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58)화 (258/449)
  • 제258화

    그녀는 아직 어린 데다 애지중지 귀한 딸로 자란 탓에 제멋대로 구는 버릇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후, 긴장이 풀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흠모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잠시 거리를 가늠한 뒤, 한미한 집안의 고운 딸이라는 천진난만함을 무기로 입을 열었다.

    “폐하, 경기장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이길지 맞혀 보세요.”

    구태여 꾸밀 필요가 없는 경쾌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사람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소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순간 주변은 얼어붙었다. 취기에 줄곧 큰 소리로 이야기하던 한 남자는 순간 웃긴 장면을 보았다는 듯 곁눈질로 소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얼떨떨해하던 소녀는 곧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황제가 오는 길에 만난 모든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여인들이 못난 까닭이 아니겠는가.

    시골의 상스럽고 저속한 계집들과 자신은 엄연히 달랐다.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서화에도 능했다. 그런 자신보다 뛰어난 여인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자는 황제의 뒤에 선 소녀가 내비치는 자신감에 민망하여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 사내들은 여색을 밝히기 마련이었고, 그렇기에 정복하기 쉬운 동물이었지만 어쨌든 그 수법도 사람을 봐 가면서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이제 막 황자를 얻은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린 시절부터 후궁들의 악독한 수법에 수도 없이 당한 사람이었다. 그런 황제가 어째서 외간 여인을 너그럽게 받아 주겠는가.

    입술을 삐죽인 소녀가 사랑스러운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억울함을 가득 담은 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저를 바라보는 거죠? 마치 제가 무슨 더러운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에요!’

    이제껏 이런 무시를 당해본 적 없는 소녀가 서러운 시선을 던졌다. 구염락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녀의 열기에 결국 얼굴을 구겼다. 순간 놀라서 온몸이 굳은 소녀가 갑자기 질겁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구염락이 냉담하게 손을 저었다. 누군가 재빨리 어리석은 소녀를 데리고 나갔다.

    ‘못난 것 같으니!’

    소리자는 진땀을 흘렸다. 그는 소녀를 황제의 곁으로 보내면서 반드시 술만 따라야 한다고 재차 경고했다. 그저 오늘 하루 폐하의 시중을 드는 계집종일 뿐,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누누이 얘기했는데도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섭 장군이 여인을 데리고 가는 걸 보고 눈이 벌개졌던 게지!’

    한창 흥이 난 무관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에 이제는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씨름을 하고 뒹굴며 격의 없이 이 자리를 즐겼다.

    구염락은 다시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갓 태어난 아기를 떠올렸다. 자신을 닮았을지, 장서열을 닮았을지를 생각하던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서 살벌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구염락을 바라보던 당자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당자는 구염락이 어떻게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그가 대체 장서열의 어디에 반해 그리 지극히 총애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날 밤, 원칙을 위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장서전은 심지어 옆에 앉은 여인이 따라 주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사실 순결에 집착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과거 그는 연경에서 온갖 미인에게 매혹되어 풍류를 즐기던 준수한 사내였다.

    다만 사람은 모두 변하는 법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장서전은 유흥에 몰두하는 것을 성숙하지 못한 자의 유치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현재 장서전이 바라는 건 공적과 업적을 쌓으며 아내와 딸을 돌보는 것이었다. 꼭 미인을 곁에 두지 않아도 그는 능력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이 지나갔다. 문무백관은 성 밖으로 나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온 황제를 맞이했다. 수백만의 백성이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다. 깃발을 펄럭이며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대군의 모습에 연경은 온통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궁중에서는 바깥의 성대한 분위기를 몸소 체감하지 못했으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감격하고 흥분하여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들은 궁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했다.

    특히 조로전은 어린 황자 때문에 더욱 바빴다. 조로전의 하인들은 마루의 판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들어내어 다시 닦았고, 모든 물건들을 황제가 떠나기 전 보았던 그 위치로 돌려놓았다. 이들은 황제가 좋아할 만한 것과 익숙한 것들을 모두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아두었다.

    조로전의 하인들은 환궁한 황제에게 과거 익숙한 것들을 보여 주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계절을 되돌려 아예 문밖을 나서던 그 순간으로 황제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었다.

    단장을 마친 장서열의 발그레한 얼굴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윤기가 흘렀다. 한 살 올라선 나이와 함께 아름다움이 더해진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물처럼 부드러운 피부는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웠다.

    마찬가지로 단장을 마친 어린 황자 역시 분홍색 옷으로 갈아입은 뒤 샛노란 강보에 싸여 작은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었다.

    장서열은 제비집을 먹으면서 수시로 어린 황자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매일 아들을 곁에 두어야 안심이 됐다. 황자는 출생 후 젖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장서열과 함께 보냈다.

    정오 3각,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서열은 깜짝 놀랐다.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 안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러나 구염락은 방 안까지 채 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건장한 두 명의 의녀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갔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수차례 쿵쿵거리며 화를 내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밖에서는 예상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를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방에 어린 황자가 있고, 황자는 몸이 좋지 않으니 아무리 황제라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갑옷을 벗고 목욕을 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한참을 설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고집스러운 구염락은 장서열을 한 번 부른 뒤 빠른 속도로 욕실로 달려갔다.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온 농교와 완정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마마,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게 두시면 안 됩니다. 마마께서는 아직 산후조리 중이십니다. 폐하께서 곧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시는 통에 밖에 있는 여덟 명의 마마들조차 이를 막지 못했습니다.

    만일 의관이 어린 황자께서 폐하의 갑옷에 놀랄 거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폐하는 곧장 뛰쳐 들어오셨을 거예요. 마마, 폐하께 마마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장서열은 조금 전 구염락이 몇 번이나 끌려 나가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확실히 부적절하지. 하지만 본궁이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말을 마친 장서열이 웃음을 머금고 침대 바깥에 선 농교를 바라보았다. 농교는 좌절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눈에 푸른빛을 내뿜으며 돌진하는 황제는 농교도, 바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마마께서 폐하를 막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만일 마마를 보지 못하게 한다면 폐하는 몹시 실망하시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농교는 입을 삐죽이다가 더는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구염락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 한편에 앉았다. 작은 요람을 멀리 밀어 버린 그가 장서열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 주는 짙은 그리움을, 장서열은 감히 마주볼 수조차 없었다.

    “고생했어.”

    구염락은 다리 위에 포개 얹은 장서열의 손을 꼭 쥐었다.

    구염락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 사이 키가 자란 그의 체격은 더욱 건장해졌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얼굴은 더욱 냉엄해져 있었다. 그는 손에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으나 장서열은 잡힌 손이 살짝 아프게 느껴졌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감동을 느꼈다. 일 년 만에 만나는 데다 승전을 하고 돌아온 덕분인지 그는 어딘가 달라진 듯 보였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콕 집어 설명할 수 없었다.

    “어서 수건을 가져오너라.”

    농교가 얼른 수건을 건넸다. 장서열은 받아 든 수건으로 구염락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마치 똑같은 일을 수천 번 해본 사람 같았다.

    눈물을 멈춘 장서열이 웃으며 평소처럼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이를 멀리 밀어 놓을 생각을 하다니 참 기특하군요. 온몸이 물투성이잖아요. 아이의 모친만 예쁘고, 아이는 예뻐 보이지 않나요? 세상에 당신 같은 부친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말과 달리 구염락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은 장서열은 부드럽게 그의 두피를 누르고 주물러 주었다.

    “많이 피곤했죠? 다음부터는 너무 필사적으로 싸우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아이가 있는 사람이니 옥체를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해요.”

    마치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듯 장서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구염락은 익숙한 잔소리를 즐겼다. 장서열은 여전히 변함없는 그녀인 것 같으면서도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반짝이는 눈빛과 하얀 피부는 보고 있으면 절로 한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였다.

    구염락은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이 젖은 채였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를 붙들어 둔 채 계속해 머리카락에 맺힌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녀의 동작은 매우 느릿하고 미약했다.

    아무도 장서열을 재촉하지 않았다. 유모는 어린 황자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고, 농교와 완정은 휘장 밖으로 물러갔다.

    장서열은 지난 일 년 동안 황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떤 약은 너무 썼고, 아이가 너무 칭얼대는 통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으며, 말하는 김에 농교와 완정이 가끔 진심을 다해 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두 하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장서열은 마치 노부인들처럼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데 능했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무려 일 년 만에 구염락을 만난 것이다.

    장서열은 입이 마를 때까지 수다를 떨어도 그간 느껴온 억울함을 전달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농교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장서열의 이런 취미였다. 고관대작의 저택에서 자란 꽃다운 나이의 소녀가 어찌 그런 성가신 취미를 갖고 있는 걸까. 이는 조국공부의 노부인보다도 더욱 심했다. 문제는 황제가 그녀의 이런 면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장서열의 품에 엎드려 꼼짝도 않던 구염락은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장서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