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태후가 조소했다.
“나의 착한 조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말로를 맞이해야 한단 말이냐… 아주 기쁘겠구나. 이제 만족하느냐? 여아가 죽으면 장서열에게 네 사랑을 증명할 수 있겠지.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른 사람을 희생해 네 뜻을 이루는 게 그리 재미있더냐?
넌 최소한 여아를 정심전에 돌려보내 약을 먹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여아가 널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력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이냐? 양심은 개에게 준 것이냐? 아무것도 없던 시절 네게 잘해 준 것은 장서열뿐만이 아니다. 여아 역시 네게 온 마음을 다했다!”
냉궁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송 태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그는 제발 현비가 자신이 권비와 결탁하여 고의로 권비의 병을 과장했다고 의심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잘못하면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구염락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소자, 본래 권비를 내보내 요양을 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끼니나 몇 끼 챙기는 정도겠지만 제게는 그럴 능력이 있고, 현비도 그리 도량이 좁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헌데…….”
구염락이 잔인하게 씩 웃었다.
“태후께서 그리 총명하신 데다 호통을 칠 기력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군요.”
구염락이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그리도 끔찍이 조카를 아끼시니, 태후께서 친히 권비를 보살펴 주시지요. 아, 너무 감사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소자도 연민과 배려를 아는 사람이니까요.”
분노한 태후가 피를 토할 듯 소리쳤다.
“네 이놈!”
구염락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리고 태후마마도 진맥을 받게 해 드리지요. 혹시라도 과로로 쓰러지시면 병자를 돌보기 어려우실 테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구염락은 태후를 힐끗 바라본 후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
황제가 다녀간 뒤 냉궁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권비를 치료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냉궁에는 가지각색의 물품들이 늘어났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 썰렁하던 전각은 하루아침에 중요한 곳이 되었다. 냉궁에 들어가는 물건이 늘어났고, 태의가 출입하는 횟수도 점점 잦아졌다.
이는 태의원에서 아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권비의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었다. 평생을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대갓집 규수가 일 년이나 차가운 냉궁에서 고초를 겪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을 얻을 터였다.
태의원은 과거 장서열과 같은 약물을 복용한 권비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권비는 약 기운을 배출하지 못한 데다 지난 일 년간 한기가 든 탓에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식을 들은 구염락은 눈썹 한 번 까닥이지 않고 곧장 손을 저어 소식을 전한 이를 물러가게 했다.
* * *
한편, 조로전에서는 화 마마가 다급하게 현비를 설득 중이었다.
“마마,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장서열이 품에 누운 어린 황자를 골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되었다. 계속 그렇게 말하다간 목이 다 쉬겠구나.”
장서열이 대비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구염락에게 불만을 표할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모든 결정권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권비에게 마음이 있다면 당장은 그를 말릴 수 있을지언정 나중에는 결국 소용없는 일이 될 것이다.
장서열은 도를 넘는 행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전생에서처럼 구염락을 멀어지게 할 뿐, 구염락이 권비에게 마음이 없다면 신경 쓸 거리도 못 되는 일이었다.
“마마.”
그러나 화 마마가 안심할 수 없는 건 권비의 태도였다.
“폐하께서 마마께 극진한 걸 잘 알고 있으나 노비는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굳이 대범하고 어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현재 몇몇 대신들 사이에서 권비를 냉궁에서 꺼내 황후로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후환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졸린 아기를 토닥토닥 두드리던 장서열이 천천히 걸으며 아기를 얼렀다.
“화 마마, 본궁에게도 생각이 있다.”
장서열은 당장 황자를 달래어 재우는 것 외에 관심이 없었다.
화 마마는 불안했다.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건 항상 하인들의 몫일 뿐, 현비는 언제나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황궁에서 총애를 믿고 방심하는 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였다. 지금이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이것이 현비를 안심시키기 위한 황제의 속임수라면 어찌하겠는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다면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화 마마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단 황제의 주변에는 유혹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화 마마가 보기에 황제는 지나치게 계략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침대 안팎에서 전혀 다른 두 얼굴을 보이며 잠깐이라도 현비가 없으면 곧장 살기를 내뿜곤 했다. 화 마마에게 황제는 언제든 현비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현비가 황자를 낳자 황제는 곧장 권비를 찾아갔다. 이게 현비를 기만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바로 황제의 본심이었다. 화 마마는 황제가 이미 정복한 여인은 제쳐 두고 새로 다른 여인에 대한 정복욕이 생긴 거라고 단정 지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화 마마는 조급해 죽을 것 같았다.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그렇다고 또 너무 돌려 말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현비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마마, 남의 떡이 가장 커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화 마마가 어린 황자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화 마마를 힐끔 바라본 장서열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 또한 예전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철저히 이해득실을 따지며 눈앞의 모든 적을 제거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구염락은 누구보다도 감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도 구염락은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여인에게 그리 신경 쓰는, 소위 말해 수컷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사랑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계속 안고 있으면 아이가 너무 더울까 봐 저편에 서 있는 여섯 명의 유모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중 지위가 가장 높은 유모가 앞으로 나와 공손하게 황자를 안아 들었다. 유모는 나머지 다섯 유모를 이끌고 다시 내실로 돌아갔다.
유모의 수는 황자의 지위를 말해 주는 척도였다. 총애를 받지 못해 두어 명의 유모를 두는 것조차 사치인 황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황자들은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여섯 명이 넘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황실에서는 황손에게 모유를 먹이지 않았는데, 그래야 아이가 빨리 외부 환경에 적응하고 독립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황손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기를, 그리하여 신분에 의존하지 않고 응석받이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장서열 역시 넘치는 사랑에 기대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순리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아이가 응석을 부리거나 부모에게 의지하는 건 개의치 않았지만 용감하지 않거나 책임감 없는 아이로 자라는 건 바라지 않았다. 황실에서 태어나 겁쟁이로 자라는 건 비극이었다.
유모들이 황자를 데리고 물러가자 화 마마는 장서열의 뒤를 바짝 쫓으며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화 마마는 현비에게 이 일의 심각성을 알리고 싶었다. 주인이 총애를 잃는다면 하인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장서열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 장서열은 최근 구염락의 행동과 권여아의 신분이 화 마마를 불안하게 만들 만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 마마의 끊임없는 말에는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화 마마가 차를 따르는 틈을 타 장서열이 어르듯 말했다.
“어선방에 일러 페하께서 제일 좋아하는 수면寿面(생일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먹는 국수)을 준비하라고 해라.”
구염락이 수면寿面을 제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좋은 음식을 구경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그는 매년 장서열이 보내주는 수면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기름기 가득한 국물에 담긴 넉넉한 고기는 항상 굶주려 있던 구염락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수면을 꼽게 되었다.
어선방 사부는 음식 솜씨가 좋은 자였기에 수면과 같은 음식을 산해진미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구염락의 기억 속 수면은 영원히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된 채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서열은 수면을 보고 다 큰 어른이 크게 기뻐하며 아이처럼 굴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농교에게 다가와 눈짓을 했다. 잠시 밖으로 나간 농교는 이내 웃음꽃을 피우며 돌아와 고했다.
“마마, 만 귀인마마가 뵙기를 청합니다.”
노비는 마땅히 주인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법이다. 농교는 장서열이 좋아하는 사람이 오면 미소를 지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곤 했다.
치마를 든 만정이 급히 뛰어들었다. 최근 마음을 새로 다잡은 그녀는 장서열 앞에서 다시 덤벙대기 시작했다. 금족령이 많이 느슨해진 덕분에 만정은 장서열이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경옥전을 나올 수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만정이 화가 난 얼굴로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불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 폐하를 그 여우 같은 계집에게 양보할 거예요?”
만정이 권여아를 싫어하는 데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 만정은 황제가 권여아를 보러간 것도 모자라 태의까지 불러줬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어쩔 줄을 몰랐다. 거만한 얼굴을 치켜든 권여아가 마치 그가 자신의 것인 양 거들먹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흥! 그러다 결국 폐하 때문에 냉궁에 갇혔지!’
“여우한테 그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
“언니!”
만정은 장서열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무는 법이에요. 그런데 권비는 사람이잖아요. 지금 폐하는 태의까지 붙여가며 권비를 돌보고 있어요. 권비가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언니도 잘 알죠? 폐하께서도 권비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그 마음이 커지면 언니에게도 좋을 게 없다고요!”
화 마마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제를 정확히 보는 만 귀인이 처음으로 영민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왕 마마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의흔 등 경옥전의 하인들이 그 뒤를 이어 잇따라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