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멀지 않은 곳에 꿇어앉아 있던 농교와 완정은 오랫동안 현비를 모신 정에 기대어 몰래 고개를 들고 상황을 살폈다.
현비가 홀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둘러 다시 이마를 숙인 채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누구도 현비가 왜 갑자기 화를 냈는지 알지 못했다.
‘화 마마가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이라도 한 건가?’
한편 장서열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 안에 피가 고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제야 아픔 속에서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느릿한 목소리는 여전히 엄동설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본궁이 아픈 이유가 그들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장서열이 차가운 눈으로 꿇어앉은 노비들을 훑어보았다.
전생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농교와 자신을 위해 소리자를 견뎌낸 완정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하인들은 모두 자신이 조로전에 있든 냉궁에 처박히든 관심이 없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원한에 사무친 사람처럼 명정을 처단하려 들다니!
‘이익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들! 좋다. 그럼 누가 명정보다 내게 잘해 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증명해 보거라! 그럼 명정을 건드리게 해 줄 테니!’
다시 화가 치솟았다. 장서열은 이유 없는 화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떨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들을 모두 냉궁에 처넣고 얼마나 버티는지 지켜봐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놀란 화 마마는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마마,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고 노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
아랫사람의 충심은 주인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걸 장서열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서열은 항시 분노를 억누르고 구염락과 보조를 맞추려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황궁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 자신에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선물하고, 다시 전생의 전철을 밟게 만들 수 있었다.
천천히 평정을 되찾은 장서열이 꽉 쥔 주먹을 풀자 손톱 위에 옅은 피가 묻어났다. 이를 무시한 그녀가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전생의 기억을 억누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는 참으로 대단하구나. 먼저 행동에 옮긴 후 나중에 통보하듯 보고를 올리다니 말이다. 내 배 속의 황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너희 덕분에 악업을 쌓게 되었다. 참으로 고맙구나.”
화 마마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노비가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배 속의 황자 아기씨와 페하를 위하여 복을 쌓을 수 있도록 당장 신형사로 달려가 그들을 풀어 주라 이르겠습니다.
마마, 노비가 기꺼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고 화를 거두어 주십시오… 노비가 잘못했습니다…….”
바닥에 꿇어앉은 화 마마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 장서열은 냉랭한 눈으로 화 마마를 훑어보았다. 누구에게도 죄를 뒤집어씌울 마음이 없던 그녀가 비아냥댔다.
“화 마마는 그리 노력하여 알아낸 게 뭐지? 정말로 삼색 모란에 본궁의 몸을 불편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더냐?”
화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심문을 한 신형사 태감들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마당에 무턱대고 헛소리를 지껄일 순 없었다.
“없습니다. 노비는 폐하께서 죄를 물으실 것이 두려워 어화원에서 꽃을 심는 두 소태감의 잘못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노비가 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화 마마는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숨김없이 고했다.
“마마,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어 복중 아기씨를 보호하십시오. 노비는 결단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황자님 앞에 악업을 쌓으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마마, 제발 노비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장서열은 아래에 꿇어앉은 화 마마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자신의 그릇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소란이었으므로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화 마마를 처벌할 일도 아니었다.
“본궁이 복중 황자를 걱정하는 마음에 험한 말을 내뱉었다. 어화원의 두 태감은 놓아주고 앞으로는 황자를 위해 복을 쌓도록 하거라.
그날은 갑자기 가슴이 아팠던 것뿐이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갑자기 걸으니 몸이 불편했던 것 같구나. 완정,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 날 좀 부축해다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완정이 장서열을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농교는 서둘러 호 태의를 불렀다.
호 태의가 도착했을 때 장서열은 이미 탕약을 마시고 잠이 든 후였다. 주렴 너머 장서열의 진맥을 마친 호 태의가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를 뒤따라 나온 완정에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큰 문제가 없으시다. 시간에 맞춰 약을 드시게 하고 푹 쉬게 하면 괜찮아지실 게다.”
호 태의는 잠시 머뭇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여 말했다.
“당분간 마마께서 감정 기복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거라. 마마께서는 조용히 요양을 하셔야 하니 시끄러운 일들로 마마의 귀를 더럽히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네.”
공손하게 호 태의를 배웅하는 완정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조금 전 주인을 위해 이불을 정리하던 그녀는 현비의 손바닥과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이 왜 그렇게 화를 낸 건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완정은 곧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마는 생각이 깊은 분인 데다 회임 상태가 좋지 않으니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와중 화 마마는 근거 없는 누명을 씌워 애먼 사람을 잡았다. 곧 태어날 황자를 위해 복을 쌓지는 못할망정 악업을 쌓았으니, 복중 아기씨에게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마마께서 이성을 잃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완정은 약을 들고 들어간 농교가 차분한 얼굴로 현비의 상처에 약을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현비가 크게 화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농교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정은 농교에게 더욱 탄복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자 장서열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를 본 완정이 앞으로 다가가 상처 부위를 호호 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 이렇게 하면 상처가 아프지 않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완정의 어리숙한 모습에 농교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완정을 밀어낸 농교가 계속해 약을 바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걸 믿는 거야? 행여나 약이 흩어지지 않게 조심해. 주무시는 마마께서 더 아프실라.”
놀란 완정은 즉시 입술을 다물고 어리석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얼굴을 붉혔다.
농교는 장서열의 손바닥에 남은 상처를 보며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농교는 줄곧 주인의 성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성미가 불같았던 주인은 어느 날인가부터 갑작스레 철이 들었다.
농교가 생각하는 현비는 가끔 성질을 부리기는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타고난 성정이 불같은 현비가 완벽히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끔 하인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내던지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대부분 겁을 주기 위한 행동일 뿐 실제로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장서열은 어린 시절 옷에 주름이 많이 졌다는 이유로 농교에게 화병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화병은 대부분 농교의 옆에 떨어졌을 뿐, 몸에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불만스러운 마음을 조금 격하게 드러내는 사람일 뿐이었다.
“농교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농교가 숨기지 않고 말했다.
“마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어. 그때는 마마께서 한 번 화를 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했거든. 아까 일로 많이 놀랐지? 괜찮아. 많이 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많이 보다 보면?’
놀란 완정이 입을 딱 벌렸다. 장서열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본 건 단 두 번뿐이었다.
평소 주인은 자애롭고 인자한 사람이었다. 사실 한창 나이의 그녀에게 자애롭고 인자하다는 말은 다소 적절치 않았지만,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애롭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농교는 완정이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농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마는 어린 나이에 어째서 온화한 걸 넘어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 같아 보이는 걸까?’
농교는 자신을 바라보는 현비의 시선이 매우 부드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속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 가끔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마마께서 자신을 더 많이 지켜봐 주길 바라며 속으로 흐뭇해하기도 했다.
약을 다 바른 농교가 현비의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었다. 이어 침대 휘장을 내린 농교가 공손하게 방에서 물러나왔다.
한편, 신형사에 갇혀 있던 명정과 호창은 들것에 실려 나와 처소로 보내졌다. 그중에서도 고열에 시달린 명정은 그날 밤 다시 더 먼 곳으로 보내졌다.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까 두려웠던 화 마마는 명정과 호창에게 각각 의사医士를 붙여 주었고, 그들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일에서 손을 뗐다.
* * *
장서열은 지난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그 좋아하는 가극도 듣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 위에서 탕약을 마시거나 멍하니 있거나 잠을 자는 데 썼다.
명정을 보았기 때문인지, 장서열은 며칠 동안 줄곧 딸 상아裳儿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용히 군중 속에 앉아 있던 상아는 공손하게 절을 올린 뒤, 그녀를 모후母后라고 불렀다.
텅 빈 기억 사이로 상아가 혼례를 올리던 날 짓던 수줍은 표정이 떠올랐다. 난생 처음 용기를 내 장서열의 품으로 뛰어든 딸아이는 그녀에게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당시 장서열은 이미 냉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었고, 온 신경이 구염락에게 쏠려 있었기에 조용한 딸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다.
훗날 상아의 소식을 알려 준 것은 명정이었다. 다만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헌원씨 가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볼록한 배를 어루만지다가 이를 탁자 삼아 삐뚤삐뚤한 글씨로 구염락에게 서신을 썼다. 편지는 아이가 요즘 매우 활발해졌고, 자꾸만 발길질을 하는 통에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곧 회신이 왔다.
「나의 귀환을 기다려.」
회신을 받았을 때 장서열은 회임 팔 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몸은 나날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태의는 오직 몸과 마음의 안정을 취하라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상아를 매우 소중히 여겼던 장서열은 어지러운 생각은 멀리 내쫓고 온 힘을 다해 태교에 힘썼다.
구염락은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지만 장서열의 귀에 들어오는 건 오직 드물게 이어지는 승전보뿐이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다. 보름 내내 소식이 없는 건 결국 좋은 소식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