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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49)화 (249/449)
  • 제249화

    헌원씨 가문의 지위를 생각하면 황제의 곁에서 시중이나 들던 하찮은 시녀가 결코 가문의 사당에 이름을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은 그저 서로의 체면을 생각해 원만하게 상황을 넘기고자 했다.

    어질고 품성 고운 헌원 부인은 이제 막 가문에 시집을 온 금 이랑(금용, 이랑姨娘: 첩을 부르는 말)을 위해 별원과 많은 수의 하인을 내렸다. 심지어 이들은 헌원 부인이 혼인을 하며 데려온 하인 중 따로 유능한 이를 선별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혼수로 토지까지 내린 헌원 부인은 금 이랑이 이곳에서 착실하게 첩의 도리를 다하여 훗날 가문을 위해 많은 자손을 낳아 주기를 바랐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저 가문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도 상관없었다.

    헌원 부인은 이처럼 금용을 격식을 갖춰 대우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가문의 안주인이 아들의 첩실에게 지나치게 살가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금용은 급하게 준비된 나무 침대에 앉아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손수건을 힘껏 쥐어뜯었다. 그녀는 장서열을 찾아가 도발하지도, 황제가 정한 선을 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황제는 기어코 그녀를 출궁시켰다.

    ‘정말 폐하의 마음속에는 내가 없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금용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과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위해 나서 주었던 폐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게 다 거짓이었다고? 예전의 다정했던 폐하는 어디로 간 걸까?’

    금용은 황제와 소리자까지 세 사람이 남소원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날들과 황제가 자신을 위하여 근심해 주던 일을 떠올리며 가슴이 쥐어짜듯 아파오는 걸 느꼈다.

    “이… 이랑, 차 드세요…….”

    새로 들어온 어린 시녀가 심상치 않은 금용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밀었다. 큰 눈에 눈물을 머금은 금용은 그와 반대되는 괴팍한 표정으로 시녀를 노려보았다. 어린 시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찻잔을 들어 올린 금용이 갑자기 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방 한편에서 침대보를 정리하던 시녀들이 깜짝 놀란 채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이랑, 고, 고정하세요.”

    금용은 그녀들을 쳐다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곳은 남소원도, 저군전도, 조석궁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는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너그럽게 감싸 주던 그를 더는 볼 수 없었다.

    금용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모두 물러가라. 혼자 있고 싶다.”

    시녀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조용히 물러갔다.

    텅 빈 방 안에는 금용 한 사람과 아직 펼쳐지지 않은 병풍만이 남았다. 깨끗하게 닦지 못한 화장대를 비롯해 모든 것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내부는 주인이 얼마나 황급히 도착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손쓸 겨를이 없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락으로 추락한 금용의 마음은 더 이상 따스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로를 맞이하다니. 남의 첩이 된 마당에 앞으로 무슨 낯으로 살아가겠는가.

    그녀는 어떻게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허락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황제를 그토록 아끼고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금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옥으로 장식된 얇은 비단 휘장을 잡아뗐다. 조용히 두 비단을 하나로 묶은 그녀가 이를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그녀의 눈 속으로 결연한 의지가 스쳐 지나갔다.

    금용은 죽음을 통해 황제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녀의 충심과 사랑은 모두 진실이라는 걸. 그녀는 황제가 아닌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의자 위에 선 금용은 가장 낮은 들보 위에 비단 끈을 맸다. 그녀는 경건한 작별을 고하듯 눈물을 머금고 ‘황상.’하고 읊조렸다.

    이윽고 비단 끈에 머리를 집어넣은 그녀가 눈을 감고 발아래 놓인 의자를 찼다. 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비명이 채 길어지기도 전에 얼른 시녀의 입을 막은 노파들은 익숙한 듯 금용을 내린 후 신속히 현장을 처리했다. 이를 모두 목격한 대여섯 명의 하인들은 즉각 통제되었다.

    늙은 두 마마들은 즉시 사람을 보내 헌원 부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가장 나이 든 노파가 품 안에 안긴 버들 같은 소녀의 인중을 차분하게 눌렀다.

    금용이 깨어났다. 코 밑에는 피가 배어날 정도로 깊게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잠시 뒤 헌원 부인이 도착했다. 위엄에 찬 중년의 부인은 그 즉시 아들을 갖지 못한 어머니의 온화함을 지운 채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금용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금용을 쳐다보는 헌원 부인의 눈빛은 온통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할 수 없었다.

    헌원 가문의 주치의가 황급히 앞으로 나와 생기 없이 침대에 누운 여인의 맥을 짚었다. 잠시 뒤, 의원이 공손하게 말했다.

    “부인, 이랑에게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새벽부터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것뿐이니 푹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금용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비단이 덮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헌원 부인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금용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손을 휘저어 의원과 불필요한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헌원 부인이 심복만을 남겨둔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 게냐? 죽고 싶거든 오는 길에 죽을 것이지, 왜 여기서 소란을 피워 가문에 먹칠을 하려는 것이냐!”

    금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재가 되어 버린 그녀는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헌원 부인은 이런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금용은 마치 모든 이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는 듯 굴고 있었다. 심각한 병이었다. 어떻게든 고쳐 놓지 않으면 언젠가 가문에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

    “초 고고(姑姑).”

    헌원 부인은 곁에 있던 노부인을 향해 냉랭한 눈짓을 보냈다. 초 고고는 건장하지만 온화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절을 하고 앞으로 나온 초 고고가 군말 없이 금용의 가슴을 누르며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금용은 전혀 두렵지 않은 눈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초 고고를 노려보았으나, 이윽고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부림쳐야 했다. 질식되는 느낌이 강해지자 금용은 필사적으로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고통이 더해졌다. 금용은 힘없이 몸부림쳤다. 처음에는 그럴 가치도 없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신체의 모든 기능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금용은 몸 위에 있는 사람의 손을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헌원 부인은 고통과 공포로 가득 찬 금용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금용은 생사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헌원 부인은 익숙한 듯 냉정하고 차분한 눈빛으로 금용을 쳐다보았다. 평소 첩실과 딸들을 온화하게 대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번만 온화했다가는 이 계집 때문에 목이 잘리고 멸문을 당할 참이었다. 헌원 부인이 금용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몹쓸 병이 완치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금용은 고분고분하게 처소에만 틀어 박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금용에게 남은 건 초 고고를 볼 때마다 감히 떨지도 못하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금용은 헌원씨 가문의 여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헌원 부인은 쓰러진 금용을 보며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녀는 금용의 눈이 정말로 뒤로 넘어가려 할 때쯤 비로소 초 고고가 손을 떼게 했다.

    금용이 즉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짝 죄어 있던 기도가 완전히 열리지 않은 탓에 그녀는 비강 속에 쌓인 공기를 어쩌지 못해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걸 느낀 그녀의 입술이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나이 든 몸을 곧게 편 헌원 부인은 침대 위에 쓰러진 금용에게 마치 경고하듯 경멸에 찬 시선을 던졌다.

    “난 네가 어떤 억울한 사연을 갖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이곳에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헌원 가문에 온 이상 넌 이곳의 사람이고, 가문과 영욕을 함께 해야 한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저택에서 이런 소란을 벌이면 필히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게 해 줄 테니 각오하거라!”

    다시 한번 묵직하게 코웃음을 친 헌원 부인이 심복에게 금용을 잘 감시하라 이른 뒤 몸을 돌려 나갔다.

    헌원 부인은 열세 살에 헌원 가문에 들어와 지금까지 온갖 풍파를 견디며 살아왔다. 하마터면 저 어린 계집 때문에 말도 안 되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뻔했다. 헌원 부인은 결코 금용을 용서할 수 없었다.

    금용은 침대보를 꽉 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잠긴 채 산송장처럼 탐욕스럽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에게선 더 이상 어떠한 초연함도 보이지 않았다.

    망귀루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처소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방 안에는 오직 노고고(老姑姑)와 금용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금용이 계속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곁에 선 노고고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뼈 위에 가죽만 남은 듯 헌원 부인보다 더욱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고고는 또렷한 눈으로 침대 위에 있는 금용을 바라보았다.

    노고고는 앞으로 금용의 몸이 성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항시 호흡에 어려움을 겪으리라. 초 고고의 손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당한 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노고고는 금용을 동정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맞이한 좋은 날들이 하마터면 금용 때문에 끝장날 뻔했던 것이다.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죽어 마땅한 죄였다. 그녀가 죽어선 안 될 사람만 아니었다면 노고고는 그대로 금용을 황천길로 보냈을 것이다.

    헌원 부인은 내내 힘든 삶을 살아오다가 어렵사리 적자(嫡子)를 얻었다. 이제야 겨우 며느리도 보고 아가씨에게도 혼처가 생겼다. 얼마나 행복한 나날인가. 헌원 부인은 최근 자주 웃고 있었다.

    노고고는 반드시 금 이랑을 잘 보살펴서 오래도록 헌원 부인의 행복을 지켜 주리라 다짐했다.

    * * *

    연경에서 가장 화려한 경옥전 안, 왕 마마는 금용의 소식을 조금 늦게 전해 들었다. 금용이 황궁을 떠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누군가 소식을 알렸기 때문이다.

    만정은 새로 온 교양마마에게 규율을 배우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몇 시진씩 서 있어야 했기에 다리가 매우 아팠고, 화라도 내려 하면 서너 명의 교양마마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심지어 잠이 들 때에도 쉼 없이 중얼거리는 마마들 덕분에 만정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만정의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체력이 고갈된 만정은 탁자 위에 엎드려 그저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낮에 잠을 자는 건 마마들에게 꼬집혀 죽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마들은 정말로 만정을 꼬집었다.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살짝 꼬집는 건 대체 어떤 수법인지는 몰라도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 뼛속까지 아팠다.

    두어 번 꼬집힌 후 만정은 자는 것을 포기한 채 피곤에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조금 전, 만정은 주렴 바깥에서 어떤 이가 왕 마마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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