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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51)화 (251/449)
  • 제251화

    왕 마마가 냉정하게 말했다.

    “귀인마마, 현비마마께서는 노비 출신의 천한 계집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금용보다 지위가 높고, 심지어 당신만큼 출신이 고귀한 귀인마마를 폐하의 총비로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폐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든 현비마마께서는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폐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켜야 할 것이 생긴 현비마마께 가서 총애를 나눠 달라 하시면 그것이야말로 현비마마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소인 또한 귀인께서 현비마마와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애를 얻게 된다면 자식을 얻고 싶어질 것이고, 자식을 얻는다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귀인께서 어린 황자를 위해 싸워야 하는 날이 오면 과연 현비마마와의 관계가 어찌 될 것 같습니까?”

    “…….”

    “귀인마마께서도 이제 어리지 않으십니다. 귀인마마는 정말로 폐하 때문에 현비마마와의 우정을 포기할 생각이십니까? 현비마마께서는 아직 황후가 아니시고, 귀인마마께서는 신분이 고귀하십니다.

    들리는 말로는 현비마마의 복중 아기씨가 황자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귀인마마께서 회임을 하여 장자를 낳는다면, 또한 훗날 현비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신다면 그때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더욱 존귀한 황자는 누구고, 마땅히 황위를 이어야 할 황자는 누구입니까?

    훗날 현비마마께서 출궁을 요구하고 폐하를 양보하라 하신다면 귀인마마께서는 정말로 현비마마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귀인마마, 자녀를 가택에 연금시키고 폐하를 밀어내실 수 있습니까? 정말로 그런 결과를 감당하실 수 있겠냔 말입니다. 결국 귀인마마는 현비마마를 미워하게 될 겁니다.”

    만정이 뒤로 물러서며 큰 소리로 반박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서열 언니는 폐하께 아무런 감정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내가 없더라도 언젠가 폐하께는 다른 여인이 생길 텐데, 왜 그게 내가 되면 안 된다는 거지? 난 이미 폐하의 후궁이잖아!”

    왕 마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열 언니는 폐하께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말이 만에 하나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물론 귀인마마께서는 폐하의 여인이 될 수 있지요. 만일 귀인마마께서 현비마마와 자매 관계를 잃을 각오가 되셨다면 말입니다. 소인은 단지 마마께 일깨워드리는 것뿐입니다. 설령 현비마마께서 정말로 폐하께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해도, 누구든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싸우기 마련입니다.”

    “…….”

    “그래도 현비마마와 맞설 생각이라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귀인마마께서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그 전에 소인이 먼저 현비마마께 찾아가 미리 귀띔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비마마께서는 귀인마마를 향한 비호를 거둘 것이고, 폐하께서는 그 즉시 귀인마마의 거처를 권비마마가 계신 냉궁으로 옮길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현비마마를 제외한 모든 후궁을 냉궁으로 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만정은 의자에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왕 마마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만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둔한 주인에게는 극약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진 만정은 멍하니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그럴 리가… 나와 서열 언니는 그리도 친한데, 내가 총애받는다고 해서 서열 언니가 그걸 꺼릴 리 없어.’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만정에게 말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훗날 서열 언니의 자식이 제위에 오르는 데 내 아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때도 언니는 여전히 날 비호해 줄까?’

    만정은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정말로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서열 언니가 정말 내게 손을 댈까? 항상 잘해 주고 매사에 나를 위해 주던 서열 언니가 정말 그럴까?’

    만정은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마음 속 또 다른 목소리는 그녀에게 헛된 망상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만정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이기적인 게 아니야. 아니야……!’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만정이 의자 팔걸이에 엎드린 채 머리를 묻고 작게 흐느꼈다. 그녀는 황제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명실공히 그의 후궁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황제의 여인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서열 언니는 영원히 홀로 그를 독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정은 알고 있었다. 서열 언니가 그걸 원한다면 그는 함부로 많은 여인을 거느릴 수 없었다. 서열 언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황제는 그런 서열 언니에게 의지했다. 그는 결코 서열 언니를 서럽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정은 슬피 울면서 처음으로 장서열과의 간극을 실감했다.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본받아 동시에 한 황제를 모실 수도 있지 않은가.’(아황과 여영은 중국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요 임금의 두 딸로, 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사이좋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의 눈을 스치는 한 줄기 희망을 눈치채고 다시 나직한 말투로 말했다.

    “귀인마마, 소인이 아까 알려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귀인마마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정말로 귀인마마께서 현비마마를 찾아가신다면 페하께서는 반드시 귀인마마를 궁 밖으로 쫓아내실 겁니다.”

    고개를 번쩍 든 만정이 벌컥 화를 냈다.

    “무엄하다! 네가 감히… 감히!”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다니. 왕 마마는 죽고 싶어 환장한 게 틀림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만정은 왕 마마를 끌어내 목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만정이 실제로 그렇게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꿇어앉은 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목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왕 마마의 시선에 만정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궁에서 얼마나 초라한 처지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냉담한 왕 마마의 말이 날아들었다.

    “소인, 재차 귀인마마를 일깨워 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

    “여봐라! 어서 귀인마마께 다시 규율을 가르쳐 드려라! 훌쩍훌쩍 울다니 이 얼마나 체통 없는 행동이냐!”

    즉시 몸을 일으킨 두 명의 교양마마가 공손한 태도로 만 귀인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를 멍하니 지켜보던 만정은 돌연 황당해졌다. 경옥전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만정은 반박할 힘이 없었다.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하인들은 갑자기 사나운 맹수가 위장을 벗듯 너도나도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정은 차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만정을 바라보던 왕 마마는 그녀가 내키지 않는 마음을 꾹꾹 참아가며 얌전히 의자에 앉아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 마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왕 마마는 방금 만정보다 더욱 긴장한 상태였다. 아무리 어리고 힘없는 주인이라도 주인은 주인이었다. 아랫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주인에게 더는 회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고서는 결코 주인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만 귀인은 현비를 등에 업은 인물이었다.

    왕 마마는 혹시라도 조금 전 만 귀인이 물불 가리지 않고 현비에게 달려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쩌면 만 귀인은 현비에게 자신의 목을 베는 조건으로 출궁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만정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왕 마마는 결심을 굳혔다. 기회를 봐서 만정이 뱉은 불경스러운 말을 서둘러 현비에게 알리리라. 혹시라도 현비가 자신의 머리를 베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를 고해야 했다.

    * * *

    눈 깜짝할 새에 새해가 지나갔다. 백국과의 변경 문제로 인해 황궁은 명절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월 대보름은 더욱 참담했다. 아침 조회에서 황제는 문관 몇 명을 제거했다. 조정 대신들은 더더욱 명절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백국과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국경에서는 몇 차례 마찰이 발생했고, 무역을 위해 개방한 변경의 도시에서는 흉기를 든 강도가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백국은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백국의 백성을 살해한 대주국의 죄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주국은 백국에게 본분을 지킬 것을 경고하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양국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황제의 성격을 익히 알게 된 주화파(主和派, 전쟁을 기피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파)는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매일 같이 군사를 훈련시켜 장대한 군대를 만들어 낸 제왕에게 싸우지 말라고 간언하는 건 헛된 짓이었다. 특히 황제가 제2군을 창설한 뒤로 모든 문관은 농사와 직물 생산에 온 힘을 쏟으며 대주국의 발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 시기 장서열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배에 생긴 변화는 태의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건 무사히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황제는 태의원에 큰 상을 내렸다. 누구보다도 새해를 편안히 맞이한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태의들이었다. 모든 태의들은 집집마다 경사를 치렀다.

    그제야 안심할 수 있게 된 장서열은 매우 기뻐하며 더욱 부지런히 탕약을 챙겨 먹었다. 그녀는 태의의 처방에 따라 한 방울의 탕약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리고 감히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조정 일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염락에게 만일 친정亲征(황제가 친히 출정을 나감)을 나가게 된다면 매일 그를 맞이할 필요 없이 조용히 태교에 전념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더욱 편해질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구염락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동시에 분한 듯 장서열을 껴안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짐이 친히 출정할 생각인 것을.”

    사람마다 취미는 제각각이었으나 구염락의 취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쟁이었다. 이는 그의 어두운 심리 상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정말로 순수한 취미였다. 장서열은 언젠가 조석궁에서 실제와 다름없는 각종 전투 대형과 변방에 위치한 십여 개 국가의 지형도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아직도 호전적인 기질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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