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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3)화 (263/449)

제263화

홍옥은 주사섬의 모친, 주 부인이 주사섬이 열 살이 되던 해에 딸에게 붙여 준 계집종이었다. 그녀는 주사섬보다 배운 것이 많고 명석했으며 대인 관계가 좋았기에 이를 눈여겨 본 주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그녀는 훗날 주사섬과 함께 출가하여 주사섬이 남편을 휘어잡고 대가족의 명실상부한 정실부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었다.

‘기억을 못 하시는 건지 멍청하신 건지, 정말 몇 번이나 가르쳐 드렸는데 번번이 부인께서도 참! 그러니 매일 다른 이들에게 딸을 낳았다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복도 없는 멍청이!’

홍옥은 방금 문을 열고 본채로 들어온 서 이랑을 보자 속이 타 죽을 것만 같았다.

“이랑께 인사드립니다. 부인은 노야의 소세를 돌보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평온한 얼굴로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홍옥의 모습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든 서 이랑이 초롱한 눈망울을 드러냈다. 그녀는 잔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봄비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넋을 놓고 서 이랑을 바라보던 홍옥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서씨 가문에서 정성껏 길러낸 미인에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주씨 가문에서 배출한 부인 때문에 손에 땀을 쥐었다.

‘어찌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비록 서 이랑의 미색까지 따라갈 수는 없을 테지만 부인은 자기 할 도리만 다 해도 부군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었다. 이는 부인이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서 이랑이 주사섬의 계집종을 쳐다보았다. 예쁘진 않지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아이였다. 하지만 출신을 속일 수는 없는지라, 딱 봐도 무언가 다른 궁리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게다가 오지랖이 넓고 그다지 충직하지 못한 편인데도, 부인은 하필 저 계집을 귀히 여겼다. 부인께 몇 차례나 귀띔해 주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기다리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달리 기분 좋은 얼굴로 장서전이 나타났다. 뒤이어 다소 쑥스러운 얼굴을 한 주사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서전을 본 서 이랑은 다급히 예를 갖추다 탁자 위에 놓인 잔을 건드렸다. 순간 따뜻한 찻물이 그녀의 팔 위로 흘러내렸다.

놀란 주사섬이 앞으로 다가가 서 이랑의 옷깃을 올려 주고, 옷 위에 묻은 물기가 피부에 닿아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홍옥은 어서 의원을 모셔오고, 홍석은 가서 얼음과 약을 가져오너라.”

상전이 마실 차를 준비한 것이었기에 찻물이 많이 뜨겁진 않았다. 하지만 빨갛게 부어오른 서 이랑의 팔뚝은 진짜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도 아플 만큼 심각해 보였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이라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눈물을 머금은 서 이랑이 일 년 전보다 더욱 자신을 설레게 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식 없이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괜찮소?”

서 이랑의 시선을 눈치챈 장서전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는 아침부터 우는 소리를 듣자 머리가 다 아팠다. 고작 이런 일로 울고불고한다면 전쟁터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잘린 병사들은 억울해서 어찌 살겠는가.

아무리 남녀가 유별하다 해도 장서전은 주사섬이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혼인 초, 효심을 표하기 위해 어머니께 올릴 밥을 손수 짓던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남편에 놀란 탓인지 손가락 살을 벴다. 그때도 그녀는 그저 눈썹만 슬쩍 찌푸렸을 뿐이었다.

사실 장서전은 주사섬이 갑자기 등장한 자신 때문에 당황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주사섬이 둔하여 벌어진 사고라고 여기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가 만든 저녁을 먹었고, 부인의 체면을 위해 아무에게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장서전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인 서 이랑의 눈에서 진주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사모하는 사람이 드디어 전장에서 돌아왔다. 어떤 여인인들 꿈이 없으랴. 그녀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장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주사섬은 서 이랑의 팔에 뒤탈이 없을 거라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이리 아름다운 여인이 화상이라도 입는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고개를 돌린 주사섬은 남편을 향한 서 이랑의 아련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씁쓸했으나 이내 웃으며 말했다.

“노야, 서 이랑을 데려다주십시오. 서 이랑의 처소로 의원도 보내겠습니다.”

말을 끝낸 주사섬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장서전을 보았다. 그는 멋진 사내였고, 충분히 더 나은 여인을 만날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했다. 의원은 그녀에게 올해는 임신을 하지 않을 것을 권유했다.

홍옥은 부인이 굳이 나리를 호랑이 굴로 밀어 넣자 속으로 이를 나무랐다.

‘어찌 이리 멍청하실꼬. 하인들을 부려 먹지는 못할망정 나리를 서 이랑의 처소로 보내다니!’

심지어 서 이랑은 신분부터가 너무 막강했다. 그런 그녀가 만에 하나 장자라도 먼저 낳게 되는 날에는 장씨 가문에서 부인의 지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홍옥은 한스러운 얼굴로 부인을 쳐다보았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서 이랑은 기대에 찬 눈길로 장서전을 바라보다 또 수줍은 표정으로 주사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실 속으로 주사섬에게 무척 고마웠다.

물론 자신은 가문과 재주 등 모든 면에서 부인보다 뛰어났지만, 정실부인이라는 명분이 없는 이상 주사섬이 자신을 배려해 주지 않는다면 결코 집안에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장서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사섬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달래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으나, 부인의 체면을 세워 주고자 한숨 끝에 결국 길을 나섰다.

황급히 눈물을 닦은 서 이랑이 곧 웃으며 장서전을 따라나섰다. 그녀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문 앞까지 나선 후에야 비로소 법도를 기억하고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녀를 바라본 주사섬이 웃는 눈짓으로 그만하고 얼른 따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사섬은 서 이랑이 장서전의 발걸음에 맞춰 힘겹게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슬프게도 두 사람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쌍 같았다. 만약 과거 시아버지께서 중매 대상을 잘못 찾지만 않았다면 두 사람은 분명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부족한 자신은 여전히 남편을 힘들게 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홍옥은 부인이 아직까지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 걸어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섭섭해하실 거면서 왜 나리를 서 이랑과 함께 보내셨어요.”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엄격한 눈빛을 거둔 주사섬이 자매와도 같은 계집종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홍옥, 노야께서는 집안도 돌봐야 하고 위험한 공무도 수행하셔야 한다. 누구도 멋대로 노야를 붙잡아 둘 자격은 없다. 노야께서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시는 게지.”

홍옥을 잡아끈 주사섬이 손짓으로 나머지 계집종들을 물렸다.

“내 너의 마음을 잘 안다.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도 아마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야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 누구도 그를 원망할 자격은 없다. 이건 너도, 나도 마찬가지야.”

순간 얼굴을 붉힌 홍옥이 고개를 떨구었다. 부인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쩔쩔매며 연신 말을 더듬었다.

“저는… 저는…….”

주사섬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누구든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네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남을 탓하지도, 노야께 폐를 끼쳐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너라도 다시 어머니께 보낼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결국 홍옥이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허황된 망상을 했어요. 부인,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홍옥을 한 번 바라본 주사섬은 아무 말 없이 내실로 들어갔다.

홍옥은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부인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에 부인은 저렇게 단호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인은 최근 특별히 규칙에 철저했고, 성품 또한 더욱 강인해졌다. 심지어 오늘은 전에 없이 자신을 질책하기까지 했다.

‘부인이 변했다.’

홍옥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 부인을 없는 사람 취급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그녀도 본분을 철저히 지켜야 하리라.

홍옥은 부인이 언제부터 변한 것인지 돌이켜 보았다. 입궁하여 현비를 보고 돌아온 후였을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강해진 듯했고, 심지어 바라던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눈물 끝에 금세 기력을 회복했다. 이런 모습 또한 예전 주사섬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사섬은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장서전을 위해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매사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 * *

서 이랑의 거처는 마치 그녀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가구들의 배치는 서씨 가문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정갈했다.

주사섬은 현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런 일로 첩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서씨 가문에서 서 이랑에게 귀중한 물건을 보내오면 주사섬은 과분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게 하기보다, 관대히 받게 했다.

다행히도 서씨 가문 또한 분수를 지켰다. 혹시라도 딸이 부족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이들은 아끼는 딸을 위해 성심성의껏 우아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물건들만 골라서 보냈다. 다만 그로 인해 오히려 물건의 진가가 드러나곤 했다.

장서전은 서 이랑의 처소에 들어온 직후부터 줄곧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서 씨는 서책을 좋아했기에 책이 많았고, 서 대인은 세상에 하나뿐인 서적 또한 아낌없이 딸에게 보내 주었다.

서 이랑은 예상과 달리 장서전이 선뜻 발길을 하자 기쁜 얼굴로 그를 위해 차를 따라 주었다.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은 그 누구보다도 다정했다. 그러나 장서전은 마치 여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돌부처처럼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서 이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이랬다.

어차피 서 이랑은 보통의 첩실들처럼 아첨에 능한 것도 아니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유혹하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며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서 이랑이 조용히 찻잔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순간 장서전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다들 눈이 먼 것이냐? 조부에서 너희를 거둔 이유가 무엇이냐! 감히 이랑이 직접 나서도록 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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