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단조롭고 재미없는 생활 속 출렁이는 파도가 몰아쳤다. 만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즘 들어 만정은 너무 무료한 나머지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치우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왕 마마, 무슨 일이야?”
왕 마마는 의자에 앉아 규율을 배우는 만정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주렴을 사이에 둔 그녀가 변함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귀인마마. 금용이 궁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마치 어떠한 영향도 없다는 듯 조금의 과장이나 허풍도 없는 말투였다.
혹여나 만정이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왕 마마는 한숨을 돌렸다. 이렇게 좋은 예는 또박또박 만 귀인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
“어째서?”
만정의 무료한 생활이 순간 탈출구를 찾았다. 마치 얼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처럼 만정은 가급적 천천히, 시간을 때울 이 화제가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왕 마마가 곁에 있던 의산(依山)을 바라보았다. 의산은 네 명의 대궁녀 중 가장 입담이 좋은 아이였다.
왕 마마의 뜻을 알아챈 의산이 기쁘게 목을 가다듬은 후 생동감 있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마마. 금용 그 천한 계집이 수치도 모르고 폐하를 유혹했답니다. 이에 화가 난 폐하께서 금용을 궁 밖으로 내쫓고 헌원씨 가문에 첩으로 보내셨습니다. 아마 만 귀인마마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금용은 정말 예쁘장한 아이였습니다. 노비는 현비마마를 제외하고 그렇게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노비들은 모두 그 아이가 승은을 입고 폐하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런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의산의 말에 만정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찮은 계집종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될 수 있다고?’
게다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황상의 침대에 오르려 하다니, 그야말로 헛된 망상이 아닌가. 만정이 불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궁에서 내쫓아 첩으로 보낸 건 처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 그 대역무도한 계집은 매우 쳐서 죽여야 했어. 서열 언니는 가만히 있었대? 그런 천한 계집종이 살아서 제 발로 궁을 나가도록 말이야.”
만 귀인이 질문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의산이 진실 반 거짓 반으로 입을 열었다.
“귀인마마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금용은 보통 계집종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폐하를 모시며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지요. 소문에 의하면 폐하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평소 금용에게 몹시 잘해 주셨고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금용이 미색으로 폐하를 꾀려 했고, 진노하신 폐하께서는 그녀를 궁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 일로 현비마마께서 놀라시는 바람에 하마터면 복중 태아가 위험할 뻔했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의산이 탐탁지 않은 투로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금용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현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으니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폐하께서 현비마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뻔히 알면서 말입니다. 현비마마를 끔찍이 위하시는 폐하께서 현비마마께 미안할 일을 만드실 리가 없지요.”
“…….”
“현비마마도 불같은 성격이라 하마터면 이 일로 폐하와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합니다. 어젯밤 현비마마께서는 일찍 침소에 드셨고,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조로전의 대문을 두드린 끝에 겨우 들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현비마마께서 방에 있는 물건을 한바탕 때려 부순 뒤, 만일 폐하께서 그 비천한 계집을 들인다면 죽어 버리겠다고 하셨답니다!”
순간 왕 마마가 살짝 탐탁지 않은 눈길로 의산을 바라보았다. 웃전에서 있었던 일을 뒤에서 떠벌리는 건 중죄에 속했다.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둘 뿐이었다.
의산의 말 속에 어떠한 암시가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챈 만정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의혹을 거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의산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을 뿐더러 침착한 왕 마마가 그런 의산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하지만 만정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마치 자신이 궁을 떠나지 않으면, 만에 하나 황제가 자신을 총애하게 되면, 그건 곧 금용처럼 서열 언니와 맞서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만정은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속으로 의산과 왕 마마가 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천한 계집종과는 엄연히 달랐다. 게다가 그녀를 아껴 주는 서열 언니가 자신을 금용처럼 대할 리 없었다.
의산은 만정이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현비마마께 정말 잘해 주십니다. 그리도 아름답고 현명하시니 폐하께서 다른 여인을 보지 않고 오로지 현비마마만 원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금용 그 천한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봐야 스스로 굴욕을 자초할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절대로 다른 여인은 쳐다보지도 않으시는 걸요! 폐하께서는……!”
“닥쳐라!”
의산과 왕 마마, 그리고 시중을 들던 모든 하인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만정의 처지와 관계없이 주인이 화를 낸 이상 그녀들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고정하세요, 마마!”
만정은 더 이상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몹시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앵두 같은 입술 위에 희끗희끗한 흔적이 남았다.
“그래 봐야 비천한 계집종일 뿐이잖아!”
만정은 황실에 정식으로 들어온 후궁이었다. 귀인(贵人)과 금용처럼 천한 계집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금용이 폐하와 동고동락 했다고? 정말로 폐하와 동고동락한 사람은 서열 언니야!’
만정은 황제가 장서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황제에게 단 한 명의 여인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만정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금용은 장서열의 태아를 위험하게 했지만 만정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 서열 언니와 함께였다. 만에 하나 자신이 총애를 받게 된대도 그것이 서열 언니에게 수치일 리 없었다. 그녀는 철없이 장서열의 자리를 넘볼 생각이 없었다.
만정은 만약 장서열이 구염락의 총애를 독점할 생각이라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황제가 홀로 밤을 보내는 시간을 틈타 다른 잡스러운 것들이 흉계를 꾸미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만정의 눈이 돌연 반짝였다.
‘그래, 서열 언니는 지금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나는 서열 언니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서열 언니를 도와 폐하를 단단히 붙들어 놓자!’
만정이 갑자기 말했다.
“어서, 어서 현비마마께 사람을 보내 내가 마마를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라! 마마를 뵈러 경옥전을 나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말이야!”
왕 마마는 불현듯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의산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잊은 채 즉시 공손하게 절을 올린 왕 마마가 만정을 향해 신중하게 물었다.
“귀인마마, 현비마마를 뵈려는 이유가 무엇이온지요? 현비마마께서는 몸이 불편하시고, 또 아직 태아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 가급적 만남을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무시하듯 왕 마마를 힐끗 바라본 만정이 거만하게 말했다.
“아니. 서열 언니는 날 보면 저절로 나을 거야.”
궁녀들이 뭘 알겠는가. 서열 언니는 지금 자신을 무척 필요로 했다. 서열 언니를 위해 반드시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한다. 다시는 다른 이들이 기회를 노리며 서열 언니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왕 마마는 속으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만일 현비의 태기가 불안정하지 않았다면 왕 마마도 만정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현비도 만정의 생각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왕 마마는 차마 도박을 할 수 없었다. 만일 현비가 만 귀인을 눈에 거슬려 하고, 그대로 만 귀인이 다시 현비를 화나게 한다면 황제는 경옥전의 궁녀들을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도 왕 마마를 위해 용서를 빌어 줄 수 없었다.
허리를 곧게 편 왕 마마가 처음으로 만정을 향해 매몰차게 입을 열었다.
“귀인께서는 현비마마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현비마마를 더 화나게 만드실 참입니까, 아니면 현비마마께서 귀인마마를 얼마나 총애하시는지 확인을 하시려는 겁니까?”
“…….”
“귀인마마, 아무리 친해도 설마 현비마마께서 무조건적으로 귀인을 어여삐 여기고, 심지어 폐하까지 내어 주실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귀인마마께서는 현비마마를 너무 만만히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왕 마마의 말은 명백한 질책을 담고 있었다. 순간 억울한 마음에 새파랗게 질린 만정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서 있는 왕 마마를 분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음흉한 본색을 이제야 드러내는군! 그래 봐야 하찮은 노비인 주제에!’
왕 마마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무엄하다!”
만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옥전의 하인들은 다시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들이 경외심을 보이는 대상은 만정이 아닌 왕 마마였다.
그들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왕 마마의 지시를 기다렸다. 궁에서 총애 받지 못하는 후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 마마야말로 경옥전의 진정한 우두머리였다.
왕 마마는 주렴 사이로 보이는 화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여쁘고 사랑스러우며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착한 소녀. 남자라면 모두 좋아할 만한 그녀는 궁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주인은 아니었다.
“감히 묻겠사온대, 소인이 무슨 말을 잘못하였는지요?”
왕 마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하면서도 담담했다. 화가 난 만정이 의자에서 일어나 주렴 앞으로 다가왔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난 폐하의 후궁이자 현비마마와 각별한 자매 사이다. 그런 내가 현비마마에게 불경을 저지르다니, 이것이 네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왕 마마는 문득 현비의 체면을 생각해 줄곧 만 귀인을 봐 주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녀에게는 직설적인 말로 충격을 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만 귀인은 끝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왕 마마가 매서운 눈빛으로 만정을 직시했다.
“귀인마마, 소인의 말은 구구절절 사실입니다. 나쁜 마음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소인의 추측이 맞다면 방금 귀인께서는 조로전으로 가 현비마마를 대신해 폐하를 모시겠다고 말할 생각이었겠지요. 현비마마께서 안심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소인의 말이 틀립니까?”
속마음을 들킨 만정이 얼굴을 붉혔다.
“그 입 다물어라!”
물론 왕 마마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다. 총애도 못 받는 하찮은 귀인에게 차릴 예는 이미 충분히 차렸다. 황궁에서 총애를 받지 못하는 주인은 누구라도 노비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제껏 만 귀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왕 마마는 충분히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잘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