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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4)화 (264/449)
  • 제264화

    깜짝 놀란 서 이랑이 억울한 마음에 채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그녀의 곁에 서 있던 계집종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리, 고정하십시오!”

    서 이랑은 억울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

    피곤한 상황에 맞닥뜨린 장서전이 이마를 짚었다. 그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딸과 놀아 주거나 부인을 달래 주고 싶었다. 무슨 말만 하면 눈물부터 쏟아 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지 않은가.

    그러나 장서전은 내키지 않아도 첩실의 체면을 지켜 주어야 했다.

    “됐소. 이런 일로 울지 마시오.”

    서 이랑은 억울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장서전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큰 용기를 내 그의 품에 기대어 울기 시작했다.

    “노야…….”

    장서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사섬을 떠올렸으나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울지 마시오. 팔에 상처를 입지 않았소. 곧 의원이 올 테니 채비를 하시오.”

    장서전은 서 이랑이 유난스러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사섬과 달리 의원을 맞이할 때면 꼭 병풍을 세우고 천을 걸치곤 했다. 어리광을 부린다기보다 귀족 가문 출신이기에 여러 가지 격식을 따지는 게 습관이 된 듯했다.

    서 이랑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에서 그의 관심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장서전은 서 이랑을 보며 밖에서 딸과 놀든 주사섬을 보든, 무엇을 하든 간에 여기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의원이 오는 걸 보고 떠나야 여러 모로 보기 좋은 모양새가 될 터였다.

    * * *

    구염락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구염황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동이 떠올랐다. 그는 장서열이 낳은 아이라면 누구든 좋았다. 그는 아들을 태자로 세워 곁에 둔다면 그녀가 괜한 걱정할 필요 없이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 자꾸 자는 거지?”

    장서열이 감은 눈을 살짝 떴다. 점심시간이면 유독 졸음이 몰려왔다. 아름다운 자태로 하품을 한 장서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 마마가 아이들은 원래 그렇대요.”

    구염락은 곧장 물었다.

    “네가 어릴 때도 이랬어?”

    장서열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담. 그녀가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염락이 손가락으로 아들의 볼을 콕 찔렀다.

    벌떡 일어난 장서열이 그의 손을 쳐냈다. 그녀가 과할 정도로 아이를 보호하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예요! 여린 살결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둘도 없이 귀한 아이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개의치 않았다. 살짝 찌른 정도로 무슨 상처가 나겠는가.

    구염락은 장서열이 지키고 있는 한 다시 아이를 만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대주국의 황자인 아이가 결코 손도 못 댈 만큼 나약해서는 안 됐다.

    물론 몸이 약한 황아를 위해 구염락은 충분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 역시 일찍이 황위를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몇십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만에 하나 그때도 황아가 허약하다면, 조금 섭섭하겠지만 더욱 훌륭한 손자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 생각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장난을 멈추자 만족한 얼굴로 조금 더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일 년간 실컷 먹고 잔 덕분인지 한 번 깨자 좀처럼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아들을 놀리느라 바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문득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폐하, 황아가 아직 몸이 약해 복이 없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태자 책봉과 관련해선 당분간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구염락은 사람들의 말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아들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함부로 떠드는 소리는 듣지 마. 흠천감은 밥 먹고 세 치 혀를 놀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들이야. 황아는 우리의 자식이야. 장서열 이름 석 자 아래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 최대의 축복이고. 네가 준 복을 안고 태어난 아이가 태자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어.”

    “그렇게 자랑을 하면 어떡해요!”

    장서열은 황당했지만 구염락은 언짢았다. 분명 엉큼한 자들이 태자 책봉을 막기 위해 그녀 앞에서 함부로 떠들어 댔으리라. 다들 제 명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나에게 말해. 내가 전부 해결할게.”

    장서열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를 지나치게 귀히 여기면 안 된다는 것도 몰라요? 혹시라도 황아의 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선 안 돼요.”

    미신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가 그러했다. 태어나자마자 아이에게 귀한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귀한 이름을 하사했다. 장서열은 기쁘면서도 울고 싶었고,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웠다.

    “그런 말을 믿어?”

    구염락이 거만하게 말했다.

    “다 거짓말이야. 짐이 태자로 책봉하겠다면 그걸로 된 거야. 어떤 것도 내 결정을 막을 순 없어.”

    장서열이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의 시점에서 생각해 봐요. 사실 저는 황아가 태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태자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 책임에 임해야 하고, 황아는 그 모든 걸 감당하기에 너무 병약해요. 혹시라도…….”

    아들에게서 시선을 뗀 구염락이 몸을 돌려 장서열을 안고 위로했다.

    “두려워하지 마. 황아 뒤에 우리가 있잖아. 그것도 아니면 손자가 있을 테고. 걱정 마.”

    장서열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신을 담은 그의 눈빛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느 여인이 제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황아가 그럴 능력이 있을까? 과연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장서열은 군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삶이 더 무사태평할지 모른다.

    그사이 장서열을 놓은 구염락이 황아의 발가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바보 같이 웃었다.

    “재밌어.”

    장서열이 뾰로통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재밌어요? 잘 자고 있는데 꼭 깨워야 속이 시원하죠.”

    구염락이 웃었다. 그는 계속해 아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 * *

    삿갓을 쓴 여인이 안개비가 내리는 강 위에 그물을 던지고 옅게 웃었다. 도롱이를 입은 사내는 노를 저었다. 배 위로 커다란 ‘옥’ 자가 빗물에 휘날렸다. 강물에 떨어진 빗물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수많은 고깃배 사이로 높고 큰 선방이 나타났다.

    여인은 기선방妓船房에서 유명한 옥호접이었다. 사람들은 옥호접이 고고하고 우아하며 고혹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누군가는 그녀가 결점 없이 완벽한 여인이라고 했다. 그녀와 술을 마신 문인들은 그녀가 그린 서화를 보며 학식이 외모를 뛰어넘었다고 탄복했다.

    헛소문이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옥씨 가문 선방에 풍류계를 주름 잡을 만한 유명한 여인이 있다고 떠들어 댔다.

     선율은 불효자의 후회를 속삭이며 하늘과 땅 사이로 자연스레 울려 퍼졌다. 노를 젓는 남자의 손이 강물에 비치다 불현듯 멈추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연주를 경청했다.

    여인들은 화방畵舫(아름답게 장식한 중국의 가옥형 배. 풍취 있는 뱃놀이에 사용되며, 이를 통해 술손님을 접대를 하기도 했다.)이 지나가자 표정을 찌푸렸지만,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금 연주가 듣기 좋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대담한 부인들은 함께 모여 여우를 헐뜯었다. 사내들은 풋풋한 수염을 만지며 옥호접이 연경에 얼마나 더 머무를지, 그녀가 첫 번째로 향하는 곳이 과연 청산의 사대천 ‘성세안락’일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청산에서 초청한 옥호접? 옥호접은 재주와 미모를 겸비했고 돈도 많아!”

    “맞아, 맞아.”

    늘 그렇듯 호사가들은 잘 모르는 일을 한껏 부풀리며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기녀는 기녀일 뿐이다. 아무리 고결한 가인이라 해도 노력을 통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선택권을 가질 뿐, 대가가 주어진다면 요구에 응하여 어떠한 곳이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옥호접의 화방은 청하 방향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조금 더 내려가면 연경 최고의 유흥가인 청산이었다.

    비록 옥호접의 행선지가 청산이 아닐지라도 그녀는 규율에 따라 먼저 사대천 성세안락에 들러 집사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길을 묻는 건 그 다음이었다.

    화방 안, 흰 치마를 입은 여인이 안개 낀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유혹적인 눈길을 한 그녀는 흐르는 빗물을 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여느 기녀들과 달리 요염하기보단 명문가 규수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치장 없이도 출중한 미모와 우아한 분위기는 창에 기댄 모습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마치 가을비의 애잔함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도, 탄식하게도 만드는 자태였다.

    옥호접은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진흙탕에 빠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늪에 빠져 있다 보면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며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봐줄 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높은 곳을 꿈꾸는지를 항상 생각했다.

    그녀는 괜찮은 사내를 만나면 선뜻 거래를 하지만, 싫어하는 사내라도 신분이 높으면 별 수 없이 아양을 떨며 기분을 맞춰 주는 보통의 기녀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옥호접이 연경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는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국을 무찌른 소년 제왕이 궁금했다. 그는 말가죽에 둘러싸인 시체를 보고도 의연할 뿐만 아니라 수천 대군 사이를 맨몸으로 돌진하는 영웅이었다. 거기에 문무를 겸비한 것은 물론 수려한 외모까지 자랑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실질적 권력인 일등공과 삼대군을 모두 장악한 황제라는 사실이었다. 오며가며 황제를 마주한 모두가 그를 공경하고 우러러보았으며, 무장들 또한 그의 결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소문을 들은 옥호접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황제가 궁금해졌다. 그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자일까?

    옥호접은 재색을 겸비한 스스로를 과신하며 연경에 입성했다. 그녀는 소문을 들은 황제가 자신을 찾아내지는 않을지, 자신이 그를 궁금하게 여긴 만큼 그 역시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을지 내심 기대했다.

    옥호접은 솔직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모하는 마음도, 강자에 굴복하는 마음도 숨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황제의 눈에 들리라는 꿈은 꾸지 않았다. 입궁하여 후궁이 될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황제가 자신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화방을 찾아 주기만을 바랐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안타깝지만 평생의 짝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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