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장서열은 서신을 쓰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녀는 가끔씩 생각나는 한 마디까지 모두 서신에 써서 보냈다.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났을 무렵, 비로소 구염락의 회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황을 종결시킨 구염락은 군대를 철수하고 황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대주국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고, 구염락이 이룬 승리는 다시금 신화가 되었다. 백성들에게 구염락은 당당한 개국제왕开国帝王(나라를 세운 제왕)이었다.
조정 대신들 역시 놀라울 정도로 뜻을 함께했다. 그들은 이제껏 한 번도 초치는 말을 하지 않은 척,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 적이 없는 척 입을 모아 황제의 공덕을 칭송했다. 심지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황자까지 이 세상 제일가는 복덩이가 되어 있었다.
이즈음 장서열은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정의 반응을 황당해 하는 한편, 태어나기 전부터 큰 후광을 얻고 있는 아이의 미래에 만족했다. 상아의 이번 생은 순조로울 것이다.
장서열은 배를 떠받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상아의 작은 눈과 코, 자신의 품 안에 엎드려 있던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편, 명정은 건강을 회복했다. 원래대로라면 어화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없는 자를 속이는 건 거스를 수 없는 궁중의 이치였다. 그의 자리는 벌써 다른 이가 대신하고 있었다.
어화원의 대태감은 애석해 하며 명정을 완세국浣洗局으로 보냈다. 때마침 완세국은 착실한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명정은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
어화원 대태감은 말 잘 듣는 명정을 잃는 게 아쉬웠지만, 어화원에 새로 들어온 자는 인사사人事司 대태감의 수양아들이라 보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적인 화예花艺(꽃을 기르는 기술) 서적만 챙긴 명정은 군말 없이 완세국 사람을 따라 갔다. 소문에 의하면 완세국은 가장 고되면서 가장 괴롭힘을 당하기 좋은 곳이었다.
호창은 승진하여 어화원의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어화원 대태감은 화 마마의 말을 떠올렸다. 화 마마는 명정과 호창을 박대하지 말고 현재 심기가 변덕스러운 현비마마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을 승진시키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대태감은 대표로 호창을 승진시키고 각종 처우를 높여 현비를 존중하는 뜻을 보였다.
아첨에 능한 어화원 대태감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정 같이 하찮은 인물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중에 현비마마는 그들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 *
가을바람이 부는 날, 한 줄기 노을빛이 우뚝 솟은 황성을 가득 비췄다. 구염황九炎皇은 귀환 중인 부황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태어났다.
장서열은 잠시 멍하니 어린 황자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아이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모친을 괴롭히지 않고 하룻밤 만에 세상에 나왔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얌전히 유모 품에 누워 젖을 먹고 있었다. 충분한 양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작고 연약했다.
소아에 정통한 태의는 조금 허약하고 심폐 기능이 부족한 것을 제외하면 황자에게 큰 문제가 없고, 이대로 두 살까지만 잘 넘기면 이러한 증상들도 완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서열을 안심시키는 태의의 이마에는 무수한 땀이 맺혀 있었다. 이는 장서열이 회임했을 때 흘린 땀보다도 더욱 많았다. 사실상 그의 말은 황자가 두 살을 무사히 넘겨야만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어린 황자는 태생적으로 몸이 허약했기에 만일 잔병치레라도 한다면 약을 쓸 필요도 없이 곧바로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나 이제 막 어머니가 된 현비에게 어찌 이를 사실대로 고할 수 있겠는가.
* * *
연경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정도가 더 남은 시각,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구염락은 천하를 제패한 기백을 여실히 드러냈다.
구염락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탓에 아이를 처음으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영리하게 어머니 장서열을 괴롭히지 않고 세상에 나와 준 것에 기뻐했다.
주둔지 바깥에서 평상복을 입고 선 서숭산은 달빛 아래 해맑게 웃고 있는 구염락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이 늙었다는 걸 느꼈다.
‘고작 병약한 황자 하나에 저리 기대를 하다니. 네가 쌓은 복이 어린 황자의 몸을 짓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서숭산은 특히 구염락이 갓 태어난 황자에게 지어준 이름이 거슬렸다. 구염황九炎皇이라니! 이는 갓 태어난 아이를 장차 황좌에 올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구염락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후에 구염락이 황제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와 황위를 다툴 정도로 세력을 키운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서숭산은 석양 아래 부하들과 무예를 겨루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궁의 법칙에 무지한 구염락이 우스웠다.
‘비천한 출신은 어쩔 수 없군.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이 있으면 뭘 하겠는가. 어떤 방면에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당자는 모닥불 근처에 앉아 동료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기뻐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당자가 입을 열었다.
“현비마마께서 어머니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현비마마는 항상 양갈래 머리를 틀어 올리고 냉담한 표정을 지어 가까이하기 어려운 소녀였지요.”
구염락은 아이가 보고 싶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더욱 보고 싶었다. 그는 당자가 장서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장서전은 어디에 있느냐? 계속 막사에 숨어 있게 두지 말고 데리고 와라. 나와서 전부 함께 무예를 겨루라고 하라!”
“예, 폐하!”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가 즉시 나서서 장서전을 데리러 갔다.
장서전은 이번 전쟁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제 막 황장자를 낳은 현비의 오라버니였다. 가서 아부를 떨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누가 놓치려 하겠는가.
당자가 하하 웃었다. 그는 겉으로는 호탕해 보였으나 황제 앞에서 절대로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당자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에 친분이 있던 누구도 구염락 앞에서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이는 황권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구염락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절로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백국과의 전쟁 이후,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아무도 감히 구염락에게 건방을 떨지 못했다.
당자는 다른 쪽에 머무르고 있는 서북왕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최근 서숭산은 황제를 피해 다녔고, 연경에 심어 두었던 적지 않은 정탐꾼들을 해산시켰다. 이 사실은 당일 연경에서 급보로 황제에게 전해졌다.
당자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딸에 외조카까지 생긴 귀한 분이 어디 저희와 함께 술을 마실 시간이나 있겠습니까?”
구염락은 당자에 말에 몹시 기뻐하며 아끼는 부하들과 함께 통쾌하게 술을 들이켰다.
주량이 좋지 않은 섭궁개는 구석에 숨어 제자들 사이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숨기려 애썼다. 평소 그들은 사단장인 섭궁개에게 감히 방자하게 굴 수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황제가 황자를 얻은 건 국가의 큰 경사였다.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자들은 섭궁개를 끌어다가 술을 마시도록 강요했다. 잠시 후 섭궁개는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로 현지 관리들이 보내온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갔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암묵적인 관행이었다. 여종들은 사실상 양갓집 규수로, 외모와 자태가 모두 단정했다. 장군의 시중을 든다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각 가문에서는 새로 두각을 드러낸 장군과 노장의 눈에 들길 바라며 너도나도 앞다투어 여식을 보냈다. 여인들은 사모하는 영웅에게 정성을 다했다.
특히 이번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대부분 젊은 장군들로 나이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노인들인 문관과 달리 무관들은 보통 청년이었기에, 여인들로선 군공이 있는 남자에게 첩으로 시집가는 것이 일반 관리에게 시집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돈도 세력도 없는 지방의 한미한 가문의 여인에게 이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승리하고 돌아가는 데다 특별히 기분이 좋았던 구염락은 오늘만큼은 이러한 관행에 굳이 엄격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무릅쓴 부하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가거나 아리따운 여인을 맞이하는 것 정도였다.
구염락은 황제의 아량으로 부하가 마음에 둔 여인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섭궁개는 제자들의 야유 속에서 술기운으로 어지러운 머리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당자의 곁에는 수줍음 많은 소녀가 앉았다.
구염락의 곁에서 술을 따르는 여인은 그 지역 태수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이었다. 이런 여인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각 가문에서 보내 올리는 여인의 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신분이 낮거나 전공을 세우지 못한 자는 곁에 여인을 두지 못했다.
양갓집의 좋은 규수들은 모두 조신한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이들은 곁에서 남자보다 더 긴장한 채로 몹시 굳어 있었다.
당자는 줄곧 술을 들이켜며 곁에 있는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차피 연경에 여인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는 설령 몇 년 동안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 해도 돌멩이를 황금으로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구염락은 천성적으로 이런 걸 싫어했다. 그에게 이런 여인들은 앞에서는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돌아서면 살벌한 싸움을 벌이는 이들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인들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떠밀려 나온 장서전의 옆으로 소리자의 지시를 받은 한 여인이 앉았다. 장서전은 굳이 동료들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누군가는 반드시 이 자리에서 여인과 함께해야 했고, 불행히도 그는 오늘 당직이었다.
여인은 인품, 외모, 전공战功까지 고루 갖춘 장 통령统领(무관의 직급 중 하나)의 곁에 앉자 가슴이 쿵쾅거려 붉게 물든 얼굴을 어쩌지 못했다. 특히 이곳 백업성百业城은 연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덕분에 연경에 이름난 젊은 장군들의 소식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소녀는 장서전의 곁에 앉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황공해하는 한편,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장서전은 주변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주량은 섭궁개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하필 장서전의 주변에는 짓궂은 사람들이 한 가득 있었다. 장서전은 상석에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결국 장서전은 동료들과 벌주를 마시고, 화살을 겨누며 실력을 겨뤘다.
황제의 뒤에 선 태수의 막내딸은 큰 눈을 깜박이며 흥겹게 노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비록 황제가 두렵기는 했지만 아직 어린 탓에 아이다운 호기심이 더 강했다. 게다가 황제는 겉보기에 매섭게 보였지만 걸핏하면 사람 머리를 베는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경기장에서 궁술 시합을 벌이는 용사들을 바라보는 한편, 암암리에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에게 응원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