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약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친 솜이불이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남자를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도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왕야…….”
병환으로 잠긴 목소리가 더해진 아리따운 음성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서숭산이 힐끗 약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오히려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럴 정신이 남아 있나? 보아하니 병환이 심각하지 않은 것 같군. 몸조리 잘해. 언제까지 남자에 굶주린 행색을 할 셈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제 성모(圣母)인데, 사람들이 보면 역겹다고 할 거야.”
말을 마친 서숭산은 소매를 뿌리치고 떠났다. 차가운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약연이 옷과 이불을 꽉 쥐었다. 그녀는 몇 번 흔들린 뒤 움직임을 멈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무 화가 나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하, 역겨워? 과연 무정한 남자로군. 그럼 애초에 이런 역겨운 여인은 어떻게 가지고 논 거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이제는 내 몸뚱이도 눈에 차지 않는다 이거야?’
약연은 다시 한번 맹세했다. 또 다시 서숭산에게 마음이 약해지면 자신은 더 이상 국암사에서 십 년 넘게 버틴 약연이 아니리라.
‘서숭산, 나는 당신을 증오해! 나 약연은 반드시 당신이 내 발밑에 꿇어앉아 사랑한다고 외치게 만들 거야! 당신은 끝까지 조옥언을 얻을 수 없어!’
분개한 머리와 별개로 약연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는 솜이불을 꼭 껴안은 채 무력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사랑은 기이한 것이었다.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이루지 못하면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애초에 구염락이 없었다면 서숭산에게 약연은 한 번 쓰고 나서 버려질, 심지어 존재할 가치도 없는 장난감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염락의 존재는 약연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바라게 했다. 심지어 그녀는 서숭산의 배반을 미워할 자격도 생겼다.
한편, 국암사를 나온 서숭산은 습관처럼 조옥언에게 향했다. 그에게 조옥언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조옥언을 향한 마음은 이미 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녀는 손짓 하나만으로 소년 시절 서숭산이 품었던 열정을 자극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의 환심을 사고,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조옥언은 또 다시 저택에 불청객으로 뛰어든 서숭산을 발견한 후 이번에야말로 저택을 지키는 시위를 바꿔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물러가거라.”
조옥언은 자신을 뒤따르던 수많은 계집종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홍촉만 남겨두었다. 섬세하게 조각한 듯한 외모는 늘 그렇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조옥언을 좋아하는 서숭산의 눈에 그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서숭산에게 조옥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조옥언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숙한 멋이 더해진 그녀는 그저 서숭산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옥언은 하릴없이 남의 집 전원(前院)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서숭산을 크게 꾸짖고 싶었다.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하지만 오늘따라 서숭산은 의기소침해 보였다. 그래서 조옥언은 다년 간 우정을 쌓은 입장에서 너무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오히려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연말이 되면 조옥언은 매일 전원(前院)에 들러 집안 살림에 대한 장방(账房, 회계를 맡아보는 곳)의 보고를 들었다. 덕분에 최근 며칠 동안 조옥언은 자신의 전원에 죽치고 있는 서숭산과 계속해 마주쳤다. 볼 때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던 서숭산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실제로 서숭산은 마음이 답답했다. 싸워 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금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숭산은 구염락과 굳이 겨루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육세지란(六势之乱)으로 혼란하던 시기, 서숭산은 반란을 생각하기도 했고,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황실의 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
구염락은 육세지란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백국(白国)과의 전쟁에도 완벽히 대비했다. 그를 적으로 돌리는 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서숭산은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을 과대평가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구염락과 대치 국면을 지속한다면 결국 서숭산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두 가지였다. 병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기를 기다리거나, 이대로 구염락에게 숙청당해 구족이 멸문당하는 것.
서숭산이 이러한 결말을 원할 리 만무했다. 특히 풍윤제가 죽고, 조옥언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는 유달리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서숭산은 보고픈 옥언을 더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이렇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짙은 눈썹을 위로 올린 서숭산이 건들거리는 표정으로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조옥언은 그를 비웃었다.
“네 나이가 벌써 마흔이 넘었다는 걸 생각해야지. 그러니 꼭 거리에서 아가씨를 희롱하는 것 같구나.”
“옥언, 너는 아가씨가 아니잖아. 난 기껏해야 나이 든 부녀자를 상대한 것뿐이야!”
조옥언은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스스로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서숭산 같은 인간은 될 대로 되라고 홀로 내버려 둬야 마땅했다.
“홍촉, 얼른 가자.”
서숭산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르며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화났어? 옹졸하게 왜 그래. 차라리 욕을 해. 옥언, 옥언! 정말 화났어?”
서숭산이 절박하게 조옥언의 뒤를 쫓았다.
“내가 잘못했어! 당연히 넌 예전처럼 예뻐. 열여섯일 때처럼 말이야. 화내지 마! 잘못했다니까!”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서숭산은 조옥언을 쫓아다니고, 화가 난 조옥언은 씩씩대며 그를 무시하던 그때로.
갑자기 발걸음을 우뚝 멈춘 조옥언이 서숭산을 바라보았다. 왕을 대하는 정중함이 없이 오랜 친구를 대하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서숭산, 넌 나이를 개한테나 줘 버린 거야?”
“왜 그런 저속한 말을 해. 너희 모친께서 널 가만두지 않을 텐데?”
서숭산이 교활한 웃음을 띠며 조옥언을 바라봤다. 즉시 정색한 조옥언이 엄숙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서숭산,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네 자식들을 생각해야지. 네가 매일 이러고 있으면 네 가족들의 기분이 어떻겠어.”
“…….”
“숭산, 우린 이제 어른이고 자식이 있는 사람들이잖아. 내 며느리는 지금 회임 중이야. 그리고 난 며느리가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과 마주치는 걸 원치 않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서숭산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가 조옥언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오늘 점심은 뭘 먹고 싶어? 본왕이 사다 주지.”
조옥언이 질렸다는 듯 서숭산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 그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홍촉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서숭산은 언제나 그랬다. 그는 좀처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년 시절에도, 중년이 된 지금도 진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서숭산은 체신머리가 없는 성격이라기보다, 조옥언 앞에서 소년처럼 굴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렇게나마 조옥언에게 들러붙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로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터였다.
조옥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조옥언은 그와 함께 황제가 씌우는 혐의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조옥언을 향해 서숭산이 언제나처럼 소리쳤다.
“찐만두 사 올게!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 가게 것으로! 점심에 봐!”
그 말에 하마터면 자갈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건 홍촉이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느끼한 만두를 먹느라 벌써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부인…….”
“내버려 두거라. 이따 오면 내쫓도록 하고. 그럼 개 몇 마리와 함께 밖에서 먹겠지. 사람들에게 더욱 비웃음거리가 되어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조옥언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서숭산이 저지른 짓에 비하면 이 정도의 대접도 과분했다.
홍촉은 체념하고 고개를 떨궜다.
“대체 왕야께서는 왜 저러시는 걸까요?”
조옥언은 서숭산이 많이 자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 서숭산은 하늘과 인간이 동시에 노할 만한 일을 수도 없이 많이 저질렀다. 다만 전처럼 무의미한 건달기는 여전했고, 이는 나이를 먹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 * *
궁에서 내보내진 금용은 헌원부(轩辕府) 후원에서 가장 큰 별원(别院)에 자리를 잡았다.
헌원 부인의 정방(正房) 못지않은 별원은 이 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곳으로, 마당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정취가 있었다. 또한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버드나무와 가산(假山)이 있는 풍경은 퍽 특별했다. 내부 역시 황실 정원을 지은 건축사를 모셔와 지은 것이었다.
‘망귀루(望归楼)’는 ‘뭇 사람이 바라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헌원 부인은 본래 이곳을 아들 헌원상의 정실로 내정된 주씨 가문의 적녀(嫡女, 정실부인의 딸)에게 줄 생각이었다.
주씨 가문은 학자 가문이었고, 적녀는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용모는 더욱 출중했다.
주씨 가문에서 그토록 훌륭한 딸을 외실(外室, 첩)이 낳은 아들에게 보내 주는 것에 대해 헌원씨 가문의 사람들은 몹시 감격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아직 시집도 오지 않은 그녀에게 특별히 별원을 지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황제가 돌연 곁에 있던 궁녀 한 명을 헌원상의 첩으로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거처를 정할 수 없었던 헌원씨 가문은 일단 궁녀를 망귀루에 머물게 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아직 헌원 대인과 헌원 부인 외에, 별원이 미래의 정실 며느리를 위한 곳이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역시 꽤 귀찮은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본래 황제가 여인을 내리는 일은 헌원씨 가문과 같은 귀족에 있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금용은 달랐다.
금용은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든 시녀로 황제와 정이 깊었다. 그녀가 과거 황제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황제가 그녀에게 각별하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헌원오마가 금용에게 망귀루를 내어준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나, 그는 황제가 무슨 연유로 금용을 출궁시키는지, 은혜를 베푼다면 왜 정실부인이 아닌 첩으로 보낸 것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일이 정해진 이상 헌원씨 가문은 황제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황제의 은혜에 감읍했으나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