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두 사람의 모습에 서 이랑은 속으로 서운함을 느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남편이 주사섬과 같은 여인을 아껴줄 줄 안다면 분명 자신도 좋아해 줄 날이 오리라 믿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장서전은 여전히 정방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첩실의 처소로 옮기기는커녕 주사섬이 놓아둔 병서兵书를 훑어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서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주사섬을 위해 마지막 반찬을 집어준 서 이랑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장서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고, 결국 서 이랑은 아랫입술을 문 채 조용히 물러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사섬 역시 서 이랑을 보며 초조한 건 매한가지였다.
‘노야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만약 주사섬이 장서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남편에게 말 못 할 문제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매일 서 이랑처럼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사섬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향후 일 년 정도는 회임을 할 수 없었다. 정실부인으로서 가문의 후사를 잇는 일에 마음이 조급한 건 당연했다. 그녀는 장서전이 어떻게든 올해 안에는 아들을 안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주사섬은 질투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자손의 번성을 돕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데 힘써야 할 정실부인이 시기, 질투에 매달리는 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주사섬은 장서전이 추파를 던지면 어떤 여인도 감히 그를 거부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아마도 밤새 모든 촛불이 다 탈 때까지 여인을 저주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더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황당해서 웃음을 터뜨리리라.
주사섬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자란 여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남편이 남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장서전이 손을 뻗자 이를 본 주사섬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와 바싹 몸을 붙이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장서전이 빙긋 웃었다. 서 이랑이 나간 뒤부터 이미 장서전의 마음은 병서를 떠나 있었다. 온화하고 향기로운 여인을 품에 안은 그의 마음이 산란해졌다.
“부인, 그만 쉽시다.”
“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로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인 주사섬의 모습에 장서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그녀를 놀려 주고 싶었다.
“부인, 날 원하오?”
“네…….”
“뭐라고 했소?”
자신의 목소리가 매우 작다는 것을 깨달은 주사섬이 황급히 큰 소리로 외쳤다.
“원…해요!”
그녀가 발끝을 바라보며 보충하듯 말했다.
“…매우 원한다고요.”
장서전은 마음이 들뜬 나머지 누이동생의 앞길을 막는 대신들조차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따끔한 일격을 날린 후 그들이 또 어떤 핑계로 누이동생을 반대하는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어째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초조해진 주사섬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진심이에요.”
“그럼 입을 맞춰 주면 믿겠소.”
“…좋아요.”
장서전의 눈 속에 담긴 욕망이 더욱 짙어졌다.
* * *
한편, 거처로 돌아온 서 이랑은 답답하고 우울했다. 그녀는 자신이 대체 뭘 잘못한 것인지 몰라 초조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상하게 맺어진 혼약이 남편에게 자신을 불편한 존재로 만든 걸까?
주사섬은 서 이랑에게 매우 잘해 주었고, 장서전 역시 매달 한두 번 정도는 그녀를 찾아와 가까운 거리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그녀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초심을 잃고 너무 많은 걸 바라게 된 걸까?’
한 번도 첩실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배워 본 적이 없는 서 이랑은 풀리지 않는 숙제에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자식은커녕 회임 소식조차 없었다.
서 이랑의 하인 서 마마媽媽는 주인의 초조한 모습에 탄식했다. 정실부인인 주사섬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부인은 서 이랑이 가끔 실례를 범해도 화를 내지 않았고, 그녀가 몰래 나리께 응석을 부리고 추파를 던져도 모르는 척 묵인했다.
‘이를 어쩐다… 첩실이 정실부인과 다퉈서는 안 되는데.’
안타깝게도 첩실은 나리가 생각이 나면 마주할 뿐, 그게 아니라면 사실상 계집종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 * *
“황후로 책봉할 수 있지요. 하지만 폐하, 천하에 널린 어진 여인들을 후궁으로 들이는 은혜도 베푸셔야 합니다. 한 여인만을 총애하여 황실에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라에 우환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용상 위에 앉은 구염락은 아래에 늘어선 대신들을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쥐꼬리만 한 재주마저 바닥이 난 문신들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고양이를 물 태세였다.
“좋다.”
그건 마치 전쟁에서 몇 안 되는 적군의 목을 베듯 쉬운 일이었다. 구염락에게 후궁을 뽑는 건 단지 개나 고양이를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답답해서 죽는 건 그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낸 스스로의 발등을 찍게 될 것이다.
황제가 이리도 쉽게 윤허할 거라 생각지 못한 문신들은 하마터면 기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어느덧 그가 제위에 오른 지도 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태자 시절 그토록 온화하던 구염락은 황제가 되자마자 냉혹한 자로 돌변하여 조정 중신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잔인한 구석이 있어 교묘히 비꼬거나 욕설을 퍼부어 창피를 주는 방법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마침내 후궁을 들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대신들은 후궁으로 들여보낸 딸을 이용해 베갯머리에서 황제를 움직이리란 기대에 부풀었다.
권서함은 부친 권 노야의 뒤를 이어 문신의 선두에 서 있었다. 군신들은 자연히 그의 아버지를 대하듯 권서함을 공경했다.
권서함은 황제의 선언에 놀란 대신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순전히 현비를 황후로 봉하기 위하여 그 조건을 수락한 것뿐, 다음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벌써부터 그들의 딸이 귀비에라도 오른 양 흥분하고 있었다.
현재 황궁에는 총애는커녕 황제의 눈 밖에 난 여인이 둘이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으로, 외모와 재주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새 후궁이 들어온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권서함은 대신들이 자신들의 딸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면 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관 대열의 선두에 선 서숭산은 마음이 심란했다. 어렵사리 길러낸 황제가 과거의 은혜를 잊고 칼날을 겨누는 모습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현천기는 실눈을 떴던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일을 꾸미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것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구염락은 순종적인 제왕이 아닐 뿐더러 남자라면 마땅히 가질 법한 흔한 정복욕도 없었다. 심지어 미색을 탐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구염락은 어린 시절부터 여인들이 부리는 온갖 술수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봐 온 자였다. 그에게 머리를 쓸 줄 아는 여인은 독사, 그렇지 않은 여인은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장서열이라도 예외일 리 없었다. 현천기는 만약 장서열이 황제의 가장 비천한 시기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그의 마음을 얻지 못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장 순수하던 시절에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장서열이라 한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제왕의 사랑을 장담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장서열의 성공은 아무도 따라할 수 없었다. 황제를 다시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만일 정말로 그러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현천기는 제일 먼저 구염락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절대로 지금처럼 전전긍긍하며 사는 처지로 전락하지 않았으리라.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린 현천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신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이제까지 봐 온 제왕의 성품을 잊은 채 벌써부터 후궁에서의 권력 다툼을 걱정하고, 후손 대대로 가문을 빛낼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서풍엽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황제가 비妃를 들이든 말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장서열이 황후가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고, 구염락은 살면서 절대로 그녀를 섭섭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황후로 세운 뒤 황자를 태자에 봉하면 어머니와 아들 모두 고귀한 신분이 되니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목적을 달성한 구염락은 아랫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조정 대신들이 얻지 못할 부귀영화를 위해 정말로 딸을 궁에 가둘 생각인 건 놀라웠으나, 어차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백국의 투항서는 경들도 모두 읽었을 것이다. 헌원 상서는 사후 처리를 해야 하므로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각지의 곡창을 돌아보는 일까지 할 여력이 없다. 경들은 헌원 상서 대신 추수 물품을 비축할 명사를 한 명 천거하라.”
“영명하십니다, 폐하.”
대신들은 그가 갈수록 지혜로운 황제가 되고 있음에 기뻐했다. 이제까지 황제는 후궁도 뽑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했으며,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할 뿐만 아니라 마뜩찮은 말을 하는 자는 공기처럼 대했다.
이런 제왕을 견딜 수 있는 신하는 많지 않았다. 문신들은 연장자를 존중하고 예의범절에 철저한 제왕을 좋아했다. 제왕은 가끔 우매할 수도, 피를 토할 정도로 신하를 혼낼 수도 있으나 결코 신하를 우습게 알아서는 안 된다. 작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한두 명의 신하만 편애하는 제왕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매일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제왕은 견딜 수 없었다.
신하들은 절대적인 황권을 가진 제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일은 참 다행이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마침내 황제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후궁을 들인다는 건 곧 더 많은 자식을 낳겠다는 뜻이니, 듣기에 참 좋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구염락은 신하들이 감격한 이유를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설령 또 한 번의 생을 살게 된대도 구염락은 결코 귀족들의 음흉한 행동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그 족속들은 토지부터 지식까지,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모든 자원과 기회를 통제하면서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싶어 했다.
구염락이 장서열을 좋아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귀족이지만 결코 귀족답지 않은 장서열에게선 귀족들 특유의 가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가끔씩 다른 귀족들보다 더 거만하게 굴긴 했지만 그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황후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