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서북왕은 조회가 끝나자 당당하게 황제를 찾아갔다.
과거의 주인을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손 공공은 손가락으로 난화지兰花指(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위로 치켜드는 손동작)를 짚은 채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손 공공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서북왕이 답답했다. 이미 황권을 굳힌 황제는 과거를 언급하는 것도, 과거의 약속에 얽매이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황제는 서북왕을 전혀 은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왕야는 대체 무엇을 물어보러 온 거지?’
서북왕은 달갑지 않은 눈빛으로 손 공공을 바라보았다. 과거 그는 온 힘을 다해 구염락을 길러냈으나 배은망덕하게도 구염락은 그를 공격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맞이한다면 달갑지 않을 터였다.
“폐하께 아뢰어라. 본왕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손 공공은 난감했다. 서북왕은 이미 한 번 황제에게 난리를 치고 간 전적이 있었다. 며칠 조용한가 싶더니 어김없이 또 은인 행세를 하러 나타난 것이다.
황제는 현비의 일로 서북왕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황제를 만나는 건 제 발로 죽으러 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손 공공의 눈빛을 본 서북왕은 즉시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과거 부하였던 자가 지금은 적에게 붙어 자신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정말로 너희들을 어찌할 수 없을 줄 아느냐?’
서북왕은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내명부에 손을 뻗칠 수 없다고 해서 결코 황제의 전전前殿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손 공공, 자네가 후궁의 안주인은 아니잖나. 본왕은 무슨 행패를 부리려는 게 아니야. 본왕이 다 뜻이 있어 폐하를 뵙고자 하는 것이니 그대로 말을 전하시게.”
말은 참 쉬웠다. 손 공공은 섣불리 그를 들여보냈다가 혹시라도 황제가 자신의 충심을 의심할까 봐 두려웠다. 서북왕은 거의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황제가 싫어하는 자였다. 그런 처지로 황제를 만나겠다니,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왕야, 차라리…….”
“손 공공, 내가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얼른 입을 다문 손 공공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손 공공은 서북왕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그를 위해 구염락을 돌봤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법이다. 세월이 흐르며 점차 성숙해지는 황제를 지켜본 손 공공은 어느 순간부터 서북왕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깨우치게 되었다. 죽어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선배들과 달리 손 공공은 얼마 되지 않아 서북왕보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옛 주인이 나타나 사사건건 시비를 거니 어찌 이리 재수가 없을꼬.’
다행히도 오늘 황제는 기분이 좋았다. 손 공공은 혹시라도 황제가 자신이 서북왕에게 빌붙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장서열이 황후로 결정되자 마침내 근심거리의 절반이 해결된 구염락은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인생의 목표가 반절은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서북왕이 왔다고?”
구염락의 입꼬리가 즉시 냉랭하게 올라갔다.
“어떻게 죽을지 의논하려는 모양이군.”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손 공공이 몸을 움츠렸다.
“오후에 다시 오라고 하라.”
그는 서북왕이 이번에는 또 어떤 궤변을 지껄일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현비는?”
혜령이 황급히 답했다.
“예, 폐하. 현비마마께서는 오후에 활을 쏘던 중 손가락을 다쳐 다시 처소로 돌아가셨습니다. 농교가 말하길, 마마께서 몹시 성을 내셨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구염락이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혜령도 함께 따라 웃었다.
지난 일 년 가까이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한 그녀는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조차 어색해져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활쏘기에서조차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아마도 그녀는 울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혜령은 현비가 냉정을 되찾을 오후 시간이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폐하는 꼼짝없이 현비마마의 터무니없는 짜증을 몽땅 받아내야 했으리라.
혜령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현비마마와 함께일 때의 폐하는 아무리 봐도 소문처럼 그렇게 몰인정한 분이 아니었다.
“짐이 백국에서 가져온 활을 현비에게 보내라.”
“예, 폐하.”
* * *
반 시진 후, 장서열은 꽁꽁 싸맨 자신의 손가락과 소리자가 가져온 새까맣고 거대한 활을 번갈아 바라보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는 착각을 느꼈다. 어떠한 무늬도, 번잡한 장식도 없는 활은 실로 무서운 병기兵器였다.
먹빛으로 검게 칠한 활의 몸체에서 용맹한 기운과 함께 왠지 모를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온 활에는 마치 뭇 병사를 깔보는 듯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구염락은 사용법이 간단한 물건을 선호했다. 장서열은 이 활을 본 적이 있었지만 직접 만져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활이 갑자기 눈앞에 번쩍이며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오히려 활을 만지기가 두려워졌다.
소리자가 얼른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는 우선 활을 잡는 법부터 천천히 익히라 하셨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마마는 궁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부지런히 연습하신다면 보름 후에는 충분히 활을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이 공공, 자네는 정말로 폐하께서 본궁을 놀리기 위해 활을 보낸 게 아니라고 생각하나? 폐하께서는 본궁의 실력이 녹슬었다고 여기는 것 같군.”
말을 마친 장서열이 다친 손가락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저 활시위를 한 번 당겼을 뿐인데 그대로 손을 베이다니.
사실 궁술 실력이 퇴보한 것도 당연했다. 이는 순간적인 실수라기보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안일한 생활을 해온 탓이었다. 그간 활을 잡는 데 소홀했으니 이런 결과를 얻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장서열은 탄식했다. 과거 자신이 구염락을 얼마나 멀리 앞질렀든 이제 그녀는 구염락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가서 주인께 고해라. 본궁은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충분히 폐하를 이길 수 있다고.”
소리자가 겸손하게 웃었다.
“예, 마마.”
조석궁으로 돌아온 소리자는 구염락에게 장서열이 들려 준 말을 그대로 전했다. 구염락이 온화하게 웃었다.
“현비의 궁술은 매우 훌륭하지.”
과거 장서열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단순히 자세만 멋진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면이 있어서 오래도록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고,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지 않으면 무엇이든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녀는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 주곤 했다.
소리자는 추억에 잠긴 황제를 보며 함께 미소 지었다. 그는 주인의 감상을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 * *
아침 조례에서 내려온 황제의 특별 지시를 전해 들은 연경의 백성들은 달콤한 환상에 젖었다. 천하를 제패한 젊은 제왕의 후궁이 되는 일이었다. 혼기가 찬 귀족의 여식들은 수줍은 기대를 품었다.
그들 중에는 과거 전쟁을 끝낸 구염락이 대군을 이끌고 연경으로 돌아오던 모습을 목격한 운 좋은 소녀들도 있었다. 황제에게 첫눈에 반한 귀족 소녀들은 모친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어머니만 믿을게요.”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는 법이다. 때로 평범한 백성들은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만 빛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소식을 접한 연경 밖 한미한 가문들은 대담하게 후궁 간택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했다. 이들은 어떻게든 입궁만 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불확실한 기대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환상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어떤 이는 구염락의 사람이 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비루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궁을 소망했다. 후궁을 간택한다는 소식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했으나 또 누군가는 근심에 잠기는 등 그야말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권씨 가문의 방계인 서출들은 더욱 큰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혼기가 찬 딸이 권 노야의 눈에 들어 입궁할 수 있도록 그의 환심을 사려 했다.
권 노야는 이들이 찾아오는 걸 막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여식을 입궁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당장 친딸부터가 궁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마당에 다른 집안의 딸을 들여보낼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못해도 향후 십 년 동안은 그 고집불통에게 다른 여인이 생기는 걸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권서함은 백부와 숙부들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현비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여인이었다면 진작에 멀리 몸을 피했을 것이다. 현비와 총애를 다툰다는 건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권서함은 후궁 간택에 참여하는 그들의 자유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각 성城의 인구는 무려 백만 명씩 되었고, 그중 간택에 올려 보낼 수 있는 여인은 최대 세 명뿐이었다. 더 많은 여인을 올려 보내는 건 중죄였다.
전과 달리 눈에 띄는 변화라면 예전에는 딸이 간택 명단에서 빠질 수 있게 은자를 쓰던 이들이 올해 들어 유독 혼신의 힘을 다해 간택 명단에 들도록 은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딸에게 좋은 미래를 안겨 줄 거라 믿고 있었다.
권서함은 후궁 간택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무의미한 일이니 부디 딸을 죽이는 부모가 되지 말라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누이동생 권비를 위해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국 권서함은 설득을 포기했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믿고 안 믿고는 이제 전적으로 그들의 몫이었다.
각 성마다 간택에 들 수 있는 인원이 적었던 데다 연경 귀족에게 할당된 인원도 많지 않았기에 황제는 지위를 이용해 간택 명단에 손을 대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다. 이를 어기다 적발될 시 삼족에 걸쳐 관직이 강등되었다.
영덕제 3년, 첫 번째 후궁 간택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이 시기 어떠한 여인도 다른 가문과 정혼하지 않았다.
혼기가 찬 연경의 귀족 여식들은 모두 황제의 후궁 간택을 기다렸다. 간택 첫날부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치열한 기 싸움이 팽팽했다.
황제는 현재 한창 나이일 뿐만 아니라 훤칠한 외모에 문무에 능하여 누구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 없었다. 한때 명문가 규수들 사이에서는 그가 어떻게 육세지란을 평정하고 백국을 무너뜨렸는지가 뜨거운 화제였다.
이야기꾼의 입에서 황제가 출병한 전투마다 매번 대승을 거둔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면 여인들은 끊임없는 감탄을 쏟아내며 남몰래 그를 사모하고 또 사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