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삼대천에서 오대천을 가려면 사대천인 성세안락을 지나야 한다. 이미 혼례를 올린 여자는 그 앞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헌원가는 당자의 이름을 빌려 귀족들만 지날 수 있는 길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처음에 헌원가는 저 멀리 보이는 옥호접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길을 지나는 여인이겠거니 생각하던 헌원가는 뜻밖에도 익숙하면서도 볼썽사나운 장면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지금 백주 대낮에 세 남자가 약하디약한 여인을 괴롭히는 거야? 그렇다면 그간 셋이서 함께 도덕군자인 척 위선을 떨고 있었단 소리군!’
이윽고 헌원가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서풍엽과 권서함에게도 저런 세속적인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헌원가를 발견한 건 서풍엽이었다. 잠시 멈칫한 그는 반사적으로 일행과 거리를 멀리했다. 서풍엽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권서함 역시 입구에 선 헌원가를 발견한 후 서둘러 옥호접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두 남자는 마치 이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헌원가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본 후에야 비로소 안심했다. 그녀는 매우 놀랐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권서함과 서풍엽은 결코 가벼운 남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헌원가는 류소경은 믿지 않았다. 그는 저러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었다. 평소에 여인을 싫어한다며 대놓고 질색하던 사람이 오히려 뒤에서 그와 정반대의 본색을 드러내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흥! 쓰레기 같으니라고.’
헌원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드시 장서열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리라 다짐했다. 류소경이 평소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를!
“그만 닥치고 저리 꺼져!”
류소경은 연지 냄새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권서함은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 빠져 나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헌원가에게 다가갔다.
“당 부인, 바람을 쐬러 나오셨나 봅니다.”
“네. 남편과 함께 아래에서 경주를 했어요. 권 공자께서는 어쩐 일이신가요?”
“아, 저는 위에서 막 내려오다 마침 소경을 찾는 아가씨와 맞닥뜨린 참입니다.”
서풍엽이 다가와 한 마디 거들었다.
“류 대인이 저 아가씨의 장삿길을 막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 친구는 여인이 한나절을 빌어도 봐줄 생각을 안 하는군요.”
설명을 마친 서풍엽이 화제를 돌렸다.
“당 부인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올라오셨습니까?”
헌원가는 류소경과 여인에게서 시선을 뗐다. 류소경은 비록 옹졸한 성격이지만 어쨌든 여인에게 허튼짓을 할 위인은 아니므로 적어도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동생과 정혼한 아가씨와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아가씨가 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어서 데리러 가는 길이에요. 혹시 주소유 아가씨를 못 보셨나요?”
헌원가의 마지막 말은 다급했다.
“아니요.”
권서함과 서풍엽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헌원가의 마지막 물음은 어불성설이었다. 엄연히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그들이 여인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헌원가의 머릿속은 아직도 혼례를 올리기 전처럼 허술한 모양이었다.
다소 생각이 없어 보이는 헌원가의 이런 모습을 당자는 오히려 시원시원한 태도로 여겼다. 그는 혼례를 올린 뒤에도 헌원가가 경마장을 누비며 외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물론 헌원가와 현비의 친분을 생각하면 누구도 감히 헌원가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헌원가를 마주치면 서풍엽과 권서함, 심지어 현천기조차도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안부를 묻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럼 두 분은 하산하는 중인가요? 아니면 삼대천에 가세요?”
경마장에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헌원상이 권서함을 형님으로 모시는 사이가 된 이상, 헌원가가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권서함과 가깝게 지낸다면 반드시 앞날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권서함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경마장에 가는 길입니다.”
헌원가가 기뻐했다.
“그럼 먼저들 가 계세요. 전 소유 아가씨를 데리고 갈게요.”
헌원가는 계집종을 데리고 서둘러 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류소경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
“류 대인, 그만하면 됐어요. 아가씨가 놀랐잖아요. 그렇게 계속 꿇어앉혀 놨다가 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말을 마친 헌원가는 치마를 든 채 곧장 뛰어 갔다. 공감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계집종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류소경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멀어지는 헌원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하찮은 기녀 따위가 놀라는 게 뭐 어때서!”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류소경이 다시 바닥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꺼져!”
겁에 질린 옥호접은 권서함과 서풍엽을 향해 도망쳤으나 두 남자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더는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삼대천을 향해 이동했다.
잠시 후, 텅 빈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옥호접은 의아한 눈으로 오대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가 아닌 여인에 대한 호기심에 휩싸였다.
‘방금 그 여인은 누구지?’
옥호접은 생각에 빠졌다. 세자와 권 대인은 그 여인을 보자마자 즉시 안색이 변했다.
그 여인이 나타나기 전, 옥호접과 그들 사이에는 뚜렷한 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나타난 후, 그들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경계가 생겼다. 두 남자가 즉시 옥호접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이다.
옥호접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어지럽고 불쾌했다. 그 여인은 결코 자신보다 예쁘거나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보다 먼저 명문가의 사내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고, 그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만일 내가 황실이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면 그들 역시 나를 그토록 무시하지 못 했겠지!’
옥호접은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한탄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했다. 자신은 분명 그 여인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권 대인과 세자는 그 여인을 대하는 것의 반만큼도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단 말인가.
옥호접은 설령 가슴 아플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 여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마음에 들어? 99명의 장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거야. 봐, 봉황 아홉 마리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지? 이건 구족이 평안한 걸 뜻하고, 위에 상감한 999개의 진주는 모든 이치가 돌고 돌아 원래의 자리를 되찾을 거라는 뜻이야.”
구염락이 자랑스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게 했어. 짐은 구법九法(서경에 기록되어 있는 정치 도덕의 아홉 원칙)을 숭상하는 사람이고, 마침 짐의 성에 구九자가 들어가니 꼭 마음에 들어. 나의 황후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장서열을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에는 마치 강물이 범람하는 듯한 감격이 넘실댔다. 복잡한 감정이 구염락의 전신을 휩쓸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바라온 꿈이자 한 남자로서의 맹세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구염락이 가져온 봉황관은 비록 역대 모든 황후의 것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했다. 봉황관이 지닌 가치도 그러했으나 역대 최고의 황제로 평가 받는 영덕제가 정권을 장악한 후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황후로 올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서열아.”
손을 내민 구염락이 깊은 사랑이 담긴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손을 뻗으며 감동한 얼굴로 그의 마음을 받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만일… 그러니까 몇십 년만 더 일찍, 전생이 이러했다면 얼마나 더 감격하고 행복했을까…….
그가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 시절의 그녀는 자아를 잃게 된대도 기꺼이 사랑에 모든 걸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늦었으면 어때.’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구염락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다만 사랑이 이제 그녀의 전부가 아닐 뿐.
그녀는 자신의 성장에 반감을 느끼지도,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구염락은 반짝이는 장서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수줍어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엄숙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붉어진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동이 떠올랐다.
“사랑해, 서열아. 이 봉황관은 다음 달에 반드시 네 머리 위에 씌워질 거야.”
장서열이 황후가 되는 걸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하가 막으면 구족을 멸할 것이고, 신이 막으면 신을 죽일 것이다.
“폐하…….”
구염락이 갑자기 간절하게 말했다.
“서열아, 네게 입 맞추고 싶어. 우리 오래됐잖아. 난 정말…….”
“왜 갑자기 얘기가 그리로 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다정했던 사람 같지 않게 그가 중얼거렸다.
“서열아…….”
하인들이 조용히 물러갔다.
구염락은 교묘하게 장서열의 옷을 벗겼다. 옥처럼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가 눈앞에 펼쳐지자 일순간 그의 눈 속에 폭발이 일어났다.
“여기서…….”
정청正厅 안 연탑이었으나 장서열은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깊은 사랑이 방 안에 가득했다.
* * *
마음껏 즐긴 구염락은 장서열을 껴안고 연탑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은 기운을 소진한 뒤의 나른함으로 가득했다.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긴 속눈썹이 드리워지며 영명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나머지 한 손으로 품에 안긴 여인의 등을 쓸어내리는 동작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장서열은 노곤한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팔의 무게를 느끼며 장서열은 구염락의 품에 엎드렸다. 그녀의 반신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어렴풋이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는 전보다 더 제멋대로였다.
품에 안긴 여인이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구염락은 생각에 잠겨 있던 모습을 지우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재빨리 그녀를 덮쳤다.
목욕 후, 바깥은 매우 깜깜했다.
금빛 내의를 입고 욕실에서 나온 장서열은 하인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다. 두 시진 전 구염락은 이제 막 완성된 봉황관을 들고 조로전으로 돌아왔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구슬을 문 아홉 마리의 봉황은 눈이 부셨다.
장서열은 머리를 말리던 동작을 멈추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봉황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보.
농교가 서둘러 장서열을 도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긴 머리를 반쯤 들어 올리자 장서열의 목덜미에 아직 가시지 않은 흔적이 드러났다. 농교는 얼굴을 살짝 붉힌 후 더는 함부로 시선을 두지 못하고 얼른 장서열을 위해 머리를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