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탁자 옆에 앉은 장서열은 패기가 느껴지는 봉황관을 바라보았다. 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구염락이 장인들을 닦달해 봉황관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어떻게 황후의 물건에 ‘구九’ 자를 사용할 생각을 했는지 놀라웠다. 아홉 마리의 봉황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 필요했을 것이다. 황후의 봉황관은 대부분 여덟 마리의 봉황으로 꾸며졌고, 이미 세상을 떠난 효자태후 역시 동일한 봉황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뜻밖에 아홉 마리가 새겨진 봉황관을 제작했다. 장서열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 뒤로 온기가 느껴졌다. 단단한 두 팔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자 익숙한 남자의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드나보군. 짐도 매우 마음에 들어.”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마음에 들어요.”
구염락의 웃음에는 감출 수 없는 자랑과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마음에 들면 매년 하나씩 만들어 줄게.”
그 말에 안색을 굳힌 장서열이 구염락을 짐짓 노려보았다.
“매년 황후를 새로 세우려고요? 꿈 깨세요!”
구염락이 웃으며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서열아, 사랑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장난스레 웃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구염락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하려던 짓을 포기했다. 잘못하면 앞으로 그녀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 황자가 유모에게 안겨 나왔다. 말똥말똥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황자는 확실히 태어났을 때보다 많이 튼튼해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또래에 비해서는 연약했고, 몇 가닥 나지 않은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했다.
황자는 작은 손을 흔들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가 장서열을 보자 갸우뚱한 얼굴이 되었다.
황자를 안아든 장서열이 아기의 작은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지자 장서열도 함께 따라 웃었다.
구염락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장서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다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아들의 얼굴을 콕콕 찔렀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힐끔 노려보았다. 그러자 구염락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그렇게 안아 주지 마. 그러다 유모에게 가지 않으려고 하면 어쩌려고.”
“알았어요. 잠깐이에요.”
장서열은 이번 생에서 만큼은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내 머리카락 만지지 말아요. 느낌이 이상하거든요.”
“어디가 이상한데?”
구염락이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들었다. 우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특유의 매력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당신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예전에는 내가… 아무튼 만지지 말아요.”
구염락은 못 들은 척 계속 면을 먹으며 말했다.
“가을 사냥철이 다가오는데 함께 갈까?”
황아皇儿에게 시선을 고정한 장서열이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언제예요?”
“보름 뒤.”
“봐서요. 황아에게 별일이 없으면 갈게요.”
“…….”
“착하지… 울지 마. 울면 착한 아기가 아니야. 부황을 찾는 거니? 하하, 부황은 사냥에 널 데리고 가지 않아, 이 꼬맹아…….”
구염락이 장서열을 톡톡 두드렸다.
“식사해야지. 음식이 식겠어.”
“알았어요. 황아야, 아바마마가 참 나쁘구나. 그렇지? 어미와 놀지도 못하게 하니 말이야.”
장서열은 말을 마치고도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강보에 싸인 아기와 놀았다.
구염락은 황당했다. 그 역시 틈틈이 아이에게 애정과 호기심을 표시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 대부분 멀리서 아이를 힐끔 바라보거나 하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아이를 살짝 만져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 또한 다른 부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엄 있는 부친이 되고자 했다.
황아를 마주한 첫날, 장서열에게 달려드느라 추태를 부린 것을 제외하면 구염락은 모든 면에서 매우 훌륭한 아버지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 * *
밤의 장막이 내리자 번화가에 위치한 수많은 인가의 등불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조씨 가문의 저택에서는 서재를 나온 장서전이 후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장서전은 속으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황제가 현비를 황후로 세우려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레 찬반 여론이 나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누이동생이 과거로 인해 황후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헛소리였다.
어린 시절 다른 남자와 정혼을 한 일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해묵은 옛일을 물고 늘어지는 이들에게 장서전은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누이동생의 위로를 떠올리며 짜증나는 대신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딸이 입궁할 기회를 얻지 못하자 괜한 억하심정으로 서열이까지 황후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흥! 그래 봐야 폐하께서 결정한 일을 너희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장서전은 이제 구염락을 폐하라 칭하는 게 매우 익숙했다. 타고난 제왕인 듯 절로 신하를 승복하게 만드는 그를 볼 때면 왜소하기 그지없던 초혜전의 남자아이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황후가 되는 건 당연한 순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과거 그녀가 구염락에게 한 그릇 한 그릇 정성 들여 밥을 먹이던 정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 시절 누이동생이 다른 사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구염락을 돌보았던 일을 생각하면 장서전은 왠지 모를 감격과 함께 한편으로는 오싹해지곤 했다.
‘만약 그때 서열이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장서전은 한때 구염락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자신의 말로를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노야.”
남편이 들어오자 주사섬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꽃이 피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장서전은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끼며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음식을 했나보군. 멀리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오.”
천천히 다가온 서 이랑이 주사섬의 뒤에서 수줍은 듯 절을 올렸다.
“노야, 부인께서 노야께 몸보신을 해 드리기 위해 버섯을 넣고 고기를 삶았습니다. 신첩도 참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지요. 부인께서는 정말 솜씨가 좋으십니다.”
말을 마친 서 이랑이 다시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주사섬보다 한결 부드러운 자태로 얌전히 고개를 숙인 모습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장서전은 고개를 끄떡인 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주사섬은 서 이랑을 데리고 식사를 준비하며 그녀에게 격려의 미소를 보냈다.
서 이랑은 수줍게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전 그녀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음에도 주사섬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서 이랑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 문안인사 시간에 장서전을 마주치는 건 극히 드문 일인 데다 그는 점심에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서 이랑은 매일 저녁, 부인의 식사 시중들 때에만 그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식사하셨소?”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장서전이 자리에 앉았다. 연경의 미남다운 훤칠한 키와 무관 특유의 거친 면모가 매력적이었다.
주사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나오는 길입니다. 어머니께서 습자 연습을 하시기에 물러 나왔어요.”
서 이랑이 얼른 주사섬을 위해 반찬을 집어주었다. 주사섬 역시 세심하게 장서전의 식사 시중을 들며 말했다.
“며칠 후면 어머니께서 입궁하세요. 아이를 고모께 보여 주고 싶으시대요.”
장서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전은 어린 시절 그리 예쁘지 않았던 누이동생을 떠올리며 예쁜 딸을 데리고 가 누이동생을 실컷 놀려 주리라 다짐했다.
“무엇을 가지고 갈지 생각해 놓았소?”
“어머니께서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괜히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고, 황자 아기씨께서 아직 어려 약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요. 아, 대신 현비마마께서 예전에 좋아하시던 붓과 먹을 가져가겠다고 하셨어요. 성의만 전달하면 된다고요.”
장서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도 가오?”
주사섬은 식사할 때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남편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마찬가지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네… 어머니께서 함께 가자고 하셨어요.”
말을 마친 주사섬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다.
이를 본 장서전은 마음이 설렜지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결코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새 옷은 지었소?”
감격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는 주사섬의 눈 속에 기쁜 빛이 반짝였다.
장서전은 이렇듯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그녀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 겨우 이런 일에 기뻐할 정도로 부인을 박대했다고 생각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부인이 기뻐하자 장서전 역시 속으로 만족했다. 비록 자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정실부인이지만 아직 어린 아가씨인 주사섬은 순수하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이든 명료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으며 남편을 몹시 신뢰했다. 그녀는 단 세 마디로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던 누이동생이나 훈계에 정통한 어머니와는 완전히 달랐다.
장서전은 문득 외가에서 외숙과 함께 머물던 나날을 떠올렸다. 당시 그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외가에서 그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 다 엉망인 취급을 받았다.
어렵사리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열셋째 구염락이 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장서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걸.
오늘날 다른 사람들 눈에 장서전은 누구보다도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거 그는 어린 누이동생에게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들킬 만큼 바보처럼 굴었으며, 아버지가 그들 오누이를 미워했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부정해 왔다.
“노야…….”
문득 정신을 차린 장서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주사섬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 그들 오누이가 아버지에게 바란 것은 오직 사랑이었다. 하지만 부친은 어리고 무지한 자식들을 철저히 도구로 이용했다.
‘만일 서열이가 아니었더라면…….’
장서전은 부친이 ‘아끼는’ 자식들을 떠올리며 냉소를 금치 못했다. 예전에는 알지 못해서 내버려 두었고, 알게 된 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반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장서전은 제법 한가했고, 그의 누이동생은 곧 황후로 봉해질 예정이었다. 장서전은 머지않아 부친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이었다.
장서전은 당황한 주사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귓불까지 빨개진 주사섬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남편을 위해 계속 반찬을 집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