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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8)화 (268/449)
  • 제268화

    뛰는 주인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 분명한 왕 마마의 얼굴은 온통 빨개져 있었으나, 그녀는 당황한 기색 없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현비에게 절을 올렸다. 다만 만 귀인의 뒤에 설 때 호흡이 조금 가빴을 뿐이다.

    만정은 왕 마마를 힐끗 쳐다보았을 뿐 먼저 뛰어온 것에 대해 달리 해명은 하지 않았다. 왕 마마를 향한 만정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도록 길을 인도해주는 왕 마마에 감사했으나 주인인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훈계하는 태도에는 반감을 느꼈다.

    왕 마마와 만정을 번갈아 바라본 장서열이 별다른 말 없이 온화하게 웃었다.

    “겨우 그 정도로 화를 내면 어떡해? 나중에 폐하께서 권비를 냉궁에서 꺼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리가 나겠구나.”

    “뭐라고요? 언니, 언니는 화도 안 나요?”

    화 마마가 만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서둘러 막아할 것이 아닌가!

    ‘화 마마가 저리 멍청했던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왕 마마는 하루빨리 복수원福寿院에 들어가 편히 노후를 보내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권비를 냉궁에서 꺼내는 건 더할 나위 없는 묘수였다. 현비가 권비를 구해 준다면 권씨 가문은 현비의 편이 되는 것과 동시에 현비가 황후 자리에 오르는 데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왕 마마는 평온한 현비의 태도에서 이미 황제와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눈치챘다. 황제는 현비의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해결책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화 마마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왕 마마는 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화 마마가 그간 하찮은 주인을 모시느라 둔해졌음에 탄식했다. 그런 화 마마가 이번에 현비를 모시게 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왜 화를 내지?”

    차를 맛본 장서열이 만정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 날 위해 권씨 가문에 은혜를 베푸는 데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온갖 방법으로 날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데 화를 내야 할까?”

    만정은 갑자기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황제가 냉궁에 갔고, 권여아가 재기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러나 장서열은 냉궁에서 나온 권여아가 정심전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처럼 총애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권여아는 누구에게도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고, 태후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던 궁녀와 태감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권세를 잃은 태후와 권여아는 이미 하인들을 챙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권씨 가문 여인들에게 발탁되어 큰 은혜를 입은 궁녀와 태감들은 결국 두 사람을 돌보지도, 무조건적으로 주인으로 섬기지도 못하리라.

    그러니 권씨 가문이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권여아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었고, 차라리 재혼을 하더라도 그녀가 스스로 깨우쳐 옛 사랑에 얽매이지 않길 빌어야 했다.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길이었으나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 가문은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만정은 장서열을 믿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전 좋은 소식을 기다릴게요.”

    말을 마친 만정은 다시 재빨리 뛰어나갔다. 왕 마마는 황급히 절을 올린 뒤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으나 체통을 불사하고 막무가내로 달리는 만정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만정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뜬 화 마마가 순식간에 사라진 만 귀인에게 탄복했다. 궁에서 이토록 왕 마마를 어이없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만정뿐이었다.

    떠나는 만정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눈가에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그녀는 몸이 좋아지면 만정과 함께 나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비가 그친 뒤, 한줄기 가을바람이 새파란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을 만들었다. 문인들은 가을과 관련한 시를 읊으며 흥을 돋웠다.

    청산호에 정박한 옥 화방玉画舫은 수많은 명문자제들과 풍류가들을 불러들여 미녀들과 함께 시와 음악을 논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고지식한 문인들은 옥호접의 유명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풍류를 아는 이들은 글을 통해 벗을 사귀는 옥호접의 콧대를 꺾고 싶어 했다.

    줏대 없는 이들은 옥호접의 미모에 눌려 그녀의 시문과 연주 실력이 모두 천상의 것이라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들은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술에 취하는 것이며, 색이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색에 미혹되는 것이라는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옥호접은 여론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맨손으로 고요한 호수를 휘저어 놓는 재주는 그녀가 풍류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유이자, 수많은 자매들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였다.

    옥호접은 수많은 문인들과 대학자들의 민낯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여인을 품에 안았는지를 두고 허풍을 떠는 것이 남자들의 취미였다. 하지만 어떤 여인들에게는 누가 더 대단한 남자들을 만나 침대에 쓰러뜨렸는지가 최고의 여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법이다.

    그녀는 비록 그들의 고귀하고 은밀한 침대에까지 올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남자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옷가지를 벗기며 능력을 시험해 본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청산은 여느 때와 달리 북적거렸다. 옥호접은 시작부터 승리했다. 그녀가 어망을 드리우자 순식간에 몰려든 물고기 떼는 저마다의 흥을 돋우며 마음껏 미끼를 즐겼다. 그녀는 말하는 꽃으로서 구태여 고결한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드높은 가을 하늘 위로 기러기가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상쾌한 날이었다.

    류소경은 화창한 날씨를 이유로 모처럼 절친한 벗 권서함을 끌고 나왔다. 말을 타기 위해 청산으로 나선 두 사람은 평소 일각一刻이면 도착했을 배가 오늘따라 꽉 막힌 뱃길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해했다. 무려 한 시진时辰이 지난 후, 마침내 청산에 도착한 류소경은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문회가 열리는 날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지? 도착을 했어도 말을 타고 싶은 마음이 가셨으니 누구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할지 모르겠군.”

    배에서 나온 권서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본래 뱃멀미가 없었으나 한 시진 동안 여기저기 부딪치는 바람에 하얗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말을 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류소경이 권서함을 놀렸다.

    “확실히 문관이라 그런지 체력이 약해졌군!”

    권서함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각자의 배를 두고 다른 배를 빌려 탔다. 덕분에 누구도 이들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다른 배들과 한데 뒤엉키며 기어가듯 온 것도 모자라 갑자기 배에서 헐렁한 갑판 몇 개가 떨어져 가라앉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하마터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와 그런지 사람들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변했는지 몰랐어. 청산이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가?”

    두 사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호숫가에 우글우글 정박한 배들과 마침내 헤어지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문회가 열리는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류소경은 사람이 많은 곳을 제일 싫어했다. 그들의 곁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떠들썩한 대화를 나누었다.

    “옥호접의 연주 솜씨는 천하제일이지. 그녀의 미모를 보며 연주를 듣는다면 여한이 없겠네.”

    “아쉽지만 자네와 난 미인을 만나기 어려운 처지잖나.”

    “에이, 요즘은 관 공자만 재미가 좋지. 청산지주 가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옥호접을 만나고 있으니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옥호접의 근처에도 못 갔어. 듣자 하니 관 공자가 옥호접을 첩으로 들이려다 거절당했다지? 그런데 관 공자는 화를 내기는커녕 옥호접에게 더 좋은 남자를 만나 소중한 대우를 받으라고 말했대. 대체 옥호접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런 걸까?”

    두 사람은 권서함과 류소경이 지은 황당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권서함은 좀 나은 편이었다. 그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직업은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류소경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던 이유가 고작 옥호접이라는 여인 하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찰나, 때마침 그의 눈에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기녀의 화방画舫(아름답게 장식한 놀잇배)이 들어왔다. 류소경은 누구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온 이유가 고작 여인 하나 때문이라고?”

    류소경이 코웃음을 쳤다. 청산은 연경 최고의 기방 ‘성세안락’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 각종 다관茶肆과 경마장을 소유하고 문회를 개최하는 곳이었다. 그런 청산을 한낱 기녀가 막고 있었다니. 청산의 명예가 다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류소경은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배를 정박하는 소년을 붙들고 지시했다.

    “가서 너희 관사管事를 불러오너라! 옥호접인가 뭔가 하는 계집을 당장 쫓아내라고 해!”

    깜짝 놀란 소년은 얼른 배를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관사를 찾아갔다. 이들은 눈치가 빠르다는 이유로 고용된 자들이었다.

    소년은 방금 보잘 것 없는 배에서 내린 권서함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체 높은 두 나리께서 호접 아가씨에게 불만이 있다는데 어찌 시간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소년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서둘러 뛰어갔다.

    중년에 접어든 청산의 관사管事는 소년의 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수척하게 여윈 얼굴을 핑계로 힘든 척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청산지주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렸다. 지체했다가는 지주 어르신의 노여움을 사기 십상이었다.

    관사는 허둥거렸다. 분명히 귀빈을 위한 길이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굳이 복잡한 수로를 가로질러 왔다. 가문의 유람선을 타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를 빌려 백성들과 한데 섞여 오니 그들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관사는 옥호접의 박복함을 한탄했다. 류소경이 소란을 피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옥호접도 별 도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선녀처럼 아름다운 미녀라 해도 류소경 앞에서는 한낱 모래알에 불과했다.

    청산지주 관몽득管梦得은 살이 찐 거대한 몸을 이끌고 일각一刻도 채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오대천으로 향했다. 먼지가 날릴 정도로 쏜살같이 질주하는 그에게서 평소 걸을 때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산의 주인이자 비만 환자인 그의 지병은 상대를 봐 가며 발병하는 듯했다.

    그의 뒤를 입을 가린 여인이 웃으며 따랐다.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옥호접에게서는 나비를 감상하는 규방 여인의 생기발랄함이 느껴질 뿐, 기녀의 천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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