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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79)화 (279/449)

제279화

천천히 다가오는 구염락을 보며 구염단영과 육황자는 놀라서 계속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살기에 찬 구염락의 눈빛에 벌벌 떨었다.

“아니야… 열셋째, 우린 네 형님이야. 너의 혈육이라고! 우리에게 이래서는 안 돼… 천벌을 받을 거야. 하늘이 지켜보고 있어!”

구염락이 그들을 발로 퍽 걷어찼다.

“그래? 그럼 하늘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지켜보라고 해. 짐이 어떻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실현하는지.”

“안 돼! 구염락! 형을 죽일 순 없어! 우릴 죽이면 안 돼!”

도망치는 그들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가 손에 든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두르자 참혹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분한 구염락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진작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역모라니. 그에게 베푼 그 끔찍한 사랑을 돌려 달라고 제 발로 찾아온 격이 아닌가.

정말 끝까지 귀여운 녀석들이었다. 어린 시절 그들이 다년간 베풀어 푼 은혜와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구염락은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대청 구석구석이 피로 물들었다. 세 사람은 머리를 싸맨 채 허겁지겁 도망 다녔다.

구염락은 마치 양을 치듯 천천히 그들을 몰았다. 머리를 울리는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구염락은 애원하는 그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형을 죽여? 그게 뭐가 어때서!’

오늘 그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장서열은 더더욱 몰라야 했다.

“악!”

밖에서 문을 지키는 이들은 처절한 비명소리에 오싹함을 느꼈다.

구염락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가 뒤섞인 탓인지 그중 구염단신에게 휘두르는 몽둥이가 가장 맵고 악독했다.

잠시 후, 구염단신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구염락을 바라보는 시선은 원망조차 담을 수 없을 만큼 미약했다.

“이 배…은…망덕한 놈…….”

구염락은 눈 하나 깜작 않고 세 사람을 향해 숯불을 걷어찼다.

구염단신이 옳았다.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염단신과 태후를 짓밟아 용상 위에 올랐고, 결국 원하던 권세를 손에 넣었다.

권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오묘한 것이었다. 손에 넣는 순간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했다.

천하가 그의 발밑에 있었고, 장서열은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들은 구염락에게 권력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은인을 베어 죽이는 일도, 배은망덕도 그에게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비명과 몸부림, 탕탕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절박한 순간을 넘어 차츰 무력해졌고, 결국 고요해졌다.

구염락은 만족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사악한 기운을 거둔 그는 다시 올곧고 영명한 황제로 돌아갔다.

* * *

“폐하께서 돌아오셨다고?”

등불 아래 옷을 짓고 있던 장서열은 비로소 안도하며 바늘을 거두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돌아오지 않자 줄곧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돌아왔으면 됐어.’

이는 그가 처리하고 돌아온 일이 그리 큰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편, 천륜에 반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제 발이 저린 구염락은 감히 조로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전前殿에 침소를 마련했다.

그러나 혜령이 이제 막 조로전의 등불이 꺼졌음을 고하자 구염락은 뭉클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재빨리 피 묻은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곧장 조로전으로 향했다.

장서열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귓가에 찌릿한 열기가 느껴지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그녀가 자신을 파고드는 구염락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미소를 머금은 장서열이 몸을 돌려 구염락을 편히 눕혀 주었다.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요? 얼른 쉬어요. 아침에 조례가 있잖아요.”

그러나 구염락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일이면 세 황자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질 테고, 장서열은 그들의 사인死因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것이다. 구염락은 그가 친형제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서열이 자신을 밀어내고 거부할까 봐 두려웠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미약한 방어를 해제한 그가 가볍게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인 구염락은 아래에 놓인 부드러운 몸을 내리 눌렀다.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서열아, 날 사랑해 줘…….”

결국 마음이 움직인 장서열이 그에게 경고했다.

“점심에는 잊지 말고 쉬어야 해요.”

그녀가 손을 뻗어 구염락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다음날, 조례에 참석하는 구염락의 시중을 들던 장서열은 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환복을 도와주는 장서열에게 그는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났다.

‘대체 무슨 일이지?’

후궁이 알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대의 태자였던 구염단신과 구염단영, 육황자 세 사람이 술을 마시다 죽었다는 소식은 모두가 함구했기 때문에 내명부에 전해지지 않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후궁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는 법도 때문이었으나, 정확히는 황제가 내명부의 하인들을 마치 군대 다루듯 엄하게 관리한 탓이었다. 하인들은 그 누구도 감히 황제의 성역에서 함부로 혀를 놀리지 못했다.

* * *

한편, 참고 또 참던 권서함의 분노가 결국 폭발했다. 그는 조례가 끝난 직후 곧장 황제를 찾아갔다. 좀처럼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권서함이 분노하여 손에 든 목패를 내던졌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우리 권씨 가문이 대체 무얼 그리 잘못하였습니까! 어째서 다 죽이지 못해 안달이냔 말입니다!”

구염락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권서함.”

대범하게 구염락을 노려본 권서함이 이를 악문 채 또박또박 내뱉었다.

“예, 소신 여기 있습니다.”

권서함은 자신의 가문을 멸시하는 구염락에게 화가 치솟았다. 권씨 가문은 분명 거듭 물러서 주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계속해 그들을 벼랑으로 몰아붙였다.

구염락은 대의명분을 내세우려는 권서함을 비아냥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가 뜻밖에 구경거리를 접한 신하들에게 그가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모두 물러가라.”

겁을 집어먹은 신하들은 그 말이 감히 황제의 면전에 목패를 던진 권서함이 아닌 자신들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고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리자와 혜령 역시 시중을 들던 하인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방을 나갔다.

그러나 황제의 뒤에 선 현천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탁자에 내던져진 목패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용감하구나. 감히 황제에게 덤비다니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군!’

권서함은 그의 친애하는 사촌형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희 가문이 큰 피해를 입은 게 폐하의 잘못은 아니지.’

현천기는 악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매달 올리는 정기 보고를 위해 입궁한 그는 생각지 못한 화끈한 장면에 흥미가 생겼다. 평소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권서함에게도 아직 소년의 마음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권서함을 끌어내 던지지는 않았다. 현천기는 어쩌면 또 황제가 권서함을 때릴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현천기! 권 한림翰林에게 역적 구염단신이 벌인 짓을 소상히 고하라. 스스로 곤장 오십 대를 쳐 달라고 빌 때까지!”

손에 든 주필을 으스러뜨린 구염락은 먹물이 튄 용포를 갈아입기 위해 병풍 뒤로 사라졌다.

‘왜 하필 나지?’

이는 즉 권서함의 입에서 죽여 달라는 말을 받아내라는 뜻이었다. 당황한 현천기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언변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황제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현천기는 차라리 권서함을 설득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 권서함은 감정을 분출한 뒤 허탈해졌다. 자제력을 잃어버린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일평생 권씨 가문이 이렇게 비참해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천하의 지존이라도 황제는 결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설령 정말로 구염단신이 죽을죄를 지었다 해도, 황제는 그의 처분에 대해 마땅히 권씨 가문에 미리 귀띔을 해 줬어야 했다. 이제껏 그들 가문은 누차 황제에게 양보와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황제는 권씨 가문을 존중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는 이들을 하찮게 여겼고, 권씨 가문의 핏줄을 멋대로 처리했다.

‘나라를 위해 충성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충성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권서함은 무력감과 함께 황제에게 무시당한 신하들의 비애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권서함은 구염락이 좋은 황제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구염단신을 처리하고 통보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권서함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있었다. 현천기는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권서함은 어려서부터 이상적인 군신 관계를 학습해 왔고, 어질고 총명한 군주의 밑에서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상처와 무력감이었다.

한 걸음 다가간 현천기가 권서함의 어깨를 두드리며 넌지시 말했다.

“받아들이시지요.”

어찌 되었든 이유를 불문하고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집권 초기부터 영덕제를 모신 현천기는 그가 성숙한 제왕이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염락은 이전보다 고민하는 날이 많아졌고, 지나치게 독단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얽혀 있는 일인 경우에는 가끔 전처럼 제멋대로 굴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황제를 탓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권 대인. 대인의 사촌은 이번 역모뿐만이 아니라 그간 폐하를 도발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과거 현비마마에게 흑심을 품은 데서 그치지 않고, 조 부인이 입궁하는 틈을 타 현비마마를 납치하여 폐하를 위협하려 했습니다.”

“…….”

“정녕 폐하께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보십니까? 대인의 사촌 형님은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기에 그런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겁니다.”

그러나 권서함의 귀에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 없었다. 권서함은 그저 억울하고 답답했다. 조정에 들어온 이후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간 권씨 가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궁에 갇힌 두 여인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구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황제는 권력을 이용해 권씨 가문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구태여 순하고 성실한 신하로 살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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