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장서열도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아무리 밀어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그를 결국 뜻대로 안아 주었다.
“자, 알았으니까 얌전히 있어요. 안아 줄게요.”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하지만 술 냄새가 짙게 풍기는 걸 제외하면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고개를 든 구염락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아이처럼 계속 어리광을 부렸다.
“여기에 입 맞춰 줘…….”
구염락이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열심히 콕콕 찔렀다. 장서열이 얼른 그의 손을 끌어내렸다.
“알았어요. 해 줄 테니까 그만해요. 아이참, 가만있어 봐요. 용포부터 벗겨 줄 테니.”
비협조적으로 몸을 비비 꼬는 구염락은 어린아이보다 더 다루기가 힘들었다. 그가 장서열의 손을 탁 쳐냈다.
“싫어! 서열이는 아직 입 맞춰 주지 않았어. 해 줘야 옷을 벗기게 할 거야.”
장서열이 얼른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변에 하인들이 한 명도 없는 걸 확인하자 더 이상 부끄러워하기도 귀찮아졌다. 그녀는 우선 구염락을 얌전히 만들기 위해, 못되게 구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요. 움직이지 말아요.”
장서열의 입술이 그의 뺨에 닿았다. 구염락은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그 틈을 타 장서열이 얼른 구염락의 단추를 풀어 주며 함께 따라 웃었다.
“바보.”
구염락이 쑥스러운 듯 장서열을 가볍게 껴안으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서열이가 최고야. 난 서열이가 제일 좋아! 서열이는 당자랑 놀지 마. 그 자식이 제일 나빠. 맨날 날 괴롭히잖아……. 그리고 권서함도 나빠! 그 녀석은 자기가 가장 대단한 줄 알아. 누가 썼는지도 모를 글자로 류소경 그 고자 녀석의 잘못을 덮으려 하다니… 어림도 없어!”
돌연 정자세로 단정히 앉은 구염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림도 없다고!”
그리고는 다시 기쁘게 장서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장서열은 허둥지둥 구염락을 도와 옷을 벗겼다. 그녀는 구염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술에 취한 사람에게 딱히 논리 정연한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장서열은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어깨 장식과 신발을 벗겨 주었다. 돌연 손가락을 내민 구염락이 진지하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릴 때까지 그는 몹시 열중해 있었다.
“서열이는 당자와 만정을 만날 때는 웃지만 날 만날 때면 웃지 않아……. 그리고 권서함! 서열이는 나보다 권서함을 바라볼 때 더 다정해.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염락이 갑자기 말했다.
“…난 서풍엽이 제일 싫어.”
장서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서풍엽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구염락이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도, 혹은 그녀가 천성적으로 냉담한 탓에 그리 쉽게 마음을 돌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들은 서풍엽의 이름에, 장서열은 환히 웃으며 언제나 아낌없는 사랑을 주던 서풍엽의 모습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술에 취한 구염락은 어린 시절 느꼈던 설움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특히 당자와 권서함, 서풍엽이 억지로 그를 쳐다보던 그때를. 그들이 구염락에게 말을 건 목적은 순전히 장서열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용포를 벗기다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구염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몇 살이에요?”
구염락의 머리까지 모두 정리해 준 장서열이 내의만 입은 그를 큰 침대 위에 걸터앉게 했다. 화려한 봉황이 새겨진 침대 등받이는 백옥으로 만들어져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구염락이 불쌍하게 말했다.
“바보! 여덟 살이잖아.”
다시 고개를 든 그가 헤헤 웃었다.
“아냐, 서열이는 바보 아니야. 서열이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해. 난 서열이 한 사람만 좋아해.”
장서열은 커다란 개처럼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구염락을 토닥이며 애정 어린 눈길로 웃었다.
“알았어요. 당신은 나만 좋아해요.”
과연 과음을 했군.
장서열이 팔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자 구염락이 생각에 잠긴 눈길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몸을 돌려 장서열의 품에 기댄 그가 그녀의 보호 아래 들어가려는 듯 거대한 몸을 오므렸다. 늘어진 그의 긴 머리카락이 장서열의 머리카락과 한데 얽혔다. 이를 본 구염락이 하하 웃었다.
“왜요?”
구염락에게 들볶인 장서열은 지쳐 있었다. 그녀는 구염락의 등을 쓰다듬으며 침대 머리맡에 기댔다.
구염락이 씩 웃으며 자신의 머리카락과 장서열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내 머리카락이 네 머리카락처럼 예쁘다니. 하하, 역시 난 꿈을 꾸고 있구나.”
평소 누렇게 색이 바래 보기 좋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서열이의 머리카락과 한데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서 서열이의 곁을 떠나 결점을 감추자.’
하지만 머리와 달리 구염락은 장서열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그녀의 곁에 계속 붙어 있고 싶었다.
구염락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어차피 꿈이니까. 그는 장서열에게 기대 어리광을 부리며 계속해 비비적거렸다.
장서열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사랑스럽게 구염락을 꼭 끌어안은 그녀가 아이처럼 과거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 대학사가 내 준 과제가 너무 많다고 불평을 했고, 섭궁개가 너무 엄격하다며 또 불평을 늘어놓았다. 또한 구염락은 자신을 바보로 여기고 보물을 빼앗아 가려는 음흉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들이 파내지 못하도록 잘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장서열은 득의양양한 구염락을 보면서 물었다.
“배는 안 고파요?”
그 말에 배를 어루만진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배고파요, 밥 먹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장서열은 불쌍하게 쳐다보는 구염락의 얼굴에 그만 참지 못하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농교를 시켜 식사를 차리도록 했다.
하지만 음식이 차려진 뒤에도 구염락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좀처럼 장서열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끌어내는 자는 누구라도 때리겠다는 듯 과도하게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서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폐하께서 평소 자주 드시던 음식 열 가지를 덜어 와라. 여기서 드시게 해야겠다.”
농교가 얼른 답했다.
“마마, 그것은 규율에 맞지…….”
“괜찮다.”
어차피 조금 전 구염락은 그보다 더한 추태를 부렸다. 그러니 들어와 먹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 전 구염락이 뱉은 닭살 돋는 말을 떠올린 장서열은 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과음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구염락은 부끄러워 죽으려 할 것이다.
“가서 음식을 담아 와라. 내가 폐하를 모시고 식사하겠다.”
장서열도 마침 허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매달리는 술주정뱅이가 있었다. 장서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해요. 스승님이 오셨어요.”
순간 본능적으로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구염락이 반짝이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완벽히 몸에 밴 습관인 듯했다.
장서열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여덟 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 대학사를 이렇게 무서워했다고?’
그러나 주 대학사는 이제 구염락을 보면 마치 역병을 피하듯 몸을 사리는 처지였다. 참지 못한 장서열이 구염락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무슨 생각해요?”
과음 한 번 했다고 지능이 이렇게 뚝 떨어질 줄이야. 분명 여덟 살의 구염락은 지금보다 차분했다. 그러나 여덟 살로 돌아간 현재의 구염락은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소꿉친구를 향한 구구절절한 원망은 이제 막 마무리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금세 식사가 도착했다. 간단한 죽과 오십여 가지의 반찬들이 차려졌으나 현비의 분부로 인해 농교가 가져온 것은 그중 열 가지 정도였다.
기력을 소진한 장서열은 식사를 통해 기력을 보충하고자 했다. 침대 위에 큰 비단을 깐 농교가 장서열을 위하여 제비집 죽을 한 그릇 덜어 주었다.
구염락도 배가 고팠다. 농교가 죽을 담자 입가를 핥으며 부러워하던 그는 마치 원망하듯 장서열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나도 줘.”
심장이 약한 농교는 두려움에 부르르 떨었다. 농교는 옛날부터 황제가 현비에게 집착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오늘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장서열이 위로하듯 농교를 바라보았다.
“폐하께도 녹두죽 한 그릇을 덜어드려라.”
구염락이 얼른 발끈했다.
“싫어! 난 서열이가 먹는 걸 먹을 거야. 안 그러면 비밀을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죽을 한 입 먹은 장서열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농교에게 제비집 죽을 한 그릇 덜어 주라고 지시했다. 현재 상태로 보아 확실히 구염락은 머리에 빠른 영양 공급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농교가 건네주는 그릇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뜻밖에도 장서열의 죽을 훔쳐 먹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가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사실 내가 복수한 거야. 그 짜증나는 고자 녀석 말이야… 이 몸이 류소경을 연못에 빠뜨렸지.”
장서열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만족스러워 하는 구염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과거 그 미제 사건의 범인은 구염락이었다. 불쌍하게도 류소경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오늘날 구염락의 신하가 되었다. 어쩌면 류소경은 그 일로 후유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단하네요. 이제 밥 먹어요. 먹고 이만 자기로 해요.”
그 말에 농교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든 구염락이 바보처럼 웃으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한 입 먹고 장서열을 바라보고, 또 한 입 먹고 장서열을 바라보는 모습은 수줍기 짝이 없었다.
이쯤 되자 농교는 뚫어져라 장서열을 쳐다보는 황제를 공기처럼 취급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나 고결하고 위풍당당한 황제가 마치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면 마치 차가운 바람에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구염락의 집요한 시선을 받는 건 이제 습관이나 다름없었기에 장서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다. 장서열은 자신의 죽을 마신 구염락이 눈을 반짝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멈추는 걸 모른 체했다.
한 입에 제비집 죽을 털어 넣은 구염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장서열에게 기어올라 기쁘게 말했다.
“입 맞춰 줘.”
순간 켁켁 기침을 한 장서열이 입 안에 든 죽을 삼켰다. 그녀가 농교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좋아요. 대신 입 맞춰 주면 얌전히 자야 해요.”
“함께 있어 줄 거야?”
구염락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간절히 좋아하지만 감히 바랄 수조차 없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래오래 꿈을 꾸고, 조금 더 그녀를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네.”
눈을 반짝 빛낸 구염락이 기쁜 얼굴로 장서열의 품에 파고들었다.
농교는 탁자를 치우던 하인들을 데리고 재빨리 방에서 물러나갔다. 세심하게 주렴을 내린 농교는 황제와 현비가 꼭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