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용좌에 앉은 자신의 모습은 심지어 이를 지켜보던 구염락의 마음마저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저리도 냉담해진 걸까. 하지만 구염락은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장서열을, 그리고 아이를 원했다.
용좌에 앉은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제왕이 되리라. 하지만 그처럼 재미없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장서열을 떠올린 구염락은 또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마자 또 매서운 시선 하나가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뼛속까지 불만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마치 네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는 듯한 짜증스러운 시선이었다.
‘내가 웃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구염락은 화가 났다. 이제 막 제왕의 기운을 갖추기 시작한 황제 구염락이 상대와 마찬가지로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에 용좌에 앉아있던 그가 조금 만족스러워했다.
품 안에 있던 장서열이 몸을 뒤척이자 구염락은 잠에서 깼다. 진 공공이 침대 휘장을 열어 젖혔다. 휘장에 매달린 수정이 소리를 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진 공공이 조용히 말했다.
“폐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구염락은 품에 안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그녀를 바라보자 꿈속에서 보았던 불쾌한 그림자가 말끔히 사라졌다. 장서열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구염락은 조용히 침대에서 나왔다.
조로전을 나온 구염락의 곁으로 소리자가 다가왔다. 그는 금용이 이미 궁을 나갔으며, 헌원 대인이 온 가족을 이끌고 나와 절을 하며 황제의 은혜에 감읍했다고 보고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구염락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이미 금용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 * *
국암사의 새벽은 언제나처럼 스산했다. 광활하고 고요한 사원으로 독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뒷산은 어떠한 색채도 느껴지지 않았다. 뒷산의 오솔길은 이미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약연(若然)은 병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세 개의 큰 화로가 방 안을 봄처럼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녹으며 처마 끝에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약연은 노란 안색에 창백한 입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이 든 와중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이런 단조로운 곳에 머물기 아까울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세상은 이대로 그녀가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문을 연 소녀가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힘겹게 들고 들어왔다. 문을 닫은 소녀는 손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밖은 몹시 추웠지만 방은 퍽 따뜻했다. 입김을 불던 소녀는 문득 깜짝 놀라 기뻐하며 침대로 달려갔다.
“부인, 일어나셨어요?”
약연이 처량하게 웃으며 여전히 변함없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약연은 속으로 망연자실했으나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말했다.
“보아(宝儿)야, 왜 이리 일찍 일어났니? 좀 더 자지 않고…….”
“전 괜찮아요. 따뜻한 물을 가져왔어요. 얼굴을 씻겨 드릴게요.”
침대 옆 나무 발판 위로 뛰어내린 보아가 서둘러 주인을 위해 수건을 짰다. 그 모습을 본 약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한눈에 보이는 방 안을 쓱 둘러본 약연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보아야, 혹시 누가 찾아오지는 않았니?”
있는 힘껏 수건을 짜는 보아의 웃는 얼굴이 온통 빨개졌다.
“아니요. 저밖에 없는 걸요.”
보아가 주인의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약연이 실망스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보아가 고생이 많구나.”
보아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산 아래 마을에서 팔려온 말괄량이 계집아이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선녀 같은 약연의 시중을 들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쁜 나머지 이 모든 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는 본가와 달리 먹을 것과 따뜻한 화로가 있었고, 부인과 따로 쓰는 것이긴 했지만 자신의 침대도 있었다.
예쁜 부인 한 명만 잘 돌보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이는 집에서 여섯 명의 동생을 돌보던 것보다 훨씬 쉬웠다.
약연은 고개를 젓는 보아를 보면서 쇠약한 미소를 지었다.
“물 한 잔 따라 주렴…….”
즉시 손에 든 수건을 내던진 보아가 약연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약연은 소녀가 보지 않는 사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 아이는 의지(懿旨, 황제의 명령)를 내리지 않는 거지? 내가 병이 났는데 궁에 데려가 치료는 못해 줄망정 약재라도 내려 효심을 표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황제에게서는 그러한 움직임이 없었다.
‘뭔가 더 큰일을 벌이려는 걸까? 설마 나를 입궁시키려고?’
약연은 갑자기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가능할까? 내가 드디어 넘치는 부귀를 누리게 되는 걸까? 정말로 나를 무시하던 자들을 발로 짓밟을 수 있게 될까?’
약연의 얼굴에 감동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비현실적인 꿈을 싫어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황제의 생모였고, 이미 어떤 이들은 그녀를 성모(圣母)라고 존칭하고 있었다. 물론 황제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약연은 모든 사람들이 깔보던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존엄을 함부로 짓밟을 수 없었다. 과거 최고의 자리에 앉아 선심 쓰듯 구염락을 데리고 행차했던 태후 또한 몰락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약연은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절대로 성급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궁에 들어간대도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으리라.
어차피 태후의 명성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미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앞으로는 더더욱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약연은 간소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텼는데 고작 몇 년쯤이야.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아일 거라고 생각한 약연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에 덩치가 크고 우뚝 솟은 몸이 들어왔다. 전신에 냉기를 품은 그의 모습은 평소 만군(万军) 가운데 서 있을 때와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천산한설(千山寒雪)도 그의 원기 왕성한 자태를 막을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는 더욱 추위에 강해졌을 뿐, 늘 푸른 소나무처럼 어떤 변화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약연은 눈 속에 타오르는 사모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평정을 회복한 후였다.
“오셨어요, 왕야… 빈니(贫尼, 비구니가 자신을 낮춰 이르는 말)가 몸이 좋지 못하여 일어나 절하지 못하는 걸 용서하세요…….”
서숭산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기를 담은 그의 시선이 병중이지만 여전히 자태가 고운 여인에게로 떨어졌다.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정말 병이 난 게냐?”
약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늙은 여인이 이제 볼품없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보는 게 지겨워진 걸까. 예전이었다면 소년처럼 성급하게 그녀를 껴안고 제멋대로 노발대발했을 그는 지난 일 년 동안 오히려 점점 조용해졌다. 심지어 약연이 사모의 감정을 감췄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약연은 언젠가 연경에서 가장 처량했던 제일의 미녀가 대체 어떤 능력으로 최고 권력자였던 두 남자를 매료시켰는지 알고 싶었다.
서숭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약연이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더욱 차갑게 말했다.
“네 잘난 아들!”
서숭산은 구염락이 어제 자신을 난감하게 만든 일에 대해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병력을 키운 구염락의 능력에 장군으로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약연은 서숭산이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지어 그는 침대 근처로도 오지 않았다. 약연은 속으로 조소했다. 더러운 자신의 몸뚱이가 그가 마음에 간직한 유일한 극락을 오염시킬까 봐 두렵기라도 한 걸까.
“락이는 뭐라고 해요……?”
담담한 약연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운 가운데 감출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미모와 능력에 기대어 오늘날 황제가 된 아들을 낳았다.
서숭산은 침대 위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고 비꼬듯 말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것 같군. 하지만 그의 마음에 과연 네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모친이 이렇게 병들었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말이야.”
약연이 쓸쓸하게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서숭산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물론 구염락은 당연히 약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약연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약연은 아들이 자신을 영원히 배신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구태여 서숭산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약연이 가슴 아플 정도로 사랑한 남자였다.
서숭산은 그녀 대신 몸값을 치르고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인 동시에, 그녀를 또 다른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이기도 했다.
서숭산은 그가 약연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연은 여전히 서숭산을 사랑했다.
약연은 가장 어두운 나날 그녀에게 빛과 희망을 주었던 남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가망 없는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었고, 그녀에게 기회와 존엄을 가져다주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던 약연에게 서숭산의 존재는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그리고 서숭산의 사랑을 얻지 못한 건 약연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서숭산은 딱히 그녀의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그가 보살피고 지지해 올린 아이는 이제 그가 쌓아 온 일생의 공적을 말아먹을 악마로 성장했다.
서숭산의 눈빛은 고요했다. 약연을 이용해 구염락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진작에 버린 상태였다. 천하를 품은 남자가 자신을 키우지도 않은 생모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리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서숭산은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발버둥 쳐 빠져나온 약연이 고분고분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배은망덕이 무엇인지 또 한 번 그에게 확인시켜 줄 것이다.
약연은 서숭산의 침묵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서숭산이 고통과 아픔을 안겨 줄지라도, 그리하여 자신이 계속 그를 증오하더라도, 그가 영원히 설산에 우뚝 선 의기양양한 모습이길 바랐다.