 명마들만 보여 주시다니 질투가 납니다. 계속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감히 그럴 리가요. 마침 훈련을 마친 김에 보여드리는 겁니다. 괜히 웃음거리가 될까 부끄럽습니다.”

    ‘온통 상대하기 힘든 귀족들뿐이라니 참으로 재수가 없군. 왜 하필 연경에서 장사를 시작했을꼬. 매일 이런 상전들만 모셔야 하니 제명에 죽기는 글렀구나.’

    흥분한 당자가 헌원가를 바라보았다.

    “어느 말이 이길 것 같소?”

    당자의 말에 관몽득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당 대인은 대관절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오자마자 도박부터 하겠다는 것인가! 이러면 황제 폐하께서 내가 청렴결백하게 장사하지 않는다고 여기실 게 아닌가!’

    관몽득은 울상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당 대인께서는 참 농담도… 이리 작은 곳에서 어찌 도박이 가능하겠습니까. 하하…….”

    “6번에 걸겠습니다.”

    권서함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은근슬쩍 장서열을 스쳐 지나갔다. 탄식보다 감개무량한 감정이 더 컸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황제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 만큼 뛰어난 매력이 있었다. 비록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탓에 좀 더 거만해지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헌원가는 잠시 고민했다.

    “저도 6번으로 하지요.”

    말을 마친 헌원가가 권서함을 향해 웃어 보였다.

    ‘동생에게 좋은 인연이 된 셈 쳐야지.’

    고개를 숙인 구염락이 장서열의 귓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4번 말이 월등해 보이네요.”

    다시 몸을 곧게 세운 구염락이 손가락을 뻗었다.

    “짐과 현비는 4번에 걸겠다.”

    관몽득은 즉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폐하.”

    관몽득은 속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저 말들은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것일 뿐, 황제가 선택한 말이 반드시 1등으로 들어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급해진 관몽득이 옆에 있던 이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본 구염락이 한 발 앞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경마는 예상을 벗어나는 재미로 하는 것이지.”

    관몽득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지고 나서도 같은 말을 하실지 모르니 그렇지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관몽득은 반드시 4번이 힘을 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반드시!’

    * * *

    구염락은 장서열과 함께 삼대천 주변을 걸었다.

    두립을 벗은 장서열은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았다. 바람에 날리는 치마 끝은 하나하나 피어난 연꽃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청산지주는 정말 수완이 좋군요. 삼대천의 규모가 더 커졌어요.”

    구염락은 장서열을 반쯤 안은 채 앞을 향해 걸었다. 그는 경마장을 돌아다니는 말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네가 말을 타는 걸 못 본 지 오래 됐어. 잠시 후에 한번 겨뤄 볼까?”

    구염락은 굳이 그녀와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잘 모르는 것들은 더더욱.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장서열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드러난 이마는 맑고 깨끗했다.

    “무슨 속셈이실까… 이겨도 명예롭지 않으실 텐데요.”

    장서열이 웃었다. 구염락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겐 몇 번을 져도 상관없어.”

    황급히 시선을 거둔 당자는 괜스레 달리는 말들을 쳐다보았다. 몹시도 얼떨떨했다.

    풍경은 여전했으나 사람은 달라졌다. 과거 산 아래 도화 숲에서 서풍엽 역시 그렇게 장서열을 아껴 주었다. 황제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시 장서열은 놀란 나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제 벗들은 각자의 가문을 이끌고 있었으며, 장서열의 남자는 달라졌다.

    ‘하지만 높은 권력과 지위를 좇지 않던 서열이가 입궁 후 과연 마냥 좋기만 했을까?’

    당자는 생각에 잠겼다.

    한편, 현천기는 권서함이 침울하다는 걸 눈치챘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구염락과 장서열을 피하여 다른 길로 향했다.

    “속상해도 소용없습니다. 비록 권 대인의 누이동생이 잘못한 건 없지만 사람의 마음이 가는 방향을 누가 옳다 틀리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현비마마는 과거에…….”

    그렇잖아도 걷고 싶었던 권서함은 묵묵히 현천기의 말을 들어 주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지만, 어쨌든 과거의 친구가 지금은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사이가 된 건 사실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현천기도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회상했다.

    “제 앞에 바로 저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 폐하께서 현비마마를 보던 눈빛은 숭배와 예찬에 가까웠지요. 과연 언제부터 저렇게 변한 걸까요… 처음에는 재색을 겸비한 현비마마가 자비를 베푼다고만 생각했을 뿐, 오늘날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장서열만이 유일하게 나이 어린 구염락을 기피하지 않았고, 그 역시 그녀가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을 허락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 남자의 사랑을 계산하고 있던 그녀에게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현비마마께서 마땅히 누려야 할 복이었던 게지요.”

    권서함은 누이동생의 불행을 장서열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별없이 굴어선 안 된다. 권서함 역시 과거 구염락을 공경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그들은 구염락의 곁에 없었다.

    현천기도 권서함의 말을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허나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현천기를 바라본 권서함이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그의 말은 제법 악랄한 구석이 있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두 사람이 영원히 서로의 마음속에 있다면 설령 나빠진다고 해도 최악은 아닐 테지요.”

    “그렇긴 하지요.”

    줄곧 땅을 주시하던 헌원상의 시선이 조금씩 높아지다 이윽고 황제가 있는 곳까지 향했다. 계수나무 옆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과 키가 크고 준수한 남자.

    다시 고개를 숙인 헌원상은 발끝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경주가 끝났다. 천만다행히도 4번 말이 1등으로 들어왔다. 관몽득은 거의 오열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관몽득은 4번 말이 너무나 기특한 나머지 반드시 이 명마에게 하루 세 끼 고기반찬을 먹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정작 내기를 한 사람들은 결과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기에 목숨을 건 쪽은 관몽득 한 사람뿐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과 함께 경기를 마친 말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장서열이 벌써 이 년 넘게 말을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먼저 골라.”

    구염락을 바라보는 시선에 반짝이는 미소가 더해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잊지 말아요. 당신은 요 몇 년간 실전에서 경험을 쌓았을 뿐 전술에서는 날 이기지 못해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박학다식한 것은 아니듯이.

    구염락은 팔짱을 낀 채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그는 장서열을 산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넘지 못할 산. 하지만 지금은…….

    “자, 부인. 고르시지요.”

    장서열은 사양하지 않았다.

    “좋아요.”

    한 바퀴 말을 돌아본 장서열은 조금 전 4등으로 들어온 7번 말을 끌고 나왔다. 눈썹을 치켜든 구염락은 망설임 없이 8번 말을 끌고 나왔다.

    구염락이 장서열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처럼 바로 옆에 있던 한 쌍이지.”

    “진지하지 못 하군요.”

    뒤를 이어 헌원가와 당자, 그리고 현천기와 권서함도 말을 골랐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승률이 반반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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