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권서함이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하자 권서함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차를 맛보았다. 청아한 빛을 띤 차는 입 안 가득 향기를 남기다 끝에 약간의 씁쓸함을 안겨 주었다.
권서함의 머릿속도 서풍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어울렸던 시절, 그녀가 짓던 미소를 떠올리며 권서함은 미인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순간을 아직 잊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하물며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정혼자로 살았던 서풍엽의 심정은 오죽하랴.
“그냥 차 한 잔일 뿐입니다. 세자가 맛보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일이 될 겁니다.”
“차에는 저마다의 특색이 있지요. 꼭 맛을 봐야만 이를 음미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서풍엽의 말에 권서함은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어차피 설득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류소경은 그들 사이에 오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역시 현비와 서풍엽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권서함의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서풍엽이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있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이미 넘볼 수 없는 신분이 아니던가.
미래에 황제가 될 아이의 생모. 황제의 유일한 여인. 내명부를 독점한 후궁. 심지어 그녀는 황제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 문무백관을 통틀어 그녀와 같은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풍엽이 그녀를 걱정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정혼했던 사이라 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진정으로 현명한 건 성가신 여인은 잊고 다시 조용한 생활을 누리는 일이다. 이렇게 계속 혼인을 하지 않고 황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옳지 않았다.
순간 황제를 떠올린 류소경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괜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황제의 존재는 그를 두렵게 했다. 그런 황제의 여인을 마음에 품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류소경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나저나 서함, 자네는 대체 어느 가문의 아가씨와 정혼할 셈이야?”
과거 류소경의 누이동생은 권서함과의 혼인을 꿈꿨으나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물러났다. 현재 권서함의 정혼 상대로 가장 유력한 건 형부刑部의 장녀와 왕가의 군주郡主로, 둘은 그야말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거의 싸울 기세인 두 여인은 곱게 자란 아가씨답지 않게 권서함과 혼인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지체 높은 두 여인이 벌이는 구경거리를 신나게 감상했다.
현재 연경 사람들은 모두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귀족 아가씨들의 싸움을 마뜩찮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이 결과로 권씨 가문에 시집갈 행운을 얻는 아가씨가 누가 될지를 궁금해했다.
류소경의 말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던 권서함이 잠시 후 담담하게 답했다.
“혼사는 어머니의 결정을 따를 거야.”
류소경은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내뿜을 뻔했다.
“아가씨들이 너 하나 때문에 각자 체면도 불사하고 싸우는 중인데, 겨우 그게 다야? 무책임하군.”
질책이 담긴 말에도 권서함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마치 누가 아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편, 관몽득은 쥐구멍에라도 숨고픈 심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리에 없는 척을 하고 싶었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 버린 이상 스스로 입단속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권 공자는 둘 중 누구도 마음에 있지 않다 이거지. 그렇다면 권 노부인께 환심을 얻는 사람이 이긴다는 소리인데,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람!’
관몽득은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체 높은 두 아가씨는 모두 엉뚱한 곳에 힘을 쏟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쪽이 시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목석같은 권서함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니.
하지만 류소경은 권서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혼사란 차라리 사랑 없이 정해진 규칙에 의존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래야만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첩실이 정실부인을 이겨 먹으려 드는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랑 없는 혼사는 겉으로는 무정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도리를 지키며 서로 평온한 생을 보내기에 좋았다.
류소경은 자신의 가문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친은 들이는 첩실마다 족족 사랑해 마지않았고, 이는 정실부인인 그의 모친으로 하여금 첩실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집안은 한바탕 울음소리와 함께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그는 본가에서 나와서 살기 시작하며 비로소 그 시끄러운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차를 맛본 후, 세 사람은 삼대천으로 말을 타러 나왔다.
관몽득은 기꺼이 류소경에게 말 한 필을 내어 주었다. 그는 아깝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많은 말을 바쳐 아부하지 못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도련님들은 관몽득이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조정 혹은 가정 내 비밀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데 익숙했다. 관몽득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관몽득은 아무리 부자라도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류소경은 혼자 말을 고를 수 있다는 핑계로 관몽득을 물러가게 했다. 더는 관몽득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관몽득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의도 차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세 사람은 한가로이 말을 탔다. 오대천 다관에서부터 녹음이 우거진 삼대천 경마장까지,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가에 들꽃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으며 멀리까지 우거진 초목은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울창한 꽃밭 사이, 구불구불한 오솔길의 끝에는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림이 수놓아진 옷자락이 휘날리는 가운데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정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세 사람을 본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귀족처럼 청아한 외모는 가을 경치도 빛을 잃게 만들 만큼 단정했다. 마치 가을날의 선녀처럼 그녀가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세 사람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돌연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이상할 정도로 공손한 얼굴은 마음 속 긴장과 당황을 잘 억누르고 있었다.
눈앞에 선 사내들은 연경과 대주국을 통틀어 손꼽히는 호걸로, 그중 한 명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일평생의 복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그녀는 무려 세 명이나 마주하고 있었다.
“소녀는 옥호접이라 합니다.”
치마 앞자락을 든 옥호접이 눈물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펼쳐진 치마는 꽃과 풀이 수놓아져 바닥에 있는 화초와도 잘 어울렸다.
옥호접은 꽃봉오리를 펼치려는 꽃잎 같았다. 그녀의 이름과 직업이 전해 주는 은근한 유혹에 남자들은 환상을 품고 설렘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옥호접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풍엽은 그녀가 문 앞에 서 있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는 같은 옷을 입지도, 지금처럼 대범하지도 않았다. 명문가의 딸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연경에서 요즘 한창 이름난 기녀였다.
류소경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황급히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는 여인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고, 특히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더욱 증오했다. 그가 옥호접을 싫어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옥호접은 귀족 자제들이 그저 이유 없이 자신을 싫어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계속 청산호에 머무르려면 그들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눈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당장은 생업을 이어가고자 했다.
옥호접이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 분 나리께 청합니다. 부디 소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소녀가 철이 없어 세 분 나리를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소녀, 다시는 청산으로 오는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본래 호수 위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청산호가 아니면 갈 곳이 없습니다. 부디 제가 청산호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소녀가 반드시 세 분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옥호접이 바닥에 엎드렸다. 무성한 꽃들 사이로 여인의 곱고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가련한 자태는 보통의 남자들에게 충분히 유혹을 느끼게 할 만했다.
옥호접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녀로 살아오며 그녀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오직 사내를 유혹하는 기술뿐이었다. 그녀는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짓밟는다 해도 생존을 위해 참기로 했다.
권서함이 서풍엽을 힐끔 바라보자, 서풍엽이 황당하다는 듯 권서함을 마주보았다.
“날 보면 안 되지. 저 여인은 자네를 찾아온 거잖아. 난 여기서 장사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권서함은 속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풍엽은 심지어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권서함의 시선이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류소경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인을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권서함은 바닥에 꿇어앉은 여인이 예쁜 기녀라는 걸 감안해 류소경의 뜻을 묻고자 했다.
게다가 류소경의 저 고질병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역시 언제 혼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다 큰 어른이 아니던가.
권서함이 류소경을 향해 바닥에 꿇어앉은 옥호접을 보라고 눈짓했다. 류소경은 차갑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고 부채를 부쳤다. 여인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퍼지는 연지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권서함이 류소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가씨가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친구입니다.”
옥호접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권서함을 바라보던 옥호접은 그가 눈썹을 찌푸리자 놀라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옥호접은 감히 류소경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다관에서 자신에게 모욕을 준 자가 류소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꺼져! 어떤 물건이 감히 이 몸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관몽득이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군.”
그 말에 이를 악문 옥호접이 울먹이며 굴욕을 참고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나리, 부디 소녀를 살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