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구염락은 태후를 냉궁에 처넣은 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 태후가 냉궁에서 온갖 고난을 겪는 동안 그는 도덕적 비난 대신 끊임없는 찬사를 받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제왕이 되었다.
비참한 말로가 눈앞에 있었다. 구염락의 말처럼 태후는 주동자가 아닌 방관자였다. 만약 태후가 주동자였다면 그는 벌써 권씨 가문의 구족을 멸하고 가문의 대를 끊었으리라. 그나마 방관자였기에 이렇게 자멸하도록 방치된 것이다.
불길은 냉궁뿐만이 아니라 태후의 마음까지 태워 버렸다. 마음이 잿더미가 된 그녀는 맥 빠진 손으로 고목나무 의자 팔걸이를 마치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유일한 기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게 끝났다. 만에 하나 냉궁에서 나간다 해도 그녀는 더 이상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어른도,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주인도 아니었다.
이로써 그녀는 황궁에서의 모든 영화를 장서열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더는 효도를 방패 삼아 장서열을 짓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씨 가문 여인들은 이제 황궁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태후의 얼굴에 몇 번의 경련이 일었으나 곧 잠잠해졌다. 모든 영화를 잃은 그녀는 어떠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게 된 후 오히려 차분해졌다.
태후는 텅 빈 냉궁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준수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여인이 흠모하는 남자이자 국가의 밝은 희망이었다.
곧이어 태후의 시선이 조카를 향했다. 태후가 평생토록 가장 미안해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권여아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태후에 의해 궁에 들어와 갖은 고초를 겪었고, 구염단신과 구염락에게 차례로 버림받았다. 눈앞에 놓인 태자비와 황후 자리를 번번이 놓쳐야 했던 아이.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결국 태후와 함께 냉궁에 갇혔고, 태후는 그런 조카를 조금도 보호해 주지 못했다.
태후가 몰락한 뒤 유일하게 빚진 존재가 있다면 그것 또한 권여아였다. 지난 일 년간 권여아는 최선을 다해 태후를 보살펴 주었다.
태후는 무명옷을 걸친 채 무릎을 꿇은 조카를 바라보다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태연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상, 난 이곳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
“불허합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끼얹어졌다.
“말년을 조용히 보내는 것도, 곧장 죽음을 내리는 것도 모두 짐이 내리는 은혜이거늘, 태후께서 무슨 자격으로 부탁을 운운하십니까.”
“자격?”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태후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구염락, 너야말로 무슨 자격이 있느냐? 명분도 이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것! 넌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도둑에 불과하다!
황후인 내가 너를 받아 주었고 권씨 가문의 여식인 여아 역시 네게 힘을 실어 주었다. 네가 황위에 오른 뒤 여아는 네 뜻대로 군말 없이 황후가 아닌 비妃가 되었다! 그런데도 여아가 네게 불평 한 마디 한 적이 있더냐? 여아는 매사 너를 위해 주었거늘, 그런 여아를 넌 어떻게 대했느냐?”
“…….”
“바닥에 꿇어앉은 여아를 한번 보아라!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현비는 대체 저 아이가 무슨 대역죄를 지었다고 냉궁에 처박아 두는 것이냐?
나 같은 고모를 둔 것이 잘못이라면 너 또한 과거 여아에게 접근하지 말았어야 할 터, 여아가 주는 이익만 누린 네가 아무리 천하에게 떳떳하다 한들 결코 여아에게는 떳떳할 수 없을 것이다. 여아에게 죄가 있다면 널 사랑한 죄뿐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그리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느냐?”
구염락은 태후가 말하는 자가 마치 자신이 아닌 양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소자와 같이 흉악하고 배은망덕한 물건을 사랑해 봐야 원망과 원한만 남을 뿐이지요.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순간 고개를 든 권여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황금빛 평상복에 머리카락 한 올조차 빠져나오지 않는 완벽한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권여아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그는 과거 그녀에게 많은 위로를 건넸던 남자였다. 그는 비록 다정하고 세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와 함께 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하다니…….
권여아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
권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파랗게 질린 입술은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 부서질 듯 조금 전보다도 더욱 허약해 보였다.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고집스럽게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뚝뚝 떨어지던 굵은 눈물방울은 이내 울음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권여아는 그대로 혼절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구염락은 잠시 침묵하다 혜령에게 태의를 부르라 명했다. 태후는 구염락이 권여아를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자 마음에 서리가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나마 태의라도 불러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었다.
태후는 울 기운조차 없었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된 이상, 이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해도 권여아의 앞길을 바꿔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구염락에게 태후를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는 반드시 구염단신과 권여아에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선물할 것이다.
이미 권력을 잃은 지 오래인 태후에게 더는 내놓을 것이라곤 없었다. 반면 최고의 자리를 거머쥔 구염락에게 그녀는 죽은 장기짝에 불과했다. 이제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조차 지나친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태후가 아니었다. 구염락과 혼절한 권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량하면서도 가슴 아픈 웃음이었다.
“넌 네가 정말로 이긴 줄 아느냐? 하하, 장서열이 널 사랑해? 정녕 그 아이가 널 사랑할 것 같으냐?”
태후가 최후의 발버둥을 치는 전갈처럼 표독스럽게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장서열은 서풍엽을 잊지 않았다! 그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서풍엽이야! 생각해 보거라. 그 둘이 얼마나 절절했더냐. 혼인하지 못해 안달을 하던 둘이 한순간에 남남이 됐는데 장서열은 입궁 후 서풍엽에 대해 입도 벙끗하지 않았지.
서풍엽은 또 어떠하고? 그는 장서열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쥐 죽은 듯 살았다. 두 사람은 그토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
“황상,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설마 스스로의 매력으로 장서열이 황상을 사랑하게 됐다고 여기는 건 아니시겠지요? 하하, 천만에! 장서열은 어린 시절 너와 몇 년을 함께 했음에도 널 사랑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으냐? 장서열이 사랑하는 건 여전히 서풍엽이다! 그 계집이 보호하는 건 오직 서풍엽뿐이란 말이다!”
“…….”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지금 당장 현비를 궁 밖으로 내쫓아 보아라. 서풍엽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아이를 아내로 맞이하려 들 것이다. 보물처럼 여기며 절대로 놓아 주지 않겠지.
그러니 구염락, 너도 그리 득의양양할 것 없다. 너의 그 무조건적이고 위험한 사랑이 얼마나 가여워 보이는지 아느냐? 널 사랑하는 사람은 냉대하고, 네게 마음이 없는 여인은 곁에 두다니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구나!”
태후가 비웃는 얼굴로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인정하지 못하겠느냐? 그럼 나와 시험이라도 해보자꾸나. 하지만 못 하겠지. 왜냐하면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솔직히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태후는 그의 상처를 들추어 헤집고 장서열을 모욕했다. 그는 잠시 주춤했지만 ‘네게 마음이 없는 여인’이라는 말에 일순간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사실 구염락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여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장서열의 마음에 자신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낳았고 매일 그를 위해 탕약을 끓여 주었다. 오늘날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언제나 곁에서 위안이 되어 준 것도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 그가 없다니. 이를 누가 감히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형태로든 그는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굳이 시험해 볼 것도,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장서열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황아를 선택할 것이고, 이는 곧 구염락을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사랑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온 여인이었다. 구염락은 이제 와 장서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초심을 잃고 그녀를 원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가진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자야말로 겁쟁이가 아닌가. 구염락은 희생을 빌미로 징징거리는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영원히 진상을 알 수 없기를, 그리하여 그와 함께 하는 삶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랐다. 감사하게도 또 다른 것들을 얻게 된다면 행운일 테지만, 얻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장서열이 곁에 남아주는 것뿐이었다. 설령 새장에 가두어 날지 못하는 새가 될지라도 구염락은 그녀에게 출구를 주지 않으리라.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눈에 거슬리는 서풍엽과 그의 자손들 역시 누구도 감히 장서열을 입에 올릴 수 없을 터였다. 또한 누구도 장서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구염락이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자 분노한 태후는 피를 토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천하에 둘도 없이 거만한 황제가 잠시나마 담이 작아지던 가소로운 모습은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위로를 주었다.
“어찌 되었든 넌 여아에게 은혜를 입었다. 정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 매몰차게 여아를 버리다니! 세상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볼지 두렵지도 않으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눈을 가진 자들이 원하는 걸 보겠다는데 뭘 어찌할 것인가. 그는 백성들에게 빚이 없었다. 구염락은 제위에 오르며 온화하고 교양 있는 태자의 모습을 버린 대신 백성들에게 떳떳한 미래를 제공했다. 그는 세간의 이목이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장서열 한 사람이 알아주는 것으로 족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질 겨를은 없었다.
곧 태의가 도착했다. 절을 올린 송 태의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황공해 하며 서둘러 권비를 진맥했다.
시선을 돌린 태후가 눈물범벅이 되어 바닥에 몸을 웅크린 조카를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황제의 행차 덕분에 켜진 유일한 촛불을 꺼뜨릴 것 같았다. 가슴이 바늘로 찌른 듯 아팠다.
태후가 갖은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길은 권여아가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태후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구염락이 저토록 무심한 이상 결국은 권여아도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송 태의가 권여아를 진맥하던 손을 거두었다. 그가 저만치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고했다.
“폐하, 권비마마께서는 지나친 근심과 영양 불균형, 그리고 허약한 신체로 인하여 혼절하신 것입니다. 이대로 몸을 잘 돌보지 않는다면…….”
송 태의는 잠시 뒷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재촉하지 않자 더는 입을 다물 엄두를 내지 않고 황급히 이어 말했다.
“…잘 돌보지 않는다면 오랜 기간 쌓인 피로가 지병이 되어 큰 병을 불러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