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기회를 엿보았으나 작은 세력을 형성하는 것조차 황제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있음을 깨닫고 쓸쓸하게 손에 든 술잔을 비웠다. 연회장에 어떤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는지, 두 사람은 관심조차 없었다.
문신들 중 가장 눈에 띄지만 또 가장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자도 있었다. 현천기는 술을 마시며 무희들의 춤사위에 관심을 기울였다.
춤을 추는 무희 중 한 명은 바로 관지례가 바친 여인이었다. 그녀는 유연한 춤사위를 선보이며 새로 난 버들가지처럼 청초한 자태를 드러냈다. 여우가 홀린 듯 솔솔 퍼지는 향기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황홀케 했다.
황제만을 위한 춤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은 황좌가 있는 각도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이 매혹적인 춤사위가 되었다. 보는 이를 단번에 매혹시킬 만큼 애틋한 자태였다.
현천기는 황제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고 믿었다. 현천기가 봐도 혹할 만한 요물이 오랫동안 여인을 품지 못한 황제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천성적으로 다른 여인에게 줄 마음이 없이 태어난 자였다. 구염락의 눈에 춤추는 무희들은 단지 한 무리의 악관乐官에 지나지 않았다. 연주를 잘하든 춤을 잘 추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백성일 뿐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황아를 달래 재우고 있을까? 얼굴을 붉히며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물을 끓이고 식사를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있을까?
장서열이 자신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순간 구염락은 입맛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체면을 세워 주고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속을 비워 놓았다.
현천기는 마음이 온통 딴 곳에 가 있는 황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추고 교태를 부리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황제는 정녕 사내가 맞단 말인가?’
하지만 갓 태어난 황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황제가 사내구실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멀쩡한 사내가 대체 왜 여인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지?’
현천기는 드디어 알게 된 황제의 새로운 모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정상이 아니었다.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현천기는 상석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앉은 차분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권서함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곁을 오가던 사람들이 무슨 말인가를 건네자 권서함은 군자처럼 단정하게 웃으며 이에 화답해 주었다. 그 말에 권서함의 곁에 있던 자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연회를 뒤로한 채 짧고 살찐 다리로 열심히 뛰어갔다.
현천기는 그가 한림원에 새로 들어온 편수编修(관직명)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는 서예에 심취해 있었고 많은 책을 두루 읽어 자료 취합에 능통했으나, 평소 오만불손하여 다른 관원들을 무시하곤 했다.
그는 최근 형용법전刑用法典을 짓고 있었는데, 능력을 넘어선 업무 때문에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 반응은 분명 권서함의 가르침을 통해 업무상 오류를 깨달은 것일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다.
현천기는 대주국에 권씨 가문이 있는 한 나라가 부흥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문文은 나라를 통치하고 무武는 나라의 치안을 책임진다. 권씨 가문에서 권서함과 같은 인물을 배출한 것은 무덤에 있는 조상들이 벌떡 일어날 만한 경사임이 틀림없었다.
아쉬운 건, 황권을 이어 받은 새 황제가 결코 나약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권씨 가문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으리라.
현천기는 그 대단한 권씨 가문이 철통 같은 황권에 억눌려 있는 현실을 떠올리며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현천기는 황제 외에 자신을 가장 탄복하게 만든 사람이 권서함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장서열 또한 여러 방면에서 능력이 뛰어났으나 그녀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만큼 식견이 얕아, 큰 국면을 지휘하는 다른 사내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천기는 갑자기 좌절감을 느꼈다. 식견이 얕다고 무시하기에는 장서열은 벌써 황장자를 낳았고, 황제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미래에 황제가 될 아이의 생모였다. 그런 그녀를 정말 식견을 얕다고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현천기는 각자 영역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그녀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곡이 끝나자 현천기는 그제야 무희가 이미 물러간 것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큰일을 잊다니!’
번뇌에 휩싸인 현천기가 느닷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술은 맹물처럼 어떤 맛도 느낄 수 없었다.
한편, 서풍엽은 아버지의 곁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환궁하자마자 현비를 보러 갔고, 연회가 시작된 후에야 겨우 도착했다는 걸 이미 전해 들은 터였다.
서풍엽은 연이어 술잔을 들이켰다. 이미 대단원의 막이 내려갔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별안간 고개를 돌린 충왕이 서풍엽의 술잔을 손으로 덮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을 마시거라.”
서풍엽이 어색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한 마음에 감히 아버지를 쳐다볼 수 없었다.
“소자가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술자리 아니냐.”
술에 취한 사람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곁에서 술을 따르던 시녀를 끌어당기며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서풍엽은 그럴 수 없었다. 충왕은 혹시라도 아들이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까 걱정했다.
본래 우상右相(관직명)이었던 범 우시랑范右侍郎(관직명)이 갑자기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황장자를 얻었음을 축하하며 그가 만세를 외쳤다. 일순간 조석궁의 밤하늘에 모든 조정 대신들이 잔을 들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냉랭하던 구염락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그는 모두의 체면을 생각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대신들은 마침내 얼음장 같은 황제를 녹이는 비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폐하는 이런 말을 좋아하는군. 폐하의 비위를 맞추는 게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오랫동안 관직에 몸담아 오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신하들은 계속해 앞으로 나아가 황제에게 술을 권하고, 그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한마디씩 올렸다. 그중에는 현비를 황후로 봉해야 한다는 주청도 있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진 구염락은 이들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권하는 술을 모두 한 잔씩 받아 마셨다. 소리자는 깜짝 놀라 덜덜 떨며 술을 물로 바꿔 놓았다. 이를 모르고 술잔을 들이켜던 그의 안색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서열이가 황후로 봉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찌 물로 축하를 대신한단 말인가!’
이를 눈치챈 소리자는 겁에 질려 얼른 다시 물을 술로 바꿔 놓았다. 다행히 술의 도수는 높지 않았지만 문제는 술을 권하는 신하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이 계속해 어린 황자를 칭찬하고 현비를 치켜세우는 통에 황제가 마신 술의 양은 적지 않았다. 소리자는 눈치껏 혜령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는 약을 올려야 할 듯했다.
여인 없이 열린 연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황제가 적지 않은 술을 마신 덕분에 신하들 역시 제한을 두지 않고 술을 마셨다. 추태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후 온 나라가 기뻐하는 날이었기에 사소한 일은 모른 척 넘어갔다.
연회가 끝날 때쯤엔 주량이 좋은 신하들도 모두 엎어졌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가장 많이 취한 건 신임 무관들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은 장서전이었다.
마치 모든 이들이 전도유망한 장서전의 앞날을 예견한 듯 그에게 쉴 새 없이 술을 권했다. 차마 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장서전은 집에 돌아갈 때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대문이 어딘지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건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연회가 끝난 후, 신하들이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자리를 떠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살랑대는 저녁 바람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갑자기 안 좋은 예감에 사로잡힌 소리자가 몰래 혜령을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위험하다고 느낀 혜령이 속삭였다.
“진 공공을 부르는 게 좋을까요?”
소리자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더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를 모시기 시작한 이후로 그가 이렇게 과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들은 행여나 황제가 술에 과도한 자극을 받아 살기殺氣를 드러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소리자는 진 공공을 불러오라고 사람을 보낸 뒤, 황제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현비마마와 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구염락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자.”
평소와 같은 말투에 흔들림 없는 걸음은 독한 술을 무려 세 통이나 마신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소리자는 놀랍고도 기뻤다. 비록 현비를 언급한 것은 황제에게 아부하려는 목적이 다분했지만, 천만다행히도 황제는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도 끄떡없었다.
소리자와 혜령은 힘들이지 않고 목적을 이루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들은 서둘러 황제를 가마에 태워 조로전으로 보냈다.
침착하게 가마에서 내린 구염락은 곁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무시한 채 꼿꼿한 자세로 조로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아이를 구슬리고 있는 장서열의 곁까지 곧장 걸어간 그는 그녀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은 뒤,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가슴에 몸을 웅크린 채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장서열은 급히 아이를 유모에게 건네주었다. 갓난아기는 아직 깨어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젖 먹이는 시간을 틈타 모처럼 아기를 안고 있던 장서열은 뜻밖에도 그보다 훨씬 큰 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얌전히 고개를 든 구염락이 흐리멍덩한 눈을 떴다. 그가 팔을 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안아 줘.”
막 주렴을 걷고 들어오려던 화 마마는 하마터면 앞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유모는 황자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릴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조심스레 행동했기에 큰 실수를 면할 수 있었다.
장서열이 서둘러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궁녀를 본 장서열은 얼른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구염락은 계속해 귀찮게 굴었다. 작은 목소리는 어리광을 부리는 큰 아이처럼 점점 더 달콤해졌다.
“안아 줘… 안아 줘.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안아 주지 않는 거야…….”
그는 평소 엄격하기만 하던 입을 삐죽 내밀고 시무룩한 얼굴로 장서열의 품에 머리를 부볐다.
궁녀들은 곁눈질 없이 재빨리 밖으로 물러났다. 물러나지 않는 게 바보였다. 만일 황제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후 어리광을 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홧김에 그들을 죽여 입을 다물게 한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