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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52)화 (252/449)
  • 제252화

    “널 궁에 혼자 두려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

    장서열을 껴안은 구염락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백국을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물론 구염락이 지명한 섭궁개는 확실히 그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백국이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말을 뱉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품에 기대어 웃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안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돌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구염락은 속으로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번 일 이외에도 장서열은 명절에 국암사에 있는 그의 친모에게 후한 명절 선물을 보냈고, 두 명의 여의관을 보내 일 년 내내 모친의 곁을 지키게 했다. 또한 특별히 국암사의 방장에게 지시하여 모친이 더는 절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 주었고, 국암사 뒷산에 간단한 가옥을 짓도록 했다. 이는 말만 간단한 가옥이었을 뿐 실제로는 3품 관원의 저택에 견줄 만큼 고상했다.

    커다란 위안을 받은 구염락은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참으로 훌륭한 여인이었고, 그런 여인을 가진 것은 평생의 복이었다. 그러니 어찌 남들이 그녀를 부수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

    때문에 백국과의 전쟁은 반드시 필요했다. 구염락은 과거의 일을 아는 자를 모조리 죽여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태의에게 장서열의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출정에 나섰다. 문관은 권 각로阁老가, 무관은 충왕이 통솔했다. 두 사람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 황제와 원수를 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조정을 맡기고 연경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뒤로한 채 전장으로 떠났다.

    모두들 황제의 기백에 탄복했다. 그는 전장에서 죽거나 강산의 주인이 바뀔 가능성 따위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불안한 요소를 눈앞에 두고 친히 전장에 나가는 건 보통의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했다. 만일 황제가 정말로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다면 대주국은 신하와의 균형을 잃은 채 제왕 한 사람만의 왕국이 될 것이다.

    구염락이 친정을 나간 후, 연경 귀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우열을 다투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명부인诰命夫人(고관의 모친 혹은 아내의 봉호)들의 계급도 나뉘었다.

    황제의 명으로 중임을 맡은 이들의 부인은 자연스레 높은 권세를 과시했고, 새로이 등장한 인재의 부인들 역시 귀족 사회에 나타나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귀부인들의 열기와 달리 황실의 여인들은 황제가 황궁을 떠남과 동시에 조용해졌다. 경옥전의 대문은 굳게 닫혔고, 냉궁 역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국암사에서는 약연이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장서열은 조용히 건강을 돌보며 태교에 힘썼다. 짙어지는 봄날의 생기 속에서 장서열은 가끔씩 밖으로 나가 걷거나 청아한 노래를 들었다. 하루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하지 못한 장서열에게 이러한 나날은 결코 눈부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국가 대사에 관한 논쟁이 벌어져도 누구도 전생처럼 장서열을 찾아와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장서열 역시 단지 황제의 후궁일 뿐인 본인의 신분을 의식해 조정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보내온 서신을 꼼꼼히 읽은 뒤 붓을 들어 황궁에 생긴 변화를 시시콜콜 알렸다.

    수양버들에 싹이 난 이야기, 어화원에서 난로를 치우자 매화꽃이 졌다는 이야기, 예상치 못했던 봄비가 내린 뒤 가지마다 싹이 터서 벌써 이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자잘한 내용이 끝도 없었다.

    서신을 다 쓰고 나면 장서열은 종잇장에 향기를 쏘여 호피 주머니에 봉해 일등공에게 건넸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다시 그의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구염락의 서신은 장서열의 서신보다 더욱 재미가 없었다. 그는 변경의 채소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 하늘에 뜬 달이 얼마나 이지러졌는지에 대해 말했고, 말이 말똥을 밟는 바람에 황제의 위엄이 반감되었다는 등의 실없는 한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이야기들은 마치 영원히 써 내려가도 끝이 날 수 없다는 듯 매번 호피 주머니를 가득 채웠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조 부인이 딸을 보기 위해 세 번째로 입궁을 했을 때는 이미 바깥에 녹음이 우거지고 보리 물결이 바람을 따라 춤을 추는 시기였다. 얼었던 하천이 세차게 흐르자 대주국의 영토에도 생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갈수록 몸이 무겁고 둔해지자 장서열은 차츰 외출을 꺼리게 되었다. 그녀는 매일 식사를 마친 후 실내를 잠시 거닐다가 이내 자리에 누워 혹시 모를 조산을 방지했다.

    장서열은 최근 계절의 변화에 슬픔을 느꼈다. 밥상 앞에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에게 먹히는 새순을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다. 심지어 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조차 시끄럽지 않았다. 장서열은 새들이 편히 날아가도록 시위들이 새를 쏘아 죽이지 못하게 했다.

    장서열은 창가 앞 긴 의자에 앉아 바깥의 변화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초목이 우거졌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따라 꽃은 향기를 풍겼다. 그럴 때면 그녀는 배를 어루만지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에게 미안해했다. 전생에서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았던 딸이 이번 생에서까지 험난한 삶을 시작하게 될 줄이야…….

    장서열은 배 속의 딸을 생각하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배를 토닥이며 딸이 조금 더 굳세게 버텨 주기를 바라는 한편, 상의국尚衣房에 어린 공주를 위해 많은 옷을 짓도록 분부했다. 그렇게 완성된 옷을 보면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봄이 지나 천둥 번개가 치는 여름에 접어들자 장서열은 서신을 줄였다. 서신을 쓸 때면 몸이 힘들어 오랫동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안부를 물을 때마다 몇 번의 붓놀림으로 간단하게 회신했으나, 감미로운 감정이 깃든 그의 서신은 원망의 말은커녕 그녀의 몸이 불편한 때에 함께하지 못하는 자책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랜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다. 제거해야 할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국에서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이는 대주국의 군대가 그들 영토의 절반까지 깊숙이 침투해야만 비로소 반격에 나설 터였다.

    구염락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전진하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서전은 다시 한번 승진했고, 당자 역시 비범한 능력을 드러냈다. 서비절 또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세대가 전장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과 몰락을 반복하는 사이, 구염락은 과거 자신과 거래했던 이를 멸하고자 총력을 다했다.

    어느 날, 저군전을 거닐고자 바깥에 나온 장서열은 아무도 후궁에 출입할 수 없도록 일등공의 경계 아래 조당朝堂이 철저하게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서열은 굳이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강제로 문을 열 생각은 없었다. 그녀 또한 안전한 장소와 한적한 생활을 좋아했다.

    구염락이 후궁의 출입을 막은 건 당연히 그녀를 위해서였다. 구태여 후궁을 뛰쳐나가 다른 이에게 자신을 해할 기회를 줄 이유가 없었다.

    장서열은 더욱 나태하고 게을러졌다. 얼마 전까지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던 그녀는 후궁에 파리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완벽히 마음을 놓았다.

    조로전에서 그녀는 절대적으로 안전했다. 남은 일은 마음 편히 출산을 기다리며 편히 쉬는 일뿐이었다.

    장서열은 골머리를 써가며 총애를 다투거나 여인 때문에 손을 더럽힐 일 없는 현재까지의 생에 만족했다. 이번 생에서 제대로 손찌검을 해 준 것은 태후뿐이었다. 짜증나는 사람은 이미 사라지거나 궁 밖으로 쫓겨났다.

    장서열은 자신이 뼛속까지 거만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쓸 가치조차 없는 자에게 손을 쓰는 것을 매우 귀찮아했다. 전생에서는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죄다 덤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선 것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장서열은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지금이 좋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식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크게 바라는 것 없이 자녀들의 교육에 집중하고, 구염락과 함께 가극을 감상하는 날들이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평안히 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훗날 구염락에게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후궁이 생긴다면 함께 마주 앉아 겉과 속이 다른 대화를 나누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혼례를 올린 자식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나서서 도와줄 수 있을 만큼의 권력. 장서열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여름 소나기가 빈번히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어느덧 회임 육 개월 차가 된 장서열은 안정기를 맞이했다.

    태의는 큰 문제가 없으니 조금 더 많이 걸어도 좋다고 했다. 다만 태아가 크게 자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먹는 양을 조금 줄여야 출산 시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서열은 한 무리의 궁녀와 태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었다. 조로전에서 어화원으로 향하는 동안 간밤에 내린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열은 팔자걸음에 대한 완정의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배려심 있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농교는 조심스럽게 장서열을 부축했다. 태의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거듭 장담했지만 농교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몇 걸음에 한 번씩 휴식을 취해야 하는 장서열을 보면서 농교는 속으로 태의를 욕했다.

    ‘이게 어떻게 마음 놓고 활동해도 되는 상태라는 거야? 정말이지 돌팔이가 따로 없군!’

    농교는 장서열이 가극을 들을 때 자주 머물던 작은 정자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과일과 베개가 놓인 의자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어화원에서 맑고 은은한 향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얇은 비단이 살랑살랑 흩날리며 춤을 췄다.

    “마마,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장서열은 확실히 피곤했다. 손수건을 들어 코 위에 맺힌 땀자국을 지운 그녀가 농교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멀리 뛰어갔던 완정이 다채로운 꽃다발을 받쳐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흥분하여 재잘대고 있었다.

    “마마, 이것 보세요! 가운데 있는 모란은 무려 삼색입니다, 마마. 참 예쁘지요?”

    완정은 보물을 바치듯 꽃다발을 장서열에게 가까이 갖다 주면서도 그녀가 만지지는 못하게 했다. 장서열 역시 이를 받아들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화 마마가 허리에 받쳐 주는 베개에 몸을 기대면서 슬쩍 꽃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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