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가운데 그윽한 계화 향기가 풍겼다. 날렵하게 조각된 옥계단과 붉은 벽에 얹힌 황금빛 지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두운 밤, 깊은 잠에 빠진 황궁은 마치 종일 경계를 늦추지 않던 수사자가 드러누운 듯 무척 웅장하고 경건했다.
막 조로전으로 향하려던 구염락은 일등공을 통해 기밀을 전달 받았다.
구염락은 밖으로 나가려던 발길을 되돌렸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떠올랐다.
‘구염단신, 다른 형제들까지 끌어들여 명을 재촉하다니… 사는 게 제법 무료했던 모양이군.’
원한은 진작에 끊어냈어야 했다. 구염락은 과거 그들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짓들을 하나하나 되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현비에게 먼저 침소에 들라고 전하라.”
말을 마친 구염락은 검은 비단에 금색 꽃이 수놓아진 화려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 일등공을 대동하여 황성皇城을 떠났다.
한편, 그 소식을 들은 장서열은 의아한 눈길로 혜령을 쳐다보았다. 분명 부드러운 말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일을 마친 그가 곧장 돌아와 쉬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보통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해시亥时(밤 9시~11시)가 지나면 일에서 손을 놓았다.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은 장서열이 까르르 웃는 아기를 어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폐하는 어찌하여 바쁘신 것이냐?”
혜령은 감히 숨길 수 없었다.
“예, 마마. 폐하께서는 조로전에 들기 위해 준비하시던 중 밀서를 받고 궁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궁을 나갔다고?’
“알았다. 이만 물러가라. 황아야, 어째서 입을 삐죽이는 것이냐? 자, 착하지… 울지 말거라…….”
오히려 조급해진 건 화 마마였다.
“마마, 지금 황자 아기씨를 어르고 계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다. 처리해야 할 나랏일이 많은 건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황제가 조로전을 찾지 않는다면 내년 봄, 새로 후궁이 들어온 이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농교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큰일이기에 폐하께서 마마와 황자 아가씨와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신 거지? 마마께서 잘 알아보셔야 할 텐데!’
장서열은 싱긋 웃었다. 그녀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염락은 무슨 일로 바쁜 걸까?’
* * *
사황자 구염단영九炎端荣은 자는 도중 저택에서 끌려나왔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거 놔라! 무엄하다! 나는 황제의 형님 되는 사람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구염단영은 한참을 소리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문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다가 저택 한편에 쓰러져 있는 시위를 발견한 뒤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가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다 구염단신의 머리에서 나온 거야! 다 구염단신이 꾸민 거라고!’
그는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새하얀 내의가 구겨져 흘러내렸고,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땅바닥에 늘어져 아무렇게나 짓밟혔다. 과거 거만하기 짝이 없던 얼굴은 지금 이 순간 공포에 질려 있었다.
구염단영은 억울했다. 그는 단지 차를 한 잔 마시러 갔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건 전부 구염단신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일등공은 능숙하게 구염단영의 입을 틀어막은 뒤 그를 목적지로 끌고 갔다.
같은 시각, 육황자의 저택에서 흘러나오던 비명소리는 이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저녁 바람이 지나간 거리에는 으스스한 가을 추위만이 남았다.
세 황자가 널브러진 저택의 뜰 안, 상석에 앉은 구염락은 거만한 눈으로 과거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던 형님들을 바라보았다.
사황자와 육황자는 몸을 웅크렸다. 그들은 일전에 구염락이 이황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감히 구염락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그들은 문득 옆에 내팽개쳐진 구염단신을 보고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이들에게서 과거 선황에게 총애 받던 시절의 패기 넘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구염락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살랑거리는 등황색의 촛불이 피에 굶주린 구염락의 표정을 흐리게 했다.
“왜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까? 계속하세요. 짐은 세 분 형님께서 큰 소리로, 처참하게 울부짖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만족할 만큼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이 아우의 기분이 나빠질 겁니다… 저는 기분이 나쁠 때면 꼭 피가 보고 싶거든요.”
“…….”
“형님들의 손목에서 나온 피가 바닥을 뒤덮을 정도로 흐른다면… 그 붉은 빛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염료가 되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님?”
새하얗게 질린 사황자 구염단영이 벌벌 떨며 크게 소리쳤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형님… 형님이 그랬어! 형님 말이야…….”
사황자가 구염단신을 가리켰다. 그에게서 어린 시절 하늘을 찌를 듯 거만하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형님이 반란을 꾀하자고 했지만 난 동의하지 않았어! 형님은 아우를 원망하고 있어… 아우가 장서열과 황위를 빼앗고 형님의 모친을 감금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우를 죽여 복수하려 한 건 내가 아니라 형님이야!”
바닥에 몸을 내리 눌린 구염단신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피 묻은 눈으로 증오 섞인 시선을 던졌다.
“구염락! 제 명에 죽지 못할 천한 것! 태후마마께서 널 어떻게 대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돌연 자리에서 걸어 내려온 구염락이 구염단신 앞에 섰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가 구염단신의 얼굴에 따귀를 갈겼다.
호위병에게 잡혀 있던 구염단신은 구염락의 힘에 못 이겨 멀리 나가떨어졌다. 고귀한 태자로 자란 그에게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구염단신이 분개하여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수치심이 분노로 바뀐 게냐? 날 죽여서 입을 막겠다? 구염락, 착각하지 마라. 너는 황궁에서 키운 개일 뿐이다. 너 같은 건 단영의 신발을 들어줄 주제도 못 되느니!”
구염단영이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아니! 아니야! 저야말로 폐하의 신발에 손을 댈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살려주십시오!”
구염단신이 경멸하듯 구염단영을 쳐다보았다.
“닥쳐라, 구염단영! 너와 저 천한 것의 신분을 생각해라! 네가 저 자식 앞에 꿇어앉은 이 상황이 정녕 가당키나 한 것이냐? 저자는 천한 군기가 낳은 잡종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종이 무식한 수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는구나! 제 아비가 얼마나 더러운 손님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선황을 농락하다니!”
구염락이 껄껄 웃었다.
“형님, 과연 혀를 잘 놀리시는군요. 헌데 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 나불대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특히 과거에 짐에게 몹시 악랄했던 자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여기서 짐이 형님들을 후히 대접해 드리지 않으면 그건 짐을 모독한 형님들의 노고를 헛되이 하는 일이 될 겁니다. 여봐라!”
건장한 남자 셋이 화로를 들고 나타났다. 화로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인두가 있었다.
구염락이 웃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인두를 잡은 그가 숯을 몇 번 찌르자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구염단신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무슨 짓이냐! 나는 이 나라의 태자였다! 나는 지금 몸이 불편할 뿐더러 나의 모친께서는 너의 은인이다! 어머니께서 널 택한 건 나의 안위를 보장 받기 위함이었거늘, 감히 네가 무슨 짓을… 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타는 냄새가 퍼졌다. 구염단신은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인두는 아무렇게나 화로 속에 던져졌다. 화롯불이 비친 구염락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폐위를 당하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짐이 제위에 오른 이유가 대관절 형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말을 마친 구염락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왕부王府의 대청은 텅 비어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누추한 이곳이 구염락은 몹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무엄하다! 선황께서는 날 폐위하지 않으셨다. 내가 자진해서 그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가장 가까운 의자를 들고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순 구염락은 그중 가장 튼튼한 다리를 뽑은 후 손으로 얼추 무게를 가늠했다. 세 황자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이 나라의 황제가 누구지?”
구염단영과 육황자가 동시에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말했다.
“열셋째! 십삼황자가 황제입니다! 십삼황자는 대대손손 천추에 길이 빛날 황제입니다!”
구염락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쯤 해 두고.”
구염락이 구염단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때, 이제 알겠느냐?”
“이 비열하고 파렴치한 놈! 더럽고 천한…….”
구염락이 의자 다리를 몽둥이로 삼아 휘둘렀다.
근처의 의자에 머리를 부딪힌 구염단신은 그대로 뒤에 있는 벽에 처박혔다. 선혈이 그의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를 목격한 두 황자들은 구염락에게 같은 취급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구염락은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때렸다. 마치 구염단신을 못 본 사람처럼 그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자, 더는 헛소리를 못 하겠지?”
구염단신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통 초점을 잡을 수 없는 눈은 눈앞에 선 이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너…….”
구염락이 별안간 구석에 있는 구염단영과 육황자를 바라보았다.
“실은 짐이 엉뚱한 사람을 때렸어… 너는 짐에게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았잖아. 그저 달처럼 맑은 눈으로 다른 자들이 눈치껏 알아서 날 구타하는 걸 쳐다봤을 뿐이지. 짐 같이 비천한 종자야 고귀하신 태자 전하의 비호를 받을 수 없는 게 당연하고… 해서 짐은 널 탓하지 않아. 다만 알고 싶을 뿐.”
잔인하게 물든 구염락의 눈빛이 구석에 몰린 두 황자에게로 향했다.
구염락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눈앞의 두 황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진심을 다하여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했다.
구염락은 지옥 같은 유년 시절에 이바지한 두 형님의 노고에 충분한 감사를 표하고자 했다. 그토록 자신을 열심히 두들겨 팬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 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