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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82)화 (282/449)
  • 제282화

    매형의 손에 끌려온 헌원상은 시종일관 현비의 발밑을 주시하며 감히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그는 진작 장서열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곁에 선 황제를 보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차피 황제는 귀빈 통로를 이용할 테니 그들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현비가 가까워지자 지난 몇 년간 갈고 닦은 헌원상의 배포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는 어렸을 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헌원상을 발견한 장서열의 눈에 순간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온화했다.

    “상이구나. 코흘리개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크다니.”

    황제를 의식한 헌원가는 감히 말을 잇지 못한 채 쑥스러운 듯 웃었다. 동시에 그녀는 몰래 헌원상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어서 현비마마에게 잘 보이라는 신호였다. 현비의 눈에 든다면 앞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 존귀한 신분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헌원가는 곧 동생의 상태가 썩 좋지 못 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헌원상은 아무리 신호를 주어도 줄곧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으며 특히 현비가 인사를 건넨 뒤부터는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심지어 동생은 당자의 뒤에 숨어 제대로 된 안부도 묻지 않았다.

    헌원가는 야물지 못한 동생을 보며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동생만 탓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앞에서는 헌원가 자신조차 마음이 싸해지는데 이제 막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동생이야 오죽하겠는가. 헌원가는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께 앞으로 외출할 때는 꼭 동생을 데리고 다니시라고 권하리라 다짐했다.

    권서함과 현천기는 일행들이 술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의아해하던 그들은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목격한 후 그녀와 동행한 이의 신분조차 잊을 만큼 놀랐다.

    삼 년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아무도 장서열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아무리 거리를 헤매고 다녀도, 어떠한 식당에 드나들어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장서열을 마주한 그들은 아련하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에 그저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들은 어리석게도 그녀의 옆에서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를 간과했다.

    그렇잖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구염락은 장서열을 향한 또 다른 시선을 느끼자 극도로 사나워졌다. 심지어 그가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남자는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양 계속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염락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처형하고픈 충동이 솟구쳤다. 주변에 이렇게 본심을 숨긴 음흉한 것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특히 권서함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구염락은 권서함 같은 사람이야말로 다소곳한 여인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이를 테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규방에만 머무는 규수라든지, 개두蓋頭(머리쓰개)를 벗겨 주길 기다리는 아내라든지…….

    구염락은 조금 전 권서함의 눈빛이 못내 거슬렸다. 비록 금방 사라져 평소처럼 점잖게 돌아오긴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함을 금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계속 노려보고 있음에도 차분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권서함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왠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에 그가 즉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오래도록 보지 못한 그리운 이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지켜야 할 선을 넘고 추태를 부린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권서함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불순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그림처럼 준수한 용모를 지닌 주군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 현천기 역시 염치를 무릅쓰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싸늘한 시선이 꽂히자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찰나였지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구염락은 냉랭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었다.

    당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현천기가 득의양양하게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수형처가 문을 닫는 바람에 형장 오십 대를 기록만 해 뒀으니 권서함이 술이라도 사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자는 왠지 현천기의 불행이 고소했다. 누가 봐도 권서함은 곤장을 맞고 온 행색이 아니었다.

    ‘아주 제대로 걸렸군. 지금 여기서 형을 집행해도 되겠어. 현천기는 아무래도 찝찝한 사람이니 함께 어울리지 않는 게 좋아.’

    당자는 창백해진 부인의 얼굴이 계속 신경 쓰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헌원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장서열은 구염락을 바라보다 곧 그의 옆에 선 권서함에게 눈길을 돌렸다.

    “권 대인도 계셨군요.”

    권서함은 황제의 차가운 시선을 못 본 척 공손하게 인사했다.

    “현비마마를 뵈옵니다.”

    “너무 예의를 차리니 어색하네요.”

    두 사람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권서함의 고모는 장서열에 의해 실각했고, 권서함의 동생 또한 장서열의 손에서 망가졌다. 다 지난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권씨 가문 여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인사를 마친 장서열과 권서함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장서열은 계속해 헌원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폐하와 나도 경마장에 가던 길이야. 같이 가는 게 어때? 사람이 많으면 더 즐겁잖아. 그러고 보니 당자의 서투른 실력을 본 지도 꽤 오래 됐어. 오늘도 창피를 무릅쓰고 재미있는 장면을 보여 주겠지?”

    장서열은 삼 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당자는 순간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그 옛날의 열셋째가 아니었기에 재빨리 말을 삼켰다.

    장서열이 연경 제일의 귀공자를 상대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구염락은 더 이상 권서함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그는 권서함이 멀쩡한 연유에 대해서도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배를 타지?”

    당자가 한 걸음 나섰다.

    “소신의 배입니다.”

    “가자.”

    구염락은 장서열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신의 옆에 두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막기에 너울은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음에는 반드시 발끝까지 가리고 데려오리라 다짐했다.

    헌원가는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장서열에게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이를 낳을 때 아프지는 않았는지, 대체 자신에게는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지 전부 물어보고 싶었다. 또한 그녀는 당자가 매우 잘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가 가까이 오면 반사적으로 숨게 된다는 것과, 중요한 순간이 오면 왠지 모르게 징그럽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장서열의 곁을 철통 같이 지키는 황제 때문에 헌원가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서열은 헌원가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분명 예전처럼 웃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에게 무언의 눈길을 보냈고,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다가도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말을 하기 불편해. 경마장에 도착하면 기회를 봐서 옆에 앉혀야지.’

    고개를 돌린 장서열은 웃으며 헌원가를 달래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는 헌원가가 자신을 껴안으려던 당자를 사납게 뿌리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

    헌원가와 달리 당자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하시는 일을 신하라고 배우지 못할 건 없었다. 당자는 스스로를 연경에서 손꼽히는 귀공자라 생각했고, 그에 따라 다정하게 아내를 안고 다니는 게 도리라고 여겼다.

    당자의 행동은 부드러웠다. 그는 헌원가와 주거니 받거니 장난치는 게 좋았고, 그럴 때면 으레 화를 내는 헌원가의 생기 넘치는 눈빛도 좋아했다.

    장서열에게 들켰다는 걸 안 헌원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가 경고하듯 당자를 노려보았다.

    ‘또 그러기만 해! 호수로 차 버릴 거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목격한 건 비단 장서열뿐만이 아니었다. 현천기는 한편에 외롭게 서 있는 자신과 권서함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현천기는 불현듯 권서함의 독신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이상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닌 황제는 전국의 여인을 다 뒤져서라도 권서함의 짝을 찾아낼 것이다.

    따분한 생각을 하던 현천기는 문득 누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매형의 뒤를 따르는 헌원상을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마치 움츠린 거북이 같았다.

    헌원상은 원체 말이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천기는 헌원상을 비웃으려다 그만 두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의 냉기 앞에서 어린 녀석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천기는 문득 갑갑한 느낌에 시선을 돌렸다.

    ‘황제는 정녕 자기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어째서 고칠 생각조차 않는 거지?’

    순간 권서함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현천기를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뭐하는 겁니까!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물에 빠집니다. 갑판은 왼쪽으로 삼 장이나 떨어진 곳에 있어요.”

    현천기가 다리를 들어올렸다. 코앞에 물결이 넘실거리는 호수를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 황제가 보인 증오 어린 눈빛에 놀란 건 권서함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혼인이 뭐 대수라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야.’

    현천기가 권서함의 어깨를 두드렸다.

    “갑시다.”

    현천기에게 권서함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지닌 동지였다.

    권서함은 낯선 이를 가까이하는 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현천기처럼 악명 높은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딱히 접점이 없는 현천기가 자꾸만 친근하게 굴자 권서함은 대체 자신의 어떤 면이 그에게 호감을 준 건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배는 청산을 향해 부드럽게 움직였다. 바닷바람이 불자 뱃머리에서 풍경风铃(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현천기는 이 배가 헌원가의 배라는 걸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뱃머리에 저렇게 유치한 물건이 있을 리도, 곳곳에 부드러운 방석들이 가득할 리도 없었다.

    헌원가는 뿌듯한 표정으로 제일 앞자리에 앉은 현비에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은 명백히 칭찬을 바라고 있었다.

    “서열 언니, 듣기 좋죠? 호국胡國에서 들여온 풍경风铃이에요.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어서 뱃머리에 걸어 두면 바다 요괴가 내뿜는 짙은 안개를 피할 수 있대요.”

    현천기는 차라리 바다 요괴에게 잡아먹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달랑대는 소리에 정신이 다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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