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다음날, 구염락은 장서열의 품에서 깨어났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싹 지운 채 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 시달렸다. 다행히 환궁 후 사흘 동안은 조회가 없었다. 아니었다면 그는 오늘 조회에 나가 단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일어났어요? 술 냄새가 진동을 해요. 어서 가서 씻으세요. 이따 황아까지 취하게 하지 말고요.”
이미 씻은 후 침대에 누워 있던 장서열은 소매가 넓은 내의를 입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편안한 미간과 밝은 눈은 여전히 침대에서 눈을 뜨지 못하는 구염락과 대조적이었다.
장서열이 뭉쳐 있는 구염락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제 그만 게으름 피우고 일어나요. 소리자, 폐하를 부축하여 욕실로 모셔라.”
구염락은 꿈쩍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공기에 떠도는 술 냄새는커녕 오로지 익숙한 장서열의 체취만을 느꼈다.
구염락이 또 다가와 비비적거리려 하자 장서열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일각 후면 황아가 깰 거예요. 황아에게 게으른 부황父皇을 보여 주고 싶어요?”
장서열이 손을 뻗자 그 손을 잡고 내키지 않는다는 듯 비비적거리던 구염락은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좋아. 황아를 위해 씻으러 가겠어.”
장서열은 침대에서 내려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진 구염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는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전 손등에 희미하게 느꼈던 수염을 떠올리면서, 장서열은 커다란 뒷모습이 침착하게 멀어져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순간 장서열은 어젯밤 술에 취했던 구염락과 오늘 아침 술에서 깬 구염락 중 어느 쪽의 정신이 더 또렷한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마마… 마마.”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장서열이 완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완정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움직였다. 농교는 얼른 침대 휘장을 정리했다.
장서열은 지금 자신이 짓는 표정이 침대 위에서와 과연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 보았다.
‘별 차이 없지 않을까? 온종일 내 표정을 그렇게 세심하게 눈여겨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장서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일을 그토록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구염락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주방에 일러 연자탕莲子汤(연꽃의 열매를 넣어 끓인 탕)을 추가하라고 해라.”
“네, 마마.”
* * *
만정은 오늘 특히 조용했다. 거울 앞에 앉아 의흔에게 머리를 매만지게 한 만정은 비녀를 고르다가 몇 번씩 생각에 잠겼다.
‘폐하께서 돌아오셨다고?’
만정은 순간 기뻐해야 할지 숨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금족령에 의해 줄곧 내실에 갇혀 살았고, 답답증에 못 이겨 두 번이나 병을 얻었다. 이를 알게 된 장서열이 금족령을 풀어준 후에야 그녀는 겨우 경옥전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장서열은 출산 전 몇 번이나 만정을 불러다 출궁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만정은 기왕에 이리 되었으니 죽으면 죽었지 두 번은 시집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정이 감히 그렇게 답할 수 있었던 건 장서열이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장서열은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만정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명문세가의 딸이 어찌 두 남편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이는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궁 안에서 늙어 죽는 게 나았다.
더는 출궁을 언급하지 않는 장서열을 생각하던 만정은 동시에 황자를 떠올렸다. 황자는 매우 마르고 아직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훗날 황위를 잇는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순간 만정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상상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건강한 황자를 낳을 기회가 있었다.
만정은 두려워졌다. 왕 마마가 했던 말이 다시금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서열 언니와 적이 되어야 할까?’
자신이 서열 언니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황제는 언제고 자신이 서열 언니를 뛰어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총애를 독점한 장서열이 언젠가 또 건강한 황자를 낳게 되리라는 건 자명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과연 무엇으로 서열 언니와 경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로 궁을 떠나야 할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 이상 당당하게 그를 사모할 수 없었다. 또한 더는 황궁의 만 귀인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싫어!’
만정은 거울 속 여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이 년이 흘렀고, 그녀 역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정은 자신이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폐하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또 어때. 까짓것 포기해 버리면 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만정은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그대로 와르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도 황제를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를 사랑하겠는가. 그는 언제나 만정에게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낼 뿐이었다.
‘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폐하는 그렇게까지 날 싫어하는 걸까?’
“마마, 이 비녀는 정복을 입었을 때 어울리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의흔의 말에 침묵을 지키던 만정이 손에 들고 있던 공작 모양 금비녀를 내려놓았다.
‘사랑받지 못한대도 상관없어.’
만정의 곁에는 장서열이, 그리고 장서열의 아이가 있었다. 훗날 그 아이는 어머니의 체면을 봐서라도 만정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 황제를 떠올린 만정은 탁 소리를 내며 상자를 닫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다신 좋아하지 않을 거야!’
만정은 고집스럽게 아무 장식도 달지 않았다. 단장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장서열의 비호가 있다면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눈치를 줄 수 없었다. 제아무리 황제라도 장서열이 있는 한 그녀에게 멋대로 굴지는 못 할 것이다.
‘한 번만 더 교양마마를 붙이기만 해!’
만정은 황제가 장서열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궁을 나갈 순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랑스러운 부모님과 가족이 있었다. 눈에 띄는 잘못 없이 현비에게 공경을 다하기만 한다면 가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로 가족과 이별했다가 수양딸로 다시 만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수그리고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이대로 궁에서 사는 게 백 번 나았다.
‘서열 언니의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는 수밖에…….’
의흔은 만 귀인이 더 이상 치장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환궁한 지금, 의흔은 만 귀인이 혹여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설까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정도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도안을 다 골랐으면 가져와 봐.”
만정의 말에 더욱 난처해진 의흔依痕이 우거지상을 하고 말했다.
“마마,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십시오. 황자 아기씨의 만월满月(출생 후 만 한 달이 되는 날) 선물로 자수품을 선물하시는 건…….”
만정은 의흔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아를 해칠 리 없지 않은가.
의산依山이 의흔에게 눈을 흘기며 앞으로 한 발 나와 말했다.
“마마, 경옥전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귀인마마의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걸 저희들은 모두 알고 있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귀인마마를 모함하고자 마음먹는다면…….”
“궁이 안전하지 않다는 거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왕 마마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귀인께서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어찌 모든 일이 다 뜻대로 쉽게 흘러갈 거라 장담하십니까? 만일 궁이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면 현비마마께서는 귀인마마의 선물을 방치한 채 사용하지 않으실 겁니다. 허면 귀인께서는 이를 서럽게 생각하시겠지요.”
“…….”
“그러나 현비마마께서 귀인마마가 보내신 선물을 기꺼이 사용하신다면, 이는 현비마마께서 누군가 귀인마마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신다는 것을 뜻할 겁니다.”
말을 마친 왕 마마가 만정을 보았다.
왕 마마는 매일같이 그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하여 규범에서 벗어난 말을 했고, 다행히 이는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만 귀인은 황제가 환궁하던 날 절박하게 궁문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허황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왕 마마를 힐끗 바라본 만정은 고개를 숙인 채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왕 마마는 갈수록 예의가 없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 마마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정은 정말로 왕 마마의 말처럼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장서열의 비호조차 받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왕 마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모여 뭘 하는 게냐! 어서 가서 할 일이나 하거라.”
* * *
밤새 숙취에 시달린 장서전은 다음날 아침, 자신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아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딸아이는?”
주사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장서전을 부축하며 웃어 보였다.
“유모가 아직 데려오지 않았어요.”
장서전은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신발을 신겨 주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내가 보고 싶었소?”
순간 피가 몰린 주사섬의 볼이 새빨개졌다. 해가 중천에 뜬 아침이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행위에 놀람과 부끄러움이 교차한 그녀가 당황해서 말했다.
“노야… 이러지 마세요…….”
옷이 벗겨지자 주사섬은 부끄러움과 달콤한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도, 남편에게 장자를 낳아 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다정히 대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와서도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았다.
심지어 그는 그녀 곁에 서 있던 아름다운 서 이랑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밤에도 서 이랑의 거처를 찾지 않는 것으로 그녀의 위신을 세워 주었다.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주사섬은 흥분한 남편의 모습에 순간 머리를 스치는 고지식한 생각을 모두 날려 버리고 자신을 누르는 그를 받아들였다. 지금 그녀에게는 예의니 현모양처니 하는 것들보다 장서전의 즐거움이 더 중요했다.
주사섬이 감동에 찬 눈빛으로 장서전을 껴안았다. 그녀의 입에서 듣기 좋은 말들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방 안의 풍경과 달리, 밖에서는 어린 계집종 홍옥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도대체 시간이 몇 시인데 이러신단 말인가!’
해가 중천에 뜰 시간이었다. 그녀는 부인께서 대체 어째서 제멋대로 구는 나리의 장단을 맞춰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서 이랑이 와 있었다. 이러면 첩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