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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5)화 (265/449)
  • 제265화

    구염락은 낮에는 국가를, 밤에는 아내와 자식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했다. 가족과 나라가 전부인 그의 신경은 오로지 화려함 뒤에 감춰진 사소한 것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밤이면 구염락은 더욱 바빴다. 그는 몸조리에 힘쓰는 장서열의 곁에 꼭 붙어 산책을 하거나 눈을 뜬 황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면 그는 살아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곤 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뒤에도 여전히 바깥은 흐릿했다. 무릎 통증으로 인해 잠에서 깬 뒤 구염락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어린 시절 눈밭에서 오래도록 무릎을 꿇은 탓에 얻은 고질병으로, 수많은 태의조차 속수무책이었다.

    구염락은 본능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상소문을 살펴보려 했으나 자칫 품에 잠들어 있는 여인을 깨울까 봐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냥 자야겠군.’

    소리자에게 뜨거운 주머니를 가져오게 한 구염락은 이를 무릎에 묶었다. 품에 안긴 이에게 이불을 덮어 준 그가 다시 서서히 몽롱해졌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구염락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장서열이 뒤척이자 즉시 숨을 참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밖에서 소란을 피운 자들에게 따귀와 함께 곤장 스무 대를 치라고 명했다.

    장형이 끝난 뒤에야 화가 풀린 구염락이 조용히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처참하게 맞은 궁녀 하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왼쪽 뺨이 부어오른 궁녀의 옷깃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창백한 낯빛을 한 그녀가 안쓰러운 얼굴로 울음을 삼키며 조용히 말했다.

    “폐하! 노비, 폐하께 간절히 청합니다. 부디 권비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냉궁에 불이 났습니다. 마마는 아직 그 안에 갇혀 계십니다. 폐하, 노비가 목숨을 걸고 간절히 청하오니 부디 권비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바닥에 엎드린 궁녀가 비장한 얼굴로 바닥에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소리자를 힐끗 바라본 구염락이 권비의 궁녀를 막느라 함께 곤장을 스무 대나 맞은 조로전 궁녀를 바라보았다. 얼굴도 모르는 자가 막무가내로 황제를 뵙겠다며 권비니, 불이 났다느니 횡설수설한다면 누구든 들여보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조로전의 입장에서 정심전의 권비는 불에 타 죽어도 시원찮은 사람이었다. 정심전 것들은 어찌 이렇게들 건방지단 말인가.

    황제의 시선에 조로전 궁녀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 한 채 속으로 떨었다.

    “소리자, 네가 다시 설명하라.”

    소리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페하께 아룁니다. 자시에 냉궁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제때 발견하였고 또 마침 비가 내려 불길은 금방 사그라들었습니다. 태후마마와 권비마마와 또한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합니다. 소인, 폐하께서 침소에 드셨기에 일부러 고하지 않았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고개를 찧던 궁녀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연기가 그리 어마어마했는데 권비마마께서 어찌 괜찮겠습니까! 폐하, 간절히 청하옵건대 부디 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제발 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노비가 목숨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냉궁에 분명 큰불이 났고 마마께서는 그 안에 갇혀 계십니다!”

    말을 마친 궁녀는 다시 비장한 얼굴로 바닥에 크게 머리를 박으려 했으나 하인들에 의해 곧장 저지당했다. 그녀가 땅에 엎어지는 것과 동시에 소리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헛소리! 페하, 이 자가 감히 함부로 지껄이는 것입니다.”

    소리자가 옷깃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인이 직접 보았습니다. 냉궁은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구염락의 눈빛은 차분했다. 현비가 잠에서 깨지만 않는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든 어디에서 불이 났든 그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태후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그는 궁에 그런 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였다.

    “냉궁으로 갈 것이다.”

    곧 날이 밝으리라. 구염락은 태후가 과연 그녀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 *

    권여아는 차디찬 냉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엄청난 한기가 몰려왔다. 비록 무릎을 꿇은 허리는 꼿꼿했으나, 그녀는 얼굴 곳곳에 드러나는 피로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신첩,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태후가 힘없는 시선을 던졌다. 정돈되지 않은 흰 머리카락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퍼졌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선 황금빛 그림자를 보지 못한 듯 여전히 더러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제외하면 권여아의 꼿꼿한 태도만큼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황제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기색 없이 늘 그렇듯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구염락은 권여아의 냉담한 태도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황제를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으시니 과연 일국의 태후다우십니다.”

    “…….”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태후께서는 이번에 어떠한 도리를 깨우치셨으며, 소자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마침 시간이 있으니 충분히 반성을 하셨으면 혹 모르지요… 냉궁에서 풀려나게 될지도.”

    놀란 권여아가 구염락을 쳐다본 후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날뛰었다. 이전보다 더욱 낯설어진 그는… 더욱 매력적으로 변했다.

    구염락은 이들이 머리를 써 요령껏 불을 지른 것으로 보아 아직 대화가 통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후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구염락이 차가운 눈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몸이 약한 황아皇儿가 겪고 있는 고통을 떠올리자 눈앞의 여인이 더할 나위 없이 증오스러웠다.

    태후는 침묵한 채 구염락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하인을 내보낼 기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가볍게 시선을 돌렸다.

    냉궁으로 쫓겨난 태후라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그녀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황상, 과찬이십니다. 아들 녀석이 그리 무정하니 이 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기억하시지요? 황상께서 처음 내 곁에 온 뒤로 난 온 힘을 다해 황상을 도왔습니다. 물론 망설인 적도 있었으나 최선을 다했지요. 황상께 미안할 짓은 결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날 이곳에 가두다니, 그저 놀랍고 두려울 뿐입니다.”

    “…….”

    “진실이 궁금하시오? 약을 탄 사람은 비록 내 사람이었으나 결코 내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니오. 세상천지에 나를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현비야 자신의 아이를 해할 리 없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황상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북왕은 호시탐탐 국암사의 성모圣母(구염락의 친모)를 입궁시키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어요.”

    태후가 경멸을 담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입궁할 자격이 없다 해도 누군가 성모의 위상을 높이고자 몰래 애를 쓰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까. 듣자 하니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긴 성모가 비천한 중생들을 그리도 가엾게 여긴다지요? 국암사 인근의 백성들은 이미 그녀를 살아있는 보살이자 부처로 여긴다 하더군요.”

    “…….”

    “그 다음이야 뻔하지 않소. 사방에 명성을 널리 떨친 성모가 황상께 봉호를 내려달라 청하여 궁에 들어오는 게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이미 태후인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는 황상의 생모이니 그때가 되어 내가 이 냉궁에서 나간다 한들 사람들이 누구를 따를지는 자명하지요.”

    태후는 서북왕이 구염락의 생모와 연합하여 재기를 노리고 있으며, 심지어 생모가 이에 매우 협조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생모를 모독하는 이 말은 사실 태후의 입장에서 당연한 발언이었다. 그 여인이 불순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어째서 자신을 이리 모함했겠는가.

    태후의 말은 실로 교묘했다. 그녀는 서북왕과 약연을 비난하는 한편 은연중에 현비가 이로 인해 어부지리를 얻었음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비가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아이를 해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태후는 황제가 불쾌해할 만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이를 이해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황제에게 달려 있었다.

    구염락은 태후의 거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당당했던 태후는 언제나 그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판단력을 무시했고, 겨우 몇 마디 애매모호한 말로 대역죄를 씻으려 했다.

    구염락은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태후마마. 마마께서는 당신의 죄명이 무엇인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태후께서는 사람을 사주하여 황자를 모해한 죄가 아니라, 이를 알고도 아랫것들이 함부로 날뛰도록 방조한 죄로 이곳에 계신 것입니다. 모르셨습니까?”

    “뭐라?”

    순간 평정심을 잃은 태후가 분노한 눈으로 구염락을 쏘아보았다. 그의 담담한 표정에 태후는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스스로가 안타까워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게요! 이 몸은 스스로를 보호했을 뿐이오! 황상, 날 이렇게 대우해선 안 됩니다. 이 순간에도 진범은 자유롭게 도망치고 있어요.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구염락의 시선이 태후를 향했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폭삭 늙은 노인이 있었다.

    “태후마마께서 지목한 자가 서북왕이라면 급할 것이 없습니다. 서북왕이 짐에게 이렇듯 큰 선물을 주었으니 짐 또한 보답으로 그의 가문에 좋은 선물을 내릴 것입니다. 어지간한 보상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적어도 가문의 대가 끊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염락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태후마마?”

    순간 한기를 느낀 태후의 안색이 돌변했다. 근본적으로 구염락과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소! 알면서도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이 죽을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황상, 우릴 이대로 냉궁에 가둬서는 아니 되오!”

    구염락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적막하고 두려운 곳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태후의 피폐한 얼굴을 바라본 그가 무심히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가 심사숙고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석궁 지하에 이승의 지옥이라 불리는 감옥이 있습니다. 태후마마, 그곳은 어떠신지요?”

    질문의 형식을 취했으나 태후를 바라보는 구염락의 눈빛은 얼음장 같이 싸늘했다. 태후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알았다. 태후가 주동자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태후가 황자에 대한 위협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내릴 이유가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과연 양아들은 친아들이 될 수 없구나!’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태후는 순식간에 마음 속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뼛속까지 무정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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