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모란을 본 그녀가 놀라며 말했다.
“확실히 예쁜 꽃이구나.”
모란꽃의 윗부분은 연분홍색이었으나 밑으로 갈수록 점점 짙어져 아래쪽은 거의 붉은색에 가까웠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꽃들 사이 알록달록한 꽃송이는 더욱 돋보였다. 특히 색상의 변화가 보기 좋아 더욱 예뻤다.
모처럼 완정이 기쁜 얼굴을 하는 데다 곁에 있던 사람들 역시 모두 꽃에 흥미를 보이며 칭찬하자 장서열이 웃으며 말했다.
“화 마마, 가서 저 꽃을 기른 화장花匠(꽃을 기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수소문해 데려오너라. 본궁이 상을 내리겠다.”
완정이 얼른 답했다.
“감사합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큰 복을 받으시고, 어린 황자님은 총명하고 건강하실 거예요!”
장서열이 참지 못하고 풋 웃었다.
“누가 보면 너에게 상을 내리는 줄 알겠구나.”
완정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답했다.
“그럼요, 마마. 비록 다른 이가 상을 받더라도 이는 노비에게 상을 내리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인이 꺾은 꽃이 마마를 기쁘게 해 드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소인의 영광 아니겠사옵니까.”
장서열은 궁녀들이 기쁘게 웃어 보이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정원 가득한 꽃향기를 맡으며 따뜻한 물을 마시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고 유쾌했다.
잠시 후, 회색 원예복을 입은 소태감 두 명이 불려왔다.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두 젊은 태감은 이제껏 주인을 만나본 적이 없는 듯 열심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다.
“노비, 현비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홍복을 누리십시오.”
찻잔의 뚜껑으로 찻잎을 고르던 장서열이 온화한 눈빛으로 그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이 놀라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너희가 이 삼색 모란을 키운 것이냐?”
물론 삼색 모란을 키우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둘 중 그나마 담력이 큰 자가 다시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마마. 노비의 사부님께서 여러 해 동안 전심전력으로 연구한 끝에 오늘의 삼색 모란이 탄생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사부님께서는 모란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난달에 돌아가셨습니다.”
화 마마는 추가로 장서열의 귓가에 그들의 사부가 연로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속삭였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색 모란을 키울 수 있는 자라면 분명 궁중 원예림에서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일 터였다. 모란을 좋아하는 주인을 만났다면 원예 대태감은 많은 복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세 황조 동안 모란에 관심을 둔 황제는 없었다. 선황 때만 해도 그러했다. 설령 후궁 중 모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황후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감히 말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장서열 역시 모란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모든 꽃을 좋아했기에 특정한 꽃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너희 사부가 기른 꽃이나, 너희 또한 이 삼색 모란을 애지중지해 꽃을 피웠으니 재주가 범상치 않다. 농교야, 상을 내리거라.”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금붕어 모양의 금덩이를 꺼낸 농교가 환하게 웃으며 태감들에게 다가갔다.
“현비마마의 눈에 드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상을 받고 또 열심히 모란을 심어 앞으로는 칠색七色 빛깔 모란을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현비마마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현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농교 아가씨. 노비들은 현비마마의 은혜에 부응하도록 더욱 노력하여 칠색 모란을 길러내도록 하겠습니다.”
장서열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농교, 땅에 심기만 하면 모란에서 저절로 칠색 빛깔이 나오는 줄 아느냐? 그럼 본궁이 먼저 널 땅에 심고 칠색 꽃이 피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농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반박했다.
“마마, 소인을 땅에 심으면 누가 마마께 좋은 차를 올리고 좋은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까? 제가 땅에 묻히면 아쉬워하실 거 다 압니다.”
완정이 얼른 대답했다.
“마마, 농교 언니를 땅에 심으시지요. 앞으로 소인이 마마께 차를 따라 드리겠습니다. 소인이 농교 언니보다 더 잘해 낼 것입니다.”
“이 얄미운 것, 감히 내 머리 위로 기어올라? 앞으로 내가 널 어떻게 혼내 주는지 두고 보자!”
장서열이 더욱 즐거워하며 웃었다. 완정이 농교를 놀리는 건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완정을 갖고 노는 쪽은 농교였으나, 지난 일 년 사이 말수가 적었던 완정의 성격은 명랑하게 변했다. 장서열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음성이 아래 꿇어앉아 있던 태감의 사고를 어지럽혔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 회색 태감복을 입은 소년 태감은 몰래 고개를 들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인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놀란 그는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아무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아닌, 계집종들이 서로 시시덕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소년의 머릿속은 조금 전 눈이 마주친 아름다운 여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운 입술이 던지던 옅은 미소는 그가 온 마음을 다해 키우는 모란과 비교할 수도 없이 어여뻤고, 그의 심금을 울렸다.
소년은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일곱 빛깔 안개 속에 선 선녀가 뇌리를 어지럽혔다. 소년은 감히 짙은 안개를 밀어내지도, 미인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현비의 안색이 곧장 창백해졌다. 그녀의 손은 의자 팔걸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현비가 이상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건 농교였다. 놀라서 멈칫하던 농교가 황급히 뛰어왔다.
“마마, 마마! 왜 그러십니까? 어서 빨리 태의를 불러라!”
눈치 빠른 궁녀는 이미 치마를 걷어들고 뛰어가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궁중 규율을 따질 수 없었던 궁녀가 나는 듯이 빠르게 달려갔다.
화 마마와 다른 궁녀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조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사람을 시켜 현비를 들쳐 안고 처소로 돌아갔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만일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두의 목이 달아날 것인데!’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어화원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금붕어 모양의 금덩이를 든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태감을 제외하면 텅 빈 주변은 조용했다.
상으로 받은 금덩이를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소문의 현비를 만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듯했다.
“마마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나이가 비교적 많은 호창胡仓이 사제师弟(동문 후배) 명정明庭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 곳을 바라보던 명정이 놀라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명정은 현비의 회임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왠지 모르게 하늘이 그녀를 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몰래 훔쳐보았던 미인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고개를 숙였다. 금덩이를 꽉 쥔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졌다.
호창은 긴장한 어린 사제를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우리는 이제 어화원 노비들 중 주인님을 만나본 유일한 사람들이잖아. 꼭 칠색 모란을 키워서 마마를 기쁘게 해 드리자.”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든 명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잘생기지도, 웃전을 모실 수 있을 정도로 준수한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이목구비가 가지런하고 웃전과 마주치더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기에 어화원에 배속된 것이다.
명정은 본래 꽃을 기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농사짓는 일에는 뛰어났다. 그는 세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밭일을 시작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혼자서 농사를 지었음에도 큰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기울자 어머니는 명정을 입궁시켰다. 궁에서 누군가 그에게 어떤 특기를 갖고 있느냐 물었을 때, 그는 농사를 잘 짓는다고 답했다. 그때 사부의 눈에 든 명정은 어화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명정은 반드시 칠색 모란을 키워 내 현비마마께 보여 드리리라 다짐했다. 갑자기 삶의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십칠 년을 살면서 지난 오 년간 어화원에서 배운 것들이 이렇게 값진 것이었다니. 그는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기로 다짐했다.
* * *
조로전으로 돌아온 장서열은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몸부림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비웃는 누군가를, 또 한편으로는 몰래 밥 한 그릇을 쥐여 주고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우직한 미소를 본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화면은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붉게 달아오른 우직한 얼굴은 거친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장서열에게 끊임없이 입을 맞추고 그녀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장서열은 그가 가져온 각종 음식과 몇 년 동안 씻지 못해 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다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열은 그를 단단히 붙잡아 그가 오로지 자신만 돌봐 주고, 냉궁에서 그에게 빌붙으려는 다른 작자들을 무시하게 만들고 싶었다.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명정의 입맞춤이 뜨거워졌다. 궂은일을 하던 태감의 손이 구염락 외에 어떤 이에게도 허락지 않은 피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손에 조금 힘을 줄 때마다 두꺼운 굳은살이 그녀의 피부에 상처를 냈다. 괴로워하며 장서열을 껴안고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서 냉궁 대태감의 차갑고 근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잘 보이려 애쓰는 큰 개처럼 그녀를 기쁘게 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다.
장서열은 수치심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녀는 괴로움에 떨며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미 다 지난 전생에서의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황제의 총비이자 황제가 떠받드는 여인이었다. 구염락은 다시는 그녀를 냉궁에 버리거나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머릿속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명정의 환심을 사려 비굴하게 동정을 구걸하고 애쓰던, 실성한 여인의 환영이 뇌리를 뚫고 들어오자 장서열은 고통에 몸을 움츠렸다.
장서열은 끝내 미쳐 버린 자신의 형상과, 자신이 호수에 빠질까 두려워하며 제 뒤를 바짝 쫓던 명정의 모습과 싸웠다.
장서열은 머릿속에서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래야만 누구도 그녀가 생존을 위해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지, 그녀가 자신의 자랑인 몸뚱이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