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마마! 손 놓으세요! 계속 이렇게 잡으시면 안 됩니다, 마마… 마마, 소인을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마마…….”
농교의 흐느낌을 뒤로 하고 호 태의가 약방문을 내렸다.
“어서 현비마마의 손을 떼어 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시오!”
이어 호 태의가 신속하게 박하기름을 꺼냈다.
“완정, 어서 이걸 현비마마께 발라 드려라.”
완정은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장서열의 코 밑에 박하기름을 바른 뒤 인중을 눌렀다.
잠시 후, 태의원에서 당직을 서던 태의가 모두 도착했다. 호 태의는 처소를 나가 동료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태의들은 모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송 태의가 먼저 물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지금 현비마마를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복중 태아는 아마…….”
불길한 말이라고 생각한 송 태의가 끝을 흐렸다. 호 태의 역시 안색이 새파랬다.
농교가 약을 달여 들어오자 호 태의는 농교 대신 나이 든 화 마마를 붙들고 한바탕 원망을 쏟아 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마마를 잘 모셔야 한다고 재차 말씀드리지 않았소.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돌아다니다니요! 조심했어야지, 어화원이라고 다 같은 어화원이 아니라는 걸 정녕 몰랐단 말이오?”
화 마마는 무척 억울했다. 누구도 이런 상황을 바랐을 리 없었다. 그녀도 몹시 초조하고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멀리 가지도 않았습니다. 소인은 또한 현비마마께서 왜 갑자기 상태가 위중해지셨는지 모릅니다. 혹 태의가 잘못 판단했다면 어쩌시려고요? 현비마마를 지치게 만들어 놓고 이리도 책임을 떠넘기다니요!”
뭐라 반박하려던 호 태의는 일단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현비를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면 태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러다 태아와 산모가 목숨을 잃는다면, 돌아온 황제는 여기 있는 누구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호 태의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화 마마에게 어느 곳을 갔었는지 물었다. 화 마마는 현비가 갔던 곳을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호 태의, 소인은 정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마마께서도 웃고 떠드셨고요. 그러다 갑자기… 아! 그렇지!”
화 마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마마께서 삼색 모란을 보셨습니다. 그 삼색 모란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호 태의가 노하여 말했다.
“뭘 기다리는 게요! 어서 사람을 보내 모란을 가져오시오!”
화 마마는 지체 없이 사람을 보내 모란을 키우던 두 태감과 뿌리째 뽑혀서 진흙이 묻은 삼색 모란을 가져오게 했다.
한편, 농교는 입을 다문 장서열에게 탕약을 먹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탕약을 먹여야 한다는 호 태의의 말에 농교는 법도도 무시한 채 침대 위로 올라가 장서열의 입을 벌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장서열은 끝까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얼마 못 가 농교의 손가락은 선혈로 흠뻑 젖어 들었다.
농교는 아픔을 참고 장서열의 입을 벌리는 한편 완정에게 탕약을 먹이도록 시켰다. 이를 수차례나 반복한 끝에 이들은 겨우 장서열에게 탕약 반 사발을 먹일 수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농교는 장서열의 안색이 미세하게 돌아왔음을 눈치챘다. 농교의 옷섶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농교가 장서열의 손을 잡고 가볍게 힘을 주자 뜻밖에도 장서열이 먼저 손을 뗐다. 농교의 옷에는 조금 전까지 주인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농교가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레 불렀다.
“마마, 마마. 소인을 보세요. 소인 농교입니다.”
완정이 얼른 박하기름을 건넸다.
“마마께 이 냄새를 맡게 하세요.”
그런 다음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간 완정이 애타게 태의를 불렀다.
“태의! 호 태의! 어서 와 보세요! 마마께서 정신을 차리셨어요! 눈을 뜨셨다고요!”
호 태의는 어떠한 문제도 찾을 수 없는 삼색 모란을 내팽개치고 황급히 손을 씻은 뒤 내실로 뛰어들었다. 몇몇 태의 역시 급히 따라 들어갔고, 나머지는 계속해 삼색 모란을 관찰했다.
모란을 심은 두 태감은 이미 신형사에 끌려가 언제라도 현비와 함께 순장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결과였다.
농교는 태의들이 들어오자 황급히 호 태의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호 태의는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현비를 보았다. 다행히 안색은 훨씬 좋아져 있었고 꽉 쥐고 있던 손도 모두 펴진 상태였다.
비록 현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지만, 호 태의는 진맥을 짚은 후 반쯤 마신 탕약을 보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손을 거둔 호 태의가 공손하게 두 걸음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마마, 지금은 어떠십니까?”
호 태의는 섣불리 방심하지 않았다. 장서열의 눈빛은 여전히 멍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잡아 뜯긴 듯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암담한 존재가 튀어나와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만천하에 폭로한 느낌이었다. 만일 배 속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장서열은 명정을 보고 놀란 충격에 다시 구염락과 함께 살아갈 용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명정의 등장은 그녀의 비천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그녀를 떠받치고 있던 영광과 자부심을 산산이 조각냈다.
장서열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비굴하게 무릎 꿇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개 태감에게 무릎을 꿇으며 그의 관심과 비호에 만족했던 나날들. 그녀의 존엄과 자부심은 결국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었다.
일국의 황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바깥의 부녀자나 거리의 기녀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장서열은 제발 그만 생각하라고 스스로를 향해 윽박질렀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 몰입할 때가 아니었다. 아이! 그녀보다 더 불쌍한 딸이 배 속에 있었다.
“가슴이 좀 아프지만 배는 괜찮아.”
장서열은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불편한 심기를 참고 견디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호 태의는 한숨을 돌렸다. 사실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현비가 이리 된 것은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 것으로, 급격한 감정 기복이 초래한 결과였다.
하지만 화 마마에 따르면 현비는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다른 비빈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가 궁에 있지도 않은데, 누가 현비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호 태의는 감히 속엣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는 이 생각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눌러둔 채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호 태의가 식은땀을 닦았다.
“그럼 됐습니다. 마마께서는 몸이 허약하시니 반드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소신이 마마께 안태약安胎药(유산 방지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약을 드시면서 며칠간 푹 쉬십시오. 밖에 나가시는 건 몸이 완전히 회복되신 후에 가능합니다. 부디 몸을 소중히 하십시오. 소신은 계속 태의원에 머물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장서열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내저어 호 태의를 물러가게 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멍한 눈으로 다산을 기원하는 수가 놓인 비단 휘장을 바라보았다. 이내 쓴웃음을 지은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명정이 고개를 들었던 순간, 그녀는 수치심에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전생에서보다 훨씬 젊은 얼굴을. 아직 대태감이 되지 못한 그는 엄격하다기보다 겸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침대보를 꽉 움켜쥔 장서열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번득였다.
“농교!”
농교가 새로 달인 약을 들고 황급히 들어왔다.
“마마! 소인 여기 있습니다!”
침대 탁자 위에 약을 내려놓은 농교가 얼른 장서열을 부축해 일으키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약 드세요. 태의가 말하길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라고 했습니다…….”
곁에 있던 완정이 눈물을 훔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지 않아요. 소인이 꿀을 넣었으니 어서 드세요…….”
사실 완정은 방금 전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방금 주인이 지은 표정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장서열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완정과 농교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약을 마신 후 곧 잠이 들었다.
조로전의 하인들은 주인이 평온하게 잠들자 그제야 오후 내내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들은 탈진한 몸을 이끌고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현비의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실보다 몇 배나 부풀려졌다. 결국 소문은 돌고 돌아 현비와 태아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었고, 이에 조정 안팎은 끊임없이 탄식하는 소리로 들끓었다.
깜짝 놀란 조옥언이 당일에 입궁 허가를 받고 오후에 즉시 딸을 보러 달려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조옥언이 살짝 붉어진 눈가에 걱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 어미를 놀라 죽게 할 셈이냐?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장서열이 마지못해 웃으며 침대에 누워 죄책감에 배를 어루만졌다.
“죄송해요, 어머니.”
장서열 역시 이렇게 갑작스럽게 명정을 보게 될 줄은, 또한 스스로가 전생의 일을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조옥언은 힘없는 딸의 모습에 더는 야단칠 생각을 접고 엉뚱하게도 태의에게 노여움을 발산했다.
“태의들 말은 듣지 말거라. 앞으로 침대에만 누워 있고 내전内殿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해. 그렇다면 최소한 몸이 피곤하지는 않겠지.
네 몸은 네가 챙겨야 한다. 네가 회임한 아이는 무려 이 나라 황제의 장자다. 존귀한 아이를 두고 절대 남에게 공격할 틈을 줘서는 안 돼!”
조옥언은 매우 진지했다. 그녀는 이제껏 전해 들은 궁중 암투에 대하여 한바탕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덧붙여 말했다.
“누구도 믿지 말거라. 친구도 믿지 못하는 판국에 남이야 오죽하겠니.”
조옥언의 마지막 말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말이 암시하는 바는 명백했다. 믿었던 풍윤제에게 배신을 당했던 조옥언은 그 교훈을 딸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장서열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순진했던 어머니의 과오를 조금도 들추어내지 않았다. 장서열의 눈에 어머니는 전형적으로 외강내유인 인물이었다. 또한 어머니는 가끔 못되게 말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실제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