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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9)화 (269/449)
  • 제269화

    오대천에서 가장 귀한 별채에 도착한 관몽득은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옥호접에게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했다. 그녀가 필요한 상황이면 들어오게 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야 했다.

    옥호접은 그저 웃어 보였다. 그녀는 재물의 신처럼 부귀한 관몽득에게 감히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관몽득에 비하면 그녀는 하찮은 부평초에 불과했다.

    오늘 옥호접이 관몽득의 아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녀로서 명성을 날리는 그녀를 궁금히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로서는 관몽득에게 모욕적인 말이나마 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었다. 대주국에서 제일 부유한 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치 않았다.

    문을 밀어 젖힌 관몽득이 온갖 보석과 옥, 마노로 치장한 손을 펼치며 공손하게 앞으로 나아가 큰절을 올렸다.

    “소인, 권 대인과 류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두 분께서 누추한 오대천을 찾아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관몽득이 아첨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형식적으로 대충 절을 올릴 생각이 없는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특히나 그는 권서함 앞이라면 보잘 것 없는 자만심을 접고 몸을 웅크리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좋은 날 오셨습니다. 마침 오늘 다관에 차가 새로 들어왔으니 두 대인께서 먼저 맛을 보시고 평을 내려 주신다면 이곳 다관에 무한한 영광일 것입니다.”

    그 말에 일그러진 류소경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비록 기분은 여전히 언짢았지만 서슬 퍼런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류소경은 아첨에 있어서는 관몽득을 따를 자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그의 아첨은 진실되지 못했으나 그 태도만큼은 진정성이 넘쳤을 뿐더러 사실 따지고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권서함의 평가를 받는 건 찻잎에게도 크나큰 복이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지주께서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먼 곳에서 급히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권서함이 차를 맛보며 천천히 말했다. 관몽득은 다시 한번 감사의 절을 올리며 아부 섞인 눈길로 류소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정말로 다루기 힘든 사람은 권서함이 아닌 류소경이었다. 사실 류소경의 지위는 관몽득이 그리 황공해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권서함과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류소경은 태생적으로 여인을 싫어했기에 주변에 여인이 눈에 띄는 순간 꼭 문제를 일으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필 옥호접이 오늘 류소경의 눈에 띌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밖에서 여유롭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옥호접은 이들의 신분을 짐작할 만한 단어가 들리자 순간 긴장과 황공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 있던 어린 계집종까지 영문도 모른 채 함께 긴장할 만큼 떨리는 얼굴이었다.

    옥호접은 아직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방금 청산지주는 상대를 ‘권 대인’이라고 불렀다.

    그가 저리 황공해 하며 권 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연경에서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명문세가 권씨 가문은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내려온 대주국의 귀족 집안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진정한 선비 가문이자 문인들의 우두머리였다.

    ‘권씨 가문의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올 줄이야!’

    옥호접 역시 수많은 대가들의 시중을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모두 권씨 가문 앞에서 그저 코끼리 앞의 개미에 불과했다. 같은 부류라고 묶을 수조차 없었다. 옥호접은 남자를 유혹하는 재주마저 잊은 채 권 대인을 한 번 만나볼 수만 있다면 평생의 운을 다 써도 좋다는 기대를 걸었다.

    옥호접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용모가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권 대인의 눈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류소경은 호된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그는 누군가 옥호접을 만나는 특권을 누리는 걸 비판하는 게 아니라, 연경의 분위기를 흐리는 그녀를 오히려 청산에서 부추기는 행태에 대해 강한 질책을 이어갔다. 심지어 그는 몸을 팔려면 홀로 조용히 팔 것이지 어디서 글과 벗을 핑계로 청산의 길을 막느냐며 거의 포효에 가까운 폭언을 쏟아냈다.

    옥호접은 문 밖에서 이를 깨물며 수치심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지만 이런 모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평소 그녀는 분수를 지키려 노력했고, 가끔 잘난 척을 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류 대인이라는 저 듣도 보도 못한 작자가 자신에게 치욕을 안긴 것이다.

    ‘저자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수치심에 물들어 있던 옥호접의 낯빛이 곧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권 대인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누구보다도 금 연주와 노래에 탁월했다. 그런데 그런 재주를 칭찬하기는커녕 사람을 함부로 짓밟다니! 정말이지 저속한 자였다.

    옥호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억울한 듯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으나 감히 큰소리로 울지는 못했다. 그 모습은 특별히 더 가여워 보였다.

    그때, 서풍엽은 막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여전히 웅장한 천자일호天字一号 다관으로 들어오던 그는 뜻밖에도 문 앞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우는 모습을 발견하고 순간 멈칫했다.

    ‘여기가 맞나? 권서함과 류소경이 천자일호에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류소경 근처에 여인이 있을 리 없었다.

    옥호접은 환한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웅의 기세 속 온기와 냉기가 뒤섞인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제껏 수많은 사내를 접한 옥호접조차 순간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옥호접은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린 뒤 옷소매로 얼굴에 엉킨 눈물자국을 아무렇게나 지웠다.

    서풍엽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다관의 시종은 문 밖에 웬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곧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지주께서 들어가셨으니 옥호접은 아마 안에 계신 대인들께 보여드리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일 터였다.

    성세안락에서 수많은 미인들을 보아온 시종이 보기에도 옥호접은 매우 예뻤다. 대인들이 그녀를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세자, 안으로 드시지요. 권 대인과 류 대인께서 먼저 와 계십니다.”

    그 말에 눈물을 닦던 동작을 우뚝 멈춘 옥호접은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몸을 획 돌렸다. 그녀는 수치심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옥호접은 얼굴을 팔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필 절대로 자존심이 구겨져서는 안 될 사람 앞에서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옥호접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이 무슨 명목으로 대주국 제일의 기녀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서풍엽은 여인이 하는 짓이 참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권서함의 정혼자인가? 하지만 그가 정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고 누군가 권서함을 사모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저 여인은 대체 누구기에 여기에 있는 거지?’

    “어딜 보십니까?”

    갑자기 고개를 쳐든 옥호접이 교태 섞인 눈으로 서풍엽을 노려보았다. 아이처럼 수줍어하는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몹시도 설레게 했다.

    옥호접은 곤란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위기를 반전 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그야말로 망가진 체면을 다시 세우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전 시종은 그를 ‘세자’라고 불렀다. 그녀가 틀리지 않았다면 남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존귀한 인물이었고, 그녀의 일생을 다 바쳐도 낚을 수 없는 대어 중의 대어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처럼 거물을 만나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어 놓고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옥호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연경에 거물들이 많다는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분발하지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서풍엽은 그녀를 무시한 채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몽득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 서풍엽이 곧장 류소경을 향해 물었다.

    “밖에 있는 여인은 누구지? 네 누이동생?”

    “무슨 소리야? 내 누이는 정혼한 몸이라 저택 밖을 나설 수 없어.”

    관몽득이 식은땀을 흘렸다.

    ‘큰일이다.’

    “하하… 세자께 아룁니다. 바깥의 여인은 이번에 청산호에서 화방画舫을 운영하게 된 옥호접이라고 합니다. 소인이 부주의하여 세자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

    순간 류소경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물건을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고?”

    쨍그랑!

    손에 든 찻잔을 바닥에 내던진 류소경이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서함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고, 서풍엽 또한 그들을 따라 몸을 돌렸다.

    관몽득의 뚱뚱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초조해진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세 분 대인께서는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인이 바로 여인을 내쫓겠습니다. 바로 내쫓고 말고요! 권 대인, 다시 자리해 주시지요. 다관에 새로운 차가 더 들어왔습니다. 황궁에서 나온 차로 아직 바깥에는 나오지도 않은 귀한 차이지요. 우연히 현비마마께서 얻은 차라고 하니 권 대인께서 맛이 어떠한지 살펴 주십시오.

    류 대인께서도 앉으십시오. 삼대천에 아주 날쌘 명마가 한 필 들어왔습니다. 마침 알맞은 주인을 찾고 있는 중이니 소인이 잠시 뒤 대인께 보여드리겠습니다. 만일 류 대인의 눈에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말의 복이지요!

    세자, 세자께서는 이제 막 들어오셨는데 어찌 차도 한 잔 아니 드시고 그냥 가십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차는 소인이 조석궁의 소태감에게 어마어마한 은자를 써서 얻어 낸 귀한 차입니다. 그러니 세 분 대인께서는 어서 앉으시지요. 어서요.”

    관몽득이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웃었다. 그의 상냥한 표정은 마치 심장이라도 꺼내 줄 듯 간절했다. 관몽득은 진심으로 그들을 붙잡고 있었다.

    “어서 세 분 대인께 차를 올리지 않고 뭣 하는 게냐! 차백희茶百戏(차를 달이는 과정에서 차 수면 위에 문양을 만드는 기법)에 정통한 이를 불러와 시중을 들게 하라!”

    관몽득에게는 정말로 귀한 차가 있었다. 그간 제대로 우릴 줄 아는 이가 없다는 핑계로 감히 내놓지 못한 차였으나 오늘 세 귀빈을 붙잡기 위하여 그는 기꺼이 출혈을 감수하기로 했다. 세자의 앞에서 현비를 언급했다는 건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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