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관몽득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분명 서풍엽만큼은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권서함이 다시 자리에 앉았고, 그가 가지 않자 류소경 또한 가지 않게 되었다.
관몽득은 뛸 듯이 기뻤다. 과연 좋은 마음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는 모양이었다.
‘잘됐다. 정말 잘됐어!’
“금방 차를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 잠시 나가 보겠습니다.”
관몽득은 문을 나서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아름다웠으나 그에게 은자 만 냥에 가까운 손실을 보게 한 여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옥호접이 추해 보였다. 즉시 얼굴을 굳힌 관몽득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당장 청산호 바깥으로 썩 꺼지거라. 어디든 가 버려!”
관몽득은 옥호접의 뒤에 누가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설령 양강两江 총독이 그녀의 뒤를 봐주고 있다 해도 관몽득에게는 안에 있는 세 대인이 있었다. 또한 양강 총독이 고작 기녀 한 명을 위해 천 리 길을 날아와 자신과 대적할 리 없었다.
잠시 멈칫한 옥호접이 입술을 깨물고 울먹였다.
“나리, 소인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나리께서는 어찌하여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청산호는 본래 나리의 구역이니 나리께서 나가라시면 두말없이 나가야지요. 하지만 나리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소인을 짐짝처럼 취급하십니까!”
말을 마친 옥호접은 계집종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비록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청산지주와 진정으로 말다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 또한 관몽득에게 그리 떳떳한 처지는 아니었다.
관몽득은 옥호접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얼른 하인에게 차를 올리라고 명했다.
차백희茶百戏는 다도 기법 중 하나로, 그 기술이 매우 복잡하여 일부 상류층을 대상으로 전승되었다. 사대부만이 접할 수 있던 차백희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전란 등을 겪으며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현비는 차백희에 정통한 이를 초청하여 문화의 일부분을 회복시키고 오랫동안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값비싼 다도를 재현해 냈다. 이는 다계茶界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권서함이 최고급 차를 맛보며 말했다.
“역시 청산지주는 재주가 뛰어나군. 경계가 삼엄한 궁에서 이런 진귀한 물건을 구해 오다니 역시 연경 제일의 부호다워.”
서풍엽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관몽득이 현비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미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다행히 차분함을 유지했다.
현재 류소경은 장서전의 업무를 이어 받아 궁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궁의 물자가 오가는 방식에 정통했기에 외부인이 결코 후궁과 연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석궁 소태감에게서 얻었다잖아. 궁인들이야 입이 가벼우니 은자만 주면 별 시덥잖은 일까지 술술 불곤 하지. 하지만 후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의 입은 제아무리 관몽득이라도 열 수 없어. 만일 신형사에 발각되고 일등공에게 보고라도 올라가는 날에는 능지처참을 당할 테니까.”
권서함이 빙긋 웃었다. 특히 류소경이 우쭐대는 모습을 보자 그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 난 네가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질책하는 게 아니야. 그저 관몽득이 유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 말에 얼른 차를 마신 류소경이 어색함을 감췄다.
“나도 관몽득이 유능하다고 생각해.”
말을 마친 류소경은 거만하게 가슴을 폈다. 오늘날 후궁이 철통 같이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권서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몸소 이 사실을 배울 기회까지 있었다. 현비의 취향을 조사하던 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에서는 심지어 현비를 모시는 계집종의 안부를 묻는 것조차 죽을죄로 간주되었다.
백국을 토벌하기 위하여 황제가 친히 출정을 나갔을 때였다. 권씨 가문은 그 틈을 타 냉궁에 접촉을 시도했다. 그들은 그저 권비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받든 어린 궁녀는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처참히 죽은 채로 발견 되었다.
권서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등공의 대응은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그 사건 이후 내명부의 하인들은 좀처럼 외부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은 낯선 이를 보는 즉시 연기보다 빠르게 도망쳤고, 결국 권서함은 이후 다시는 내명부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씨 가문은 가망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권여아를 돕고자 했다. 권 노부인은 권여아를 만나 편안한 노년을 보내야 한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권서함은 권씨 가문이 큰 공을 세운 후 누이동생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외에는 도무지 냉궁에 갇힌 가족에게 힘을 실어줄 방법이 없었다.
무표정한 서풍엽의 눈빛은 어두웠다. 사실 현비는 차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인 건 그녀가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에게 구태여 귀찮게 반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소녀들을 따라 차를 마셨을 뿐, 실은 우유를 넣은 과즙을 더 좋아했다. 그녀는 여름에는 살짝 얼린 과즙을, 겨울에는 입 안이 데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김이 서린 과즙을 즐겨 마셨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어린 고양이처럼 따뜻한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만의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서풍엽은 이제 그녀의 일상에 등장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추억은 다른 기억으로 덮일 것이다. 그는 한 줌의 모래처럼 그녀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질 터였다.
서풍엽은 가슴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마치 익숙한 친구를 바라보듯 자신을 향해 고요한 미소를 짓는 장면을 상상하자 그는 영혼이 뽑혀 나간 사람처럼 어디에도 마음을 의지하지 못했다.
관몽득이 들어왔다. 진지한 얼굴을 한 그의 뒤에는 혈색이 좋은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하얀 수염과 눈썹을 지닌 노인은 자세가 곧고 우아했으며, 속세를 초월한 신선 같은 인상을 주었다.
거만하게 들어오던 노인은 문득 자리에 앉아 있는 권서함을 발견한 후 그제야 약간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노인은 과거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로, 재주를 파는 걸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노인은 청렴결백한 관리로 떳떳이 살았으며 아무도 자신의 학식을 능가할 수 없다고 여겼다. 문관 이외의 직업을 천시했던 그는 처와 자식을 돌보지 않았다. 가정은 빈곤했고 모친은 약을 살 돈이 없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그의 처는 중병에 든 상태였다.
텅 빈 집에서 유일하게 그럴 듯하게 꾸며진 서재를 둘러보던 노인은 젊은 시절 업적을 살펴보다 불현듯 모순을 느꼈다. 때마침 청산지주가 다도 사부를 필요로 했고, 그는 청산에 들어왔다. 늙디늙은 그의 몸은 재주를 팔며 비로소 오만함을 벗게 되었다.
노인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다도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대부분 고상한 이들이었고, 노인 역시 이 방면에 탁월한 자였다.
그러나 오늘 차 시중을 들어야 하는 상대는 무려 권 대인이었다. 노인은 그 앞에서 절대 고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단목으로 만든 차반이 세 사람 가운데에 놓였다. 붉은 주전자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주전자 옆면에는 어린 시종이 장난스럽게 웅크리고 앉아 부채를 부치는 모습이 백옥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집중하느라 작은 입을 벌린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었다.
노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전자가 아닌 차반에서 찻잎을 한 번 더 씻었다.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모습은 마치 신선인 양 모든 동작에서 진한 운치가 느껴졌다.
차백희는 뛰어난 손기술을 필요로 했기에 오랫동안 전승되지 못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현비가 언급한 것을 계기로 장인을 찾게 되었다. 황제는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여 차백희의 고장을 수소문해 노인을 데려왔다.
노인은 무려 한 달을 연습한 끝에 수면 위로 짙은 차향이 어우러진 매화 한 송이를 그려냈다. 노인이 만들어 낸 매화 문양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매화가 찻물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봉오리를 맺었다가 활짝 피어났다. 권서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느새 두 번째 잔을 따르기 시작한 노인이 공손한 손길로 무武 자가 그려진 고동색 찻잔을 세자에게 건넸다.
작은 잔을 손에 든 권서함이 놀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며 물었다.
“이게 현비마마께서 찾아낸 다도 기법입니까?”
관몽득은 기뻐하는 권서함을 보며 즉시 답했다.
“예, 대인. 소태감이 말하길, 차백희에 사용된 문양은 현비마마께서 직접 그리신 것이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몹시 기뻐하시며 마마께 훌륭한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구염락은 고작 차 한 잔에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찻물 위에 성심성의껏 그림을 그리는 건 참으로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부국강병과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학문과 예술이 함께 부흥해야 한다는 장서열의 말이 떨어진 후에야 구염락은 간신히 노인에게 한두 마디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소태감이 차백희를 궁 밖으로 유출하는 걸 용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다관에서 차를 마셔본 권서함은 물론 차백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부신 매화와 훌륭한 서체는 처음이었다. 어떠한 도구도 활용하지 않고 오로지 물과 찻잎으로 만들어 낸 작품은 아부하는 데 도가 튼 사람보다 훨씬 훌륭했다.
“훌륭하군요. 작품을 감상하고 향기를 맡으며 맛을 음미할 수 있다니, 실로 최고의 경지라 할 만합니다.”
노인은 살짝 몸을 움찔했다. 고풍스러운 풍경 앞에 신선 같이 꿇어앉은 노인의 모습은 차의 향기를 한층 더 그윽하게 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하는 권서함과 달리, 뼛속까지 무관인 류소경은 친구의 감상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던 서풍엽은 결국 차를 마시지 못한 채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거운 부담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황자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비어 있는 황후 자리에 거론되는 유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풍엽은 역사를 통틀어 어떠한 후궁도 그녀가 받는 총애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마음은 늘 한결같았고, 이제는 서풍엽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 시도하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